오피니언

[특별기고] 북한의 핵무장과 그리스도교회

손규태·성공회대 명예교수

▲손규태 성공회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들어가는 말(문제제기)

“당신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당신의 높은 하늘을 날아서 우리의 원수들을 대항해서 싸우러 나아가는 이들과 함께 하기시를 빕니다. 그들이 받은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하늘을 날아 전투에 참여할 때 그들을 보호하시고 지키소서.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능력과 힘을 깨닫게 하시고 당신의 도움으로 이 전쟁을 속히 종결짓게 하옵소서. 바라기는 전쟁이 빨리 끝나서 다시금 지상에 평화가 임하게 하옵소서. 이 밤중에 비행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당신의 보호 하에 두시고 무사히 우리에게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우리는 당신에 대한 신뢰 가운데 계속 우리의 길을 가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영원토록 당신의 보호 가운데 있음을 믿나이다. 아멘”

이 기도는 1945년 8월 5일 남양군도 가운데 타이니안(Tinian)섬에서 원자탄을 싣고 출발하기 직전에 한 루터교회 소속의 한 군목이 드린 기도이다. 만일 이 비행기가 출발하다가 사고라도 나면 그 섬 전체가 날아갈 위험이 있다고 어떤 사람이 한 장군에게 말하자 그는 “우리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들은 이런 전대미문의 엄청난 살육의 무기를 비행기에 실어 떠나보내면서 종교적이 되었던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이러한 엄청난 살상을 가능하게 하는 무기의 사용을 우리는 단순히 정치군사적 측면에서만 다룰 수는 없다. 이러한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했고 그러나 그 결과는 다 아는바와 같이 참담한 것으로 나타났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되기로 계획되었던 핵폭탄은 이렇게 루터교회의 성직자의 기도로 시작되는 종교적 의식을 마친 다음에 출발했고 그 투하작업은 군사적으로 성공했다. 그러나 이 핵무기의 사용으로 두 도시는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고 수 만 명이 목숨을 잃고 부상당했다. 그 부상의 상처는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이들 가운데는 불구가 된 신체를 이끌고 고통을 겪고 있는 한국인들도 있다. 우리 한국인들은 일본인들과 함께 최초의 원폭피해자가 된 것이다. 전쟁은 끝나고 평화가 왔다. 미국인들은 이와 같은 성공에 다시 한 번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에게 아낌없는 찬양을 드렸었다.

이렇게 해서 핵분열의 발견과 함께 핵의 군사적 무력사용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따라서 핵무기의 개발은 제도로서의 전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핵무기의 사용에서 발생하는 압력과 열 그리고 광선은 사람들이 예측했던 목표들에만 손상을 입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핵무기의 사용은 적에게만 치명타를 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용자들에게도 엄청난 위험부담을 주고 있다. 이것의 사용으로 인해서 이제까지 통용되던 전쟁에서 윤리적 국제법적 기준들이 전적으로 무용지물이 되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비극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인류가 이제는 핵무기의 개발을 통해서 자신들의 역사를 완전히 끝장낼 수 있는 수단들을 손에 쥐게 된 것이다.

