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여호수아 24:14-15, 갈라디아서 5:1, 13-15, 누가복음 4:18-19 -
설교문
교회로 오는 길에 영춘화가 핀 것을 보았습니다. 봄을 맞이하는 꽃이 피니, 정말 봄이 오고 있는가 싶었습니다. 이럴 때마다 떠오르는 시가 있습니다. 신경림 시인의 「싹」입니다. "꼼짝도 하지 않던 나무에 새싹이 트고 꽃이 피면 / 봄의 신비가 열린다 // 겨울을 치열하게 산 것들 / 그 어둠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 아주 작은 빛이라도 고대했던 것들 / 그들이 얼른 마중 나간 덕분에 / 봄이 오고 있다 // 아픔을 딛고 겨울을 살아낸 것들이 / 푸른 세상을 짓고 있다 / 저 여린 새싹들이 / 혹한의 겨울을 밀어내고 / 따뜻한 세상을 열고 있다."
봄이 오니 꽃이 피는 것일까요, 꽃이 피니 봄이 오는 것일까요? 상식적으로는 전자일 것입니다. 봄이 오니 꽃이 피는 것이지, 꽃이 피어서 봄이 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후자라고 말합니다. "겨울을 치열하게 산 것들 / 그 어둠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 아주 작은 빛이라도 고대했던 것들 / 그들이 얼른 마중 나간 덕분에 / 봄이 오고 있다"고 말합니다. 저 여린 새싹들에게 무슨 힘이 있기에, 시인은 그 새싹들이 "혹한의 겨울을 밀어내고 / 따뜻한 세상을 열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일까요?
107년 전 3.1운동은 바로 그런 새싹과도 같았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혹한의 겨울을 밀어내어 따뜻한 세상을 연 신비로운 새싹이었습니다. 1919년 3월 1일 정오, 33인의 민족대표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며 조선 전역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3.1운동은 1,542회의 시위로 확산되었고, 약 200만 명이 넘는 백성이 참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7,500여 명이 목숨을 잃고, 1만 6천 명가량이 부상을 당했으며, 4만 7천 명에 이르는 이들이 투옥되었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일본이 힘이 있어 우리의 주권을 빼앗고 이름도 빼앗고 나라도 빼앗았으나, 우리의 정신은 빼앗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또 "그들은 힘이 있어 우리를 오랫동안 지배할 줄 알았는데 어느 날 해방이 도적같이 왔다, 그래서 해방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오늘 이 땅의 교회가 기독교 절기가 아닌, 민족의 독립운동을 예배와 신앙의 기억 속에 포함하는 것은, 해방과 독립을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구원 사건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와 역사의 주님이십니다.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무고한 자들의 고난을 외면하지 않으시며, 그 고난의 의미를 땅에 헛되이 흩어지게 두지 않으십니다. 절망의 한복판에서도 생명과 소망을 주십니다. 한국교회는 3.1운동을,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출애굽(Exodus)'으로 이해했습니다. 폭정과 학대 속에서 해방과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 사건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성서의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자기 민족을 사랑했던 사람들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40일 동안 십계명을 받고 있을 때, 산 아래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절하며 큰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이 백성에게 신물이 났다. 이제 내가 이 백성을 멸하리라"(출애굽기 32:10)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 담대히 맞서며 간구합니다. "어찌하여 이 백성을 여기까지 끌고 나와서 죽이려 하십니까... 이 백성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여기서 죽이신다면, 나도 이 백성과 함께 죽겠습니다."(출애굽기 32:11-13 요지) 모세의 이 결기 어린 기도 앞에서 하나님은 마음을 돌이키셨습니다.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쓰던 바울은 자신의 마음속에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음을 고백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육신으로 내 동족인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이면,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로마서 9:3) 겨레를 위하는 일이라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저주도 감수하겠다니, 이보다 더 강한 선언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서의 위대한 인물들은 자기 민족의 고난 앞에서 외면하지 않고, 깊이 고뇌하며 하나님께 매달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개인의 경건과 구원을 넘어, 민족과 역사에 대한 책임을 포함합니다.