남한핵과 북한핵

핵무기는 제일 먼저 미국에 의해서 개발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 의해서 사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곧이어 소련도 핵무기를 소유하는 국가가 되었다. 미국이 언제나 군사 기술적 차원에서 소련을 앞질렀지만 이들 두 강대국들 사이의 군비경쟁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우리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만이 핵무기의 독점국가들은 아니다. 영국, 프랑스 중국,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등 제한적이긴 하지만 이들은 핵무장의 국가들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외에도 공적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핵무기를 가진 국가들이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또 핵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과 자료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은 더 많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일본이다. 일본은 이미 프랑스로부터 상당량의 플루토늄을 공공연히 수입해서 비축하고 있으며 기술적인 측면을 고려하면 일본은 당장이라도 핵무장을 할 수 있는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이렇게 핵무기 제조기술은 일반화되어 가고 있으며 따라서 그 국제적 통제의 가능성도 점차 희박해져 가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이러한 핵무기제조기술의 일반화와 함께 기존의 핵기술 보유국들의 핵기술의 독점적 지배도 강화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핵기술의 독점적 지배에 대한 반발로서 제3세계국가들 가운데는 독자적인 핵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이러한 핵무기 제조에 대한 의도는 1960년대 박정희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이것은 핵확산을 막고 핵무기의 독점적 지위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미국에 의해서 좌절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핵무기는 이미 1959년 이래로 유럽의 나토지역과 더불어 한반도에 배치되어 있어서 미국에 핵우산에 의한 안보를 공약하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박정희의 기도를 좌시할 수 없었다. 동시에 이것은 극동에서의 핵우산정책을 통한 핵무기의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려고 하는 미국으로서는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동시에 한국의 핵개발은 북한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 그리고 당시 소련에게도 위협이 되는 것으로서 이들 가운데 핵을 가진 중국이나 소련은 물론 일본도 핵을 갖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핵무기의 보유는 극동 아시아의 군사적 균형을 새롭게 설정해야 하는 부담으로 등장하며 이것은 마침내 이 지역의 안전에 중대한 위해를 가져올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박정희와 미국과의 관계악화가 핵무기 개발의도로 나타났을 수도 있고 그 반대로 그의 핵무기 개발의도가 양자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켰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결과론이지만 그와 미국과의 관계악화는 그의 정치적 생명뿐만 아니라 그의 자연적 생명마저도 끝장나게 하는데 간접적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미국은 한반도에서 핵무기뿐만 아니라 핵기술의 독점적 지배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던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핵무기의 독점적 지배 내지는 우월한 지위 확보라고 하는 것은 강대국들의 지위확보에 가장 필수적인 조건들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의 몰락 이후 남한에서는 핵무기 개발을 시도한 흔적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이미 앞서도 말한바와 같이 미국의 핵이 배치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핵무장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1990년대 초 북한의 핵개발 의혹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은 북한의 핵개발이 한반도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평화를 위협한다는 관점에서 여러 경로를 통해서 다각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북한 핵의 문제는 세계평화라는 관점 보다는 미국 등 핵무장을 가지고 있는 나라들의 기존의 독점적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데 더 관심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 일본도 일본과 북한과의 국교정상화를 위한 대화에 장애요소로서 북한의 핵개발을 들고 나오기 시작했다. 이와 아울러 남한 정부도 북한 핵에 대해서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노태우 대통령은 유엔가입과 관련해서 유엔총회 연설에서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중지할 것을 촉구하고 남북한의 군사적 신뢰구축조치에 응한다면 한반도의 핵문제에 대해 북한과 협의할 용의가 있음을 천명한다. 1991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남한 정부는 북한이 핵무기개발을 중단하고 핵물질과 시설에 대한 사찰을 무조건 받아들일 것을 촉구했다. 북한은 여기에 대해서 북한은 남한 내 미군의 핵무기철거가 우선적으로 토의되어야 하며 한반도의 비핵지대화 실현이 평화를 만드는데 가장 급선무라고 강조하면서 ‘조선반도 비핵지대화에 관한선언’(초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리하여 남북한은 핵무기를 둘러싸고 첨예한 대립을 보였다. 남한은 북한의 핵무기개발의 중지를 요구하고 나섰고 북한은 남한 내에 현존하는 핵무기의 철거를 주장했다. 북한은 자신들은 핵무기를 만들 능력도 의사도 없다고 주장하면서 한반도에 배치되어 있는 미군의 핵무기와 더불어 그들은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대립상황에서 노태우대통령은 1991년 11월8일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구축을 위한 선언’을 발표한다. 그는 이 선언을 통해서 1)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 및 핵무기의 제조, 보유, 저장, 배치, 사용금지, 2) 한국내의 핵시설과 핵물질의 국제적 사찰, 핵연료 재처리 및 핵 농축시설의 불 보유, 3) 핵무기. 무차별 살상무기. 화학생물무기의 전면 제거를 위한 국제적 노력에의 참여와 협력 등 3개항의 비핵정책을 천명했다. 1.2항은 화생방무기의 제조와 보유를 전적으로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2항은 핵무기의 평화적 이용에 필요한 핵재처리와 농축시설의 불 보유를 선언한 것으로 이것은 곧 핵발전소 등에 필요한 핵물질의 생산과 처리를 전적으로 외국에 의존하겠다는 것이라 해서 야당으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은바 있다. 야당은 이러한 비판을 통해서 그동안의 핵기술의 대미의존이 가져다 준 문제점을 지적했던 것이다.

또 노태우대통령은 1991년 12월 18일 ‘핵부재선언”을 통해서 남한 내에 어떠한 종류의 핵무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선언했다. 이것은 북한이 남한 내의 미군의 핵무기의 존재를 구실로 하고 핵무기를 개발하며 동시에 핵안전조치협정에 서명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동안 남한 내의 미군의 핵무기의 존재여부에 대해서 미군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었다. 만일 남한 내에 핵무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미군이 그동안의 핵무기의 존재를 솔직히 시인하고 그 철거를 선언했어야 할 것이다. 한국인의 주권을 무시하여 한국국민의 동의도 받지 않고 1959년에 남한에 들어와 있던 미군의 핵무기는 우리의 동의도 없이 철거되고 나서 주권국민을 대변하는 대통령이 외국의 핵무기 부재선언을 하는 것은 국제법적으로나 국민주권적 차원에서 온당한 행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남북한은 1991년 12월에 서울에서 열린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합의한 바에 따라서 12월 31일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합의했다. 이것은 1992년 2월 19일 평양에서 개최된 제6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남북기본합의서와 함께 공식 발효되었다. 이 공동선언문은 “남과 북은 한반도를 비핵화 함으로써 핵전쟁 위험을 제거하고 우리나라의 평화와 평화통일에 유리한 조건과 환경을 조성하며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와 안전에 이바지하고자 한다.”고 했다. 이러한 목적 하에 핵무기의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비 및 사용을 하지 않으며 나아가서 핵재처리 시설과 우라늄농축시설을 보유하지 않는다는 데 합의했다.

이러한 비핵화 공동선언은 그동안 북한이 주장해 오던 ’한반도의 비핵지대화‘를 위한 노력과 남한 정부가 미군의 핵무기를 한반도에서 철거한 상황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동안 한반도를 위협하고 있던 핵무기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동시에 통일과 평화를 향한 진일보한 조치였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어서 북한은 1992년 1월 30일 핵안전조치협정에 서명하고 1992년 10월까지 수차례에 걸쳐 국제원자력기구의 핵사찰을 받은바 있다. 이리하여 핵문제에 관한한 남북한이 별 문제 없이 현안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합의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 하나는 비핵화공동선언 4항에 나타난 “상대측이 선정하고 쌍방이 합의하는 대상들에 대하여 상호 사찰한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통일부가 주장하는 대로 국제원자력기구의 핵사찰이 미흡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핵문제는 민족의 생존과 직결되는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별도로 상호사찰을 하자는 것이었다. 여기에 동의한 북한은 상호사찰에서 남한 내의 미군기지에 대한 사찰을 주장하고 나왔다. 그것은 실질적으로 남한 내의 핵무기 보유자는 미군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한 사찰 없이 한국군에 대해서만 사찰하는 것은 눈감고 야옹하는 식일 것이다.

또 하나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원자력기구가 북한의 영변지역에 대한 ‘특별사찰’을 들고 나온 것이다. 북한에 대한 불신이 정상적 핵사찰을 통해서는 해소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북한은 특별사찰의 대상이 되는 지역은 군사시설이며 동시에 이러한 불공평한 사찰은 주권국가의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적 압력이 거세지자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에서 탈퇴를 선언하게 되었다. 불공정한 압력을 통해서 사찰을 강행하려는 것에 굴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미국과 북한 그리고 미국과 한국 사이의 새로운 사태발전으로 나타났다. 우선 미국과 북한은 두 차례에 걸친 회담을 갖게 했고 앞으로 세 번째의 회담이 예정되어 있다. 이 회담들을 통해서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 탈퇴를 유보하는 결정을 내렸으며 미국은 북한의 주권과 자주권을 인정해 주는 결과를 낳았다. 이것은 그동안의 미국과 북한관계로 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리하여 핵문제 해결뿐만 아니라 미국과 북한 사이의 화해를 거친 국교정상화까지도 점칠 수 있게 되었었다.