이러한 신앙은 한국 기독교의 찬송가 전통에도 깊이 스며 있습니다. 오늘 예배에서 함께 부른 찬송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 그러합니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의 국화인 무궁화를 가꾸며 애국지사로도 잘 알려진 기독교 민족지도자 남궁억 선생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라고 노래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열심히 살자"는 근면의 권고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일하러 가세"라는 말은 "독립운동하러 가자"라는 은유적 언어였습니다. 극심한 검열과 탄압 속에서 신앙의 언어는,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정치적 암호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3.1운동의 중요한 주역은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약 1,600만 명이었고 그 가운데 기독교인은 약 20만 명, 전체 인구의 1% 남짓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이 소수의 그리스도인이 3.1운동에서 차지한 비중은 압도적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만세운동은 교회가 중심이 되어 일어났습니다. 시위의 첫 집결 장소는 교회이거나 기독교 학교인 경우가 많았고, 주도한 이들은 목사, 장로, 주일학교 교사, 그리고 학생들이었습니다. 3.1 독립선언문에 조선민족대표로 참여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 대표였는데(길선주 장대현교회 목사 / 이필주 정동교회 목사 / 김병조 의주 관리교회 목사 / 김창준 서울중앙교회 전도사 / 양전백 평북 선천북교회 목사 / 유여대 의주 동교회 목사 / 이갑성 세브란스병원 약사 / 이명룡 정주 덕흥교회 장로 / 이승훈 오산교회 장로 / 박희도 창의밖교회 전도사, 중앙YMCA간사 / 박동완 기독신보 주필, 정동교회 전도사 / 신흥식 평양 남산현교회 목사 / 신석구 서울 수표교교회 목사 / 정춘수 원산 상리교회 목사 / 최성모 해주 남본정교회 목사), 이 선언문은 교회와 학교에서 등사되어 장터와 거리 곳곳에 뿌려졌습니다. 교회는 독립운동의 혈관이자 신경과도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그 결과, 저 멀리 함경북도에서 저 아래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만세운동이 일찍 일어난 지역과 늦게 일어난 지역의 시차가 한 달도 채 나지 않을 만큼, 전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는 매우 가혹했습니다. 일제는 3.1운동을 '조선소요사건'이라 부르며 교회를 향해 대대적인 보복을 감행했습니다. 제암리교회 학살 사건은 교회가 일제 식민지 폭력의 직접적인 표적이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 반쯤 되었을 때, 일본군은 제암리 교인들을 예배당 안으로 모두 모이게 하고 문을 잠근 뒤 불을 질렀습니다. 불길 속에서 뛰쳐나오는 이들에게는 정조준 사격을 가했습니다. 인근 여러 마을의 교회에서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교인들이 살해되고 예배당이 불탔습니다.
일본 헌병대는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잡아들이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일제가 남긴 '망동사건처분표'를 보면, 3·1운동의 주동자로 검거·송치된 이들 중 기독교인의 비율이 매우 높습니다. 3.1운동으로 수감된 약 9,000명 가운데 기독교인이 22.4%로 종교 집단 중 가장 많았고, 투옥된 여성 471명 중 308명이 기독교인으로 약 65.4%를 차지했습니다. 3.1운동에서 투옥된 여성의 3분의 2는 기독교인이었던 것입니다. 이 중에서도 이화학당은 유관순을 비롯한 기독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많이 배출한 핵심적인 현장이었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이화학당 학생 다수와 함께 기숙사 밖으로 나와 만세새위에 참여했고, 이후 고향 천안의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뒤 18세의 나이에 순국했습니다. 이화학당의 교사들도 학생들을 말리기보다 '옳은 일'이라 고백하며 함께 거리로 나섰습니다. 교사 김독실은 재판정에서 학생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고 증언하며 학생들을 감쌌고, 교사 박인덕과 신준려는 기숙사 방을 비밀 회합 장소로 내어주며 여성 독립운동 단체의 결성을 주도하다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이화학당은 교사와 학생, 졸업생이 함께 신앙과 양심에 따라 행동한 여성 독립운동의 거점이었습니다. 이렇듯 한국의 초기기독교는 단순한 종교 집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불의한 식민 권력에 맞서 싸운 정치적·신앙적 주체였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3.1 독립선언문(기미독립선언문)은 정치적 문서이자 동시에 종교적 선언입니다. 선언문은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인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하노라"라고 선포하면서, 독립이 "하늘의 명명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전 인류의 공존공영을 위한 정당한 발로"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하늘'은 단순한 초월적 존재를 뜻하는 말을 넘어, 동아시아 종교적 상상력 속에서 도덕적 질서를 의미하는 개념이며, 기독교적 언어로는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나라의 독립은 민족주의적 이기심의 발로가 아니라, 전 인류의 생명과 평화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분명한 신앙 고백입니다.