이러한 미국과 북한과의 접근에 대해서 남한은 의심과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고 이것은 여러 경로를 통해서 미국과 북한 사이에 화해를 위한 회담에 쐐기를 걸고 나왔다. 처음에는 미국과 북한 회담과 그 합의상항에 대해서 외무장관은 환영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기까지 했으나 정부 내의 수구세력의 반발이 거세지면서 대통령마저도 “더 이상 양보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리고 지난 9월에 있은 미국과 북한회담의 미국 측 대표가 방한해서 외무부당국자들과 가진 회담에서는 이미 예정된 미국과 북한간의 제3차 회담은 북한의 가시적 태도변화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확인했다. 이것은 한국정부의 수구적 입장이 강력하게 반영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한국의 보수적인 언론들을 유엔의 제재를 들고 나오고 중국이 여기에 제동을 걸 경우에는 G7과 같은 선진공업국들의 북한제재까지를 상상하고 나서고 있다.

여기서 하나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한국정부의 핵문제에 대한 일관성 없는 태도이다. 핵이 민족의 사활이 달린 것이라면 이미 오래 전에 한국에 와 있던 미국의 핵에 대해서는 그동안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핵이란 그 성격상 적과 아군 그리고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가리지 않고 살상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무기라는 것을 한국정부는 알지 못했다는 말인가? 그동안 한반도에 있는 미군의 핵은 구소련의 핵탄두의 표적이 되어 왔다는 것을 알지 못했는가? 북한 핵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남한 내에 1959년 이래 오랫동안 배치되어 있던 미군 핵에 대해서도 정부는 일정한 대응책을 가지고 있었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인도수상이 한국에 왔을 때 그리고 프랑스의 대통령이 한국에 왔을 우리 정부는 그들과 북한 핵의 위험성을 거듭해서 강조하고 나섰다. 내세우는 입장은 북한 핵은 한반도에서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위협이 된다는 것이다. 알아 두어야 할 것은 프랑스와 인도는 엄청난 양의 핵무기를 저장하고 있는 나라들이다. 그들 나라의 핵과 핵실험이 가져다주는 위험성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말하지 못하면서 그들에게 북한 핵의 문제해결에 협조해 달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자가당착인가? 당시로서는 만들어지지도 않은 북한 핵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만들어서 저장하고 있는 프랑스와 인도의 핵에 대해서 폐기를 주장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한국정부는 무엇보다도 민족적이거나 자주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일정한 핵정책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남북한 민족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 당시 한국정부의 실상인 것이다. 이런 민족내부의 문제를 우리와 직접 관련도 가지고 있지 않은 남미나 아프리카의 국가들에게 까지 협조를 구하는 것은 민족적 자존심은 물론 정치적 능력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한국정부는 핵무기에 대한 일정한 입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핵이 인류를 파멸로 몰아가는 것이라고 판단한다면 그것의 폐기를 주장하는 정책을 일관되게 밀고 나가야 할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우리 땅에 주둔해 있던 미군 핵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못했던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리고 핵보유 국가들에게 북한 핵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통사정 하는 추태도 이젠 그만 둘 때이다. 이제는 정치력을 발휘해서 민족문제 즉 통일문제 등 주요한 현안을 주체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할 때이다. 그리고 핵문제에 대해서도 일정한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핵무기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태도

핵무장에 대한 그리스도교회의 입장들에 대해서는 그동안 세계교회협의회(WCC)와 유럽의 교회들 그리고 몇몇 지도적인 신학자들의 견해들을 간략이 스케치하는 것을 통해서 밝혀보고자 한다.

1) 세계교회협의회(WCC)의 핵무장에 대한 견해: 1937년까지 유럽과 북미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전쟁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집단의 입장으로 갈라져 있었다. 첫째집단은 절대평화주의자들로서 이 세상에 전쟁은 사라져야 하며 그리스도인들은 전쟁에 절대로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현대적인 형식에서의 전쟁은 어떤 경우든지 죄악이며”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과 모순되는 전쟁수행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현대적인 형식의 전쟁”을 말할 때는 화생방무기와 같은 고도로 발전된 무기 체제를 통한 전쟁을 의미한다. 둘째의 잡단의 입장은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정의로운” 전쟁에만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국제법상 타당한 전쟁에는 참여할 수 있고 또 전쟁수행에 있어서 정당한 수단이 동원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전쟁만이 그 준거가 된다. 마지막 집단의 견해는 전쟁은 죄에 빠진 세계에 속한 것이므로 어떤 노력을 통해서도 이 세상에서 그것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전쟁에 대한 일반적 입장들은 1945년 핵무기의 투하와 함께 여러 측면에서 변화를 겪게 된다.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의 창립총회에서 “전쟁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선언함으로써 교회는 이제까지의 애매하고 분열된 입장들에서 분명한 입장을 천명했다. 이것은 전쟁은 타락한 세계에서는 불가피하다는 종래의 패배주의적 입장을 뒤집은 것일 뿐만 아니라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새로운 성찰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암스테르담의 선언서는 다음과 같이 계속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전면전을 하게 되었다. 이제 남녀 모두가 전쟁에 참여하도록 되어 있다. 여기에 부가해서 엄청난 공중폭격과 핵무기와 새로운 무기들의 발견이 뒤따랐다. 이 모든 것은 현대전에서 이전의 전쟁들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규모의 무차별적 파괴들을 낳게 된다.” 핵과 같은 현대적인 무기의 발견 이후에는 전쟁에 대한 과거의 관념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의로운 대의를 위한 정당한 전쟁을 정당한 무기들을 가지고 수행할 수 있다고 하는 전통적인 정당전쟁론은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는 더 이상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세계교회협의회는 체코의 저명한 신학자 로마드카의 입장을 따랐다. 그는 바르트의 제자로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덜레스(Dulles)의 입장을 반박하고 나선다. 말하자면 종교적으로 동기화된 반공주의와 그것을 기초로 한 미국의 핵무기 독점 및 사용가능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소위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수호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핵무기의 제조와 배치 사용을 인정하고 있는 미국 등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은 신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1954년 미국의 에반스턴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에서도 확인되었다. 말하자면 어떠한 이데올로기적 전제를 가지고 대량학살무기에 의한 위협이나 사용 등을 교회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동서냉전체제하에서 교회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그 어떤 이데올로기를 수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핵무기 사용을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러한 논의상황은 1958년 “핵시대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과 전쟁방지 - 하나의 신학적 논의”라는 제목 하에 완성된 세계교회협의회의 연구위원회와 더불어 처음으로 달라졌다. 이 문서의 특징을 들자면 두 개의 이제까지 같이 논의되었던 문제들이 제외된 것이다. 첫째 이 문서는 정당전쟁론으로의 복귀를 거부하고 있다. 그것은 핵시대에 있어서 “전쟁수행의 허락된 영역”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으며 따라서 전쟁은 완전히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시간이 없어서 평화주의적 입장에 대한 충분한 논의를 하지 못했고 앞으로 그 문제를 다루기로 한 약속이 아직도 미해결로 남아 있다.

이러한 세계교회의 입장은 여러 측면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20여년이 지나서 1966년에 제네바에서 열린 “교회와 사회위원회”에서는 그동안의 세계적 변화들을 염두에 두고 새로운 반성들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동안의 탈 식민지화, 국가들 사이의 빈부격차들 및 화생방무기들의 발전 등과 관련해서 전쟁문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들이 새로이 정리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전통적 거대 교파들(루터교회, 개혁교회, 성공회 등)은 무력사용에 대해서 원칙적으로 정죄하지 않았었지만 다른 한편 혁명신학과 해방신학의 영향으로 억눌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혁명의 권리“에 대한 교회적 승인도 요구되었다. 그 동안의 국가 윤리적으로 논거된 국민들의 국방의무의 입장은 더 이상 견지되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은 ”핵평화주의“(Nuklearpazifismus)에 대한 고백으로 나타났는데 ”상호간의 핵을 통한 자살행위는 더 이상 정의를 실현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의가 수호하거나 달성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이제 모든 정부들과 민족들에게 말하는데 핵전쟁은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것이며 모든 악들 중에 가장 큰 악이다. 따라서 우리가 확인하는 바는 모든 정부들과 그 직무담지자들의 최고의 의무는 핵전쟁을 방지하는 것이다.”

1983년도 캐나다의 밴쿠버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에서 ‘평화와 정의’에 대한 선언에서 핵무기들은 모든 것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기 때문에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이 다시 한 번 천명되었다. 핵무기의 제조와 배치는 물론 그것의 사용은 인류에 대한 반역이며 그와 같은 것을 시도하는 것은 신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정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천명했던 것이다. 물론 세계교회협의회는 하나의 교단이 아니고 또 그 총회도 가톨릭의 공의회와 같은 구속력이 있는 집회는 아니지만 전 세계 개신교회들은 핵무기의 제조와 배치 그리고 사용은 하나님의 뜻에 반할 뿐만 아니라 인류에 대한 범죄행위라는 것을 분명히 하게 된 것이다.

2) 독일 교회의 핵무장 논의: 1958년 서독에 미국의 핵무기의 배치가 결정되었을 때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여기에 대한 찬반논쟁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특히 히틀러 치하에서 반 히틀러 투쟁에 가담했던 고백교회의 형제위원회와 형제단들은 여기에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선다. “우리는 복음의 이름으로 우리나라 안에서 (핵)전쟁들의 준비를 즉시 중지할 것을 요구한다...우리는 진지하게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핵전쟁 준비에 어떠한 경우에도 동참하는 것을 거부할 것을 요구한다...이런 문제에 대해서 중립적 입장은 기독교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세 가지 항목 모두를 부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이 내포하고 있는 것은 핵무기는 더 이상 정치적 수단으로서의 전쟁에 사용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동시에 핵무기의 승인은 신앙문제(status confessionis)와 직결된다는 것이다. 즉 핵무기를 고백하는 이는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논쟁가운데 서독개신교협의회는 연구위원회를 구성했고 이 연구위원회는 11개항의 논제를 통한 연구결과를 보고했다. 이것이 소위 핵무장에 대한 하이델베르크 논제이다. 이러한 논제들은 독일개신교 협의회에서 행동 지향적 구속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이 논제들은 핵무장에 대한 각기 대립되는 두 개의 입장들의 보완을 시도하고 있다. 즉 논제 7에서 “교회는 무기포기를 기독교적 행동방식으로 승인해야 한다.”고 하는 입장과 논제 8의 “핵무기의 존재를 통해서 자유 안에서 평화를 확보하려는 시도” 역시 그리스도인의 행동양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서로 상반된 논제들 사이에서 보완성 이론을 제기했던 것이다. 그래서 논제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핵무기라는 딜레마에서 직면하게 되는 다양한 양심결단들을 보완적 행위로서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보완성 원리는 핵무장을 극구 반대하던 고백교회 계통의 인사들 및 개혁(장로)교 전통에 선 인사들과 공산주의의 위협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핵무기로 무장하고 사용해야 한다는 루터교회 신자들 사이의 갈등 사이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입장은 교회의 공적 기구인 총회들에 의해서 어느 하나가 선택되지 못하고 개개인의 양심의 결단으로 넘겨진 것이다.

둘째로 이 하이델베르크 논제는 그 기본 경향에 있어서 상호 대립되는 행동방식들의 동시성과 더불어 중간윤리(Interimethik)를 대변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핵무기들의 포기와 그것들의 유지는 단순히 무시간적으로 동등하게 이해되지 않고 역사적 발전 과정들에서의 대칭적 요소들로 파악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무기포기가 일차적이고 유보됨이 없이 승인된다. 따라서 군사적인 평화확보에 참여하는 것은 시간적 유보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셋째로 핵시대에 있어서 평화는 삶의 조건이라는 것이 하이델베르크의 논제의 출발점이다. 왜냐하면 핵무기는 적군과 아군, 적과 동지를 구별하지 않고 멸절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핵무기를 제작하고 배치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사용할 수 있다고 하는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의 논리는 지지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핵무기와 관련해서는 보완성원리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3) 개혁교(장로교) 연맹의 입장: 핵무장에 대한 독일개신교협의회(EKD)의 애매한 입장에 대해서 독일의 개혁(장로)교 세계연맹은 1982년 6월 자신들의 최고의회를 통해서 보다 확고한 입장을 천명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과 교회의 평화책임”이라는 공식문서를 통해서 세계개혁교회 연맹은 독일개신교협의회의 입장을 비판하고 자신들의 확신을 천명했다. “평화문제는 신앙고백의 문제”라는 전제 하에서 “모든 생명을 파괴하는 핵무장은 반신적인 것으로서 신앙고백과는 일치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따라서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는 신앙고백의 상황이 주어진다.”고 했다. 즉 핵무기를 찬성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핵무장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을 신앙의 문제로 삼으려고 할 때는 적어도 다음 세 가지 차원들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신학적 차원이다. 말하자면 신앙의 기본항목의 관점에서 볼 때 핵무장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반한다는 것이다. 개혁교연맹의 문서 제2항에 보면 “그리스도의 화해행위에 기초한 새로운 현실은 인간들 사이에서 생명을 위협하는 모든 적대성과는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계의 창조주요 보존의 주님이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하나님에 의해서 사랑받고 계약의 상대자로서 선택받은 인간들을 멸절하고 창조세계를 황폐화시킬 수 있는 대량학살무기의 개발, 배치 그리고 사용과는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이다(논제 3항). 이렇게 볼 때 세계개혁교회 연맹의 문서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세계와의 화해(고후5:17)의 말씀이 그 신앙고백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것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신학적 기초는 모든 교의학과 윤리학의 기초요 중심으로서의 화해이론을 말하고 있는 바르트의 신학이다. 화해야말로 모든 현실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행위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러한 대량학살무기들의 개발, 제조, 배치 그리고 사용은 신학적으로 죄악으로 인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죄에 대한 신학적 범주는 여기서는 일차적으로 개인적인 도덕적 결함으로서 파악되지 않고 대량학살수단을 갖춘 시대에 인간을 전멸시킬 수 있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고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하나님 이해와 세계이해의 왜곡을 의미한다.

둘째는 정치적 윤리적 차원이다. 여기서 개혁교회세계연맹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핵과 같은 대량학살무기는 기독교신자로서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어떤 중립적인 것(Adiaphora)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수단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뭔가 선한 목적이나 목표를 위해서 사용될 수 있는 종류의 무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이것이 상대방에 대한 위협정책에 있어서 효과적인 전쟁방지수단이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전쟁수행수단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이것이 전쟁수행수단이 될 경우에는 전통적으로 주장되어온 전쟁에 대한 어떠한 긍정적 결과도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세계개혁교회연맹의 논제는 1959년 독일교회의 하이델베르크 논제 8항 즉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한 행동양식으로서의 핵무장의 논거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셋째는 교회론적 차원이다. 개신교 특히 루터교회 전통에서는 신앙고백의 문제는 전통적으로 종교개혁 당시의 고백문서들과의 관련에서만 취급되어 왔고 그리고 근래에 와서는 복음의 진리에 대한 고백은 히틀러의 전제에 대항해서 수행되었던 교회투쟁과 바르멘 신학선언과 관련해서 이해되었었다. 이 때 제기된 신앙고백의 문제는 누가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일원이며 누가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이 공동체로부터 배제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신앙고백의 상황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일원이 되느냐 아니면 거기에서 제외되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는 교회사적으로는 이단 심판을 통해서 교리적 관점에서 결정되었었다. 그러나 핵무기를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에 따라서 교회구성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 결정하는 것은 교회론의 문제이지만 이단 심판이나 파문과 같은 차원에서 이것이 다루어지지는 않는다. 세계개혁교회연맹의 문서도 그것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즉 신앙고백의 문제는 ”파문이나 분열의 위협 차원에서가 아니라 신앙고백의 구속력 있는 결단에로의 초청과 호소“의 차원에서 말해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핵무장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집단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개인적 차원에서의 신앙고백 상의 문제가 될 뿐만 아니라 그 집단의 교회성도 문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여기서 핵무장에 대한 세계교회협의회와 독일개신교협의회 그리고 개혁교회 세계연맹의 입장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가장 분명한 입장을 천명한 것은 개혁교회세계연맹이라고 할 것이다. 핵무장의 문제는 신앙고백의 문제요 다라서 하나님과 핵무기를 같이 고백하거나 섬기려 하는 입장이나 하나님 보다 핵무장에 자신의 안전을 위한 신뢰를 더 두는 것은 기독교인의 자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핵을 고백하느냐 그것을 부정하느냐에 따라서 그리스도인 됨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결론

오늘날의 북한의 핵문제와 관련해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 핵보유 국가들과 관련에서 그리스도인들 아니 오늘날 모든 인류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대량학살무기들은 무조건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량학살무기들을 생산하고자 하는 국가들은 그 기도를 중지해야 한다. 이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전통적인 정당전쟁론에 기초해서 본다고 하더라도 이 대량학살무기들의 사용은 정당화 될 수 없다. 핵무기의 위협은 전쟁을 억제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핵전쟁을 유발하게 할 가능성이 있다. 또 이 핵무기들은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어느 일방이 핵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위협 하에서 평화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핵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과 같은 기술 사회에서는 어느 편에도 승리를 보장해 주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제간의 갈등해결의 유효한 수단으로서의 전쟁은 핵무기의 발견으로 인해서 더 이상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평화만이 삶의 계명이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핵무기의 승인은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고백의 문제다. 전통적인 신앙고백들(사도신경이나 니케아신앙고백)을 통해서 그리스도인 됨을 규정할 것이 아니라 핵에 대한 한반의 입장에서 규정되어야 한다.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원수 사랑의 계명의 실천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갈등의 문제를 사랑으로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너무나 이상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군사 전략가들의 현실주의가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왔는가? 소련의 고르바초프를 통한 동서간의 화해는 사실상 미국 펜타곤의 정치적 군사적 현실주의에서 온 것이 아니라 원수 사랑의 이상주의에서 온 것이다. 남복통일과 북한 핵의 문제도 현실주의적 접근을 통해서 해결될 수 없다. 이것은 우리가 지난 40여 년간의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현실 정치적 판단에 기초한 남북한의 문제해결의 시도는 아무런 결과도 가져다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원수 사랑의 이상주의만이 해결의 열쇠를 제공할 수 있다.

셋째 그리스도인들은 핵이라고 하는 대량학살무기와 관련해서 보다 진지하게 그리고 깊이 그리스도인 됨의 실존을 고려해야 한다. 예수께서 산상설교에서 간음에 대해 언급하실 때 ”옛 사람은 간음하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인을 보고 음심을 품어도 간음한 것이니라.“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핵무기의 개발, 생산, 배치, 사용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의도를 가져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미 핵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한반도의 현실 즉 북한이 핵무장을 한 현실에서 우리는 더 이상 전통적 안보개념을 통해서 평화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아무리 남한이 최신예무기들로 무장한다 해도 안보는 유지될 수 없고 따라서 한반도에서 평화의 길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북한의 핵무장에 대항해서 미국의 핵우산을 통해서 안보나 궁극적 평화가 유지될 수는 없다. 아무리 남한정부가 엄청난 군사비를 지출하여 미국의 첨단무기를 사와서 안보를 유지하려해도 항구적 평화는 오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대답은 명약관화하다. 즉 우리는 안보대신 평화를 택해야 한다. 한 민족으로 구성된 남과 북이 대화와 협력, 그리고 화해와 통일을 통해서만 한반도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평화가 실현될 수 있다. 따라서 남북한의 정치적 지도자들은 지난 60여 년 동안 견지해온 적대적 대립상태를 종식시키고 정치력을 발휘하여 남북이 화해하고 통일하여 평화를 이루는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남북한 민족들의 염원이고 또 모두가 번영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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