특히 3.1 독립선언문은 폭력의 악순환을 거부하는 평화의 윤리를 분명히 천명합니다.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발표하되,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서 타자를 배척하지 말 것"을 요청합니다. 식민 지배라는 노골적인 폭력 속에서도, 폭력적 복수의 정치를 선택하지 않고 공존과 평화의 정치를 선택하겠다는 선언입니다. 이는 당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던 식민지 해방 운동의 주류가 무장투쟁을 택하던 상황을 생각해 볼 때, 매우 선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3.1운동의 신학적 가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초기 한국 기독교는 식민지 현실을 성서의 출애굽 이야기의 다시-쓰기(re-writing)로 이해했습니다. 출애굽기는 하늘 높이 계신 하나님께서, 땅 위에서 억압받고 고통받는 이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역사 속으로 친히 내려오시는 하나님임을 선명하게 증언합니다.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데려가려 하노라.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애굽기 3:7-10 요지) 보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당하는 고통을 "보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들의 근심을 "알고", 친히 "내려오셔서", 그들을 "건져내어", 넓고 아름다운 땅으로 "인도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철학적 관념이나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억압의 역사 속으로 몸소 내려오시는 분입니다. 해방은 인간의 정치 전략 이전에 하나님의 은총 사건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신 이유가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18) 하셨습니다.
3.1운동은 불의에 맞선 정의의 항거였습니다.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불의를 용납지 않으시고, 불의한 강탈을 미워하시며, 모든 불의한 세력을 꺾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무릇 나 여호와는 정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을 것이라"(이사야 61:8)고 말씀하셨습니다. 3.1운동은 바로 이 정의의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이 역사 속에서 행동으로 드러난 사건이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 신앙은 개인의 경건과 내세의 구원에 머물지 않고, 역사적 책임을 감당하는 공적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교회는 이러한 신앙의 유산을 얼마나 충실히 계승하고 있습니까? 교회는 여전히 구원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회의 구조적 불의에 대한 예언자적 발언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여전히 평화를 설교합니다. 그러나 정치적 양극화와 혐오의 언어를, 오히려 신앙적 확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교회는 여전히 생명을 말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생명이 성장과 성과의 논리 뒤로 밀려납니다. 교회가 더 이상 공적 양심이 아니라 특정 정치 진영의 도덕적 후원자로 전락하는 순간, 한국 기독교가 3.1운동에서 쌓아 올린 신앙의 유산은 배반당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가 3.1운동을 기억한다는 것은, 단지 민족주의적 기념일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공적 소명을 다시 확인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국가와 사회를 향해 정의와 평화와 생명의 기준을 제시하는 비판적 공동체여야 합니다. 교회가 침묵할 때 불의는 정당화되고, 교회가 침묵할 때 평화는 하나의 수사로 전락하며, 교회가 침묵할 때 생명은 비용 계산의 항목으로 환원됩니다.
오늘은 특별히 주기철 목사님(1897-1944)이 많이 떠오릅니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는 한국교회가 본받아야 할 신앙의 거목입니다. 그는 일제강점기라는 깊은 어둠 속에서도 신앙의 기준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무너지자, 신앙마저 생존을 위해 타협하고 조정해야 한다고 여겨지던 시대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어쩔 수 없다"는 말로 현실과 타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르게 살았습니다. 주기철 목사에게 신앙은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닐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믿음은, 형편이 좋을 때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가장 불리한 순간에도 붙들어야 할 기준이었습니다.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는 겉으로 보기에는 국가 의례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는 그 본질을 정확히 보았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외적 행위가 아니라, "누구를 주인으로 섬길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인가, 아니면 다른 존재 앞에 고개를 숙일 것인가. 이 둘은 결코 동시에 선택할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이 문제를 타협의 영역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 문제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다수가 침묵하거나 순응하는 길을 택할 때, 그는 홀로라도 진리를 따르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의 선택은 결국 고립과 박해로 이어졌습니다. 다섯 차례에 걸친 투옥과,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혹독한 고문이 뒤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고통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불쌍히 여기며 스스로를 연민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절대화하지 않았고, 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해서 이해했습니다. 그의 신앙은 죽음 자체를 향한 집착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고난 자체를 숭배하지 않았고, 순교를 목표로 삼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십자가 이후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그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확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정의를 완성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그 모든 고통과 손해를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의 부활 신앙은 단지 죽음 이후를 위로하기 위한 교리가 아닙니다. 부활 신앙은 "언젠가 천국에 간다"는 약속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부활은 지금 여기, 내 삶의 방식을 새롭게 규정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믿음은, 오늘 우리의 두려움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지 못하게 합니다. 권력 앞에서, 고통 앞에서, 다수의 선택 앞에서 신앙을 쉽게 타협하지 않는 힘은 바로 이 부활의 확신에서 나옵니다.
주기철 목사의 신앙은 오늘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부활을 말하면서도, 여전히 두려움에 의해 삶의 방향을 선택하고 있지는 않은가?" "십자가를 고백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여전히 편한 길만 고르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의 믿음은 형편이 좋을 때만 지키는 것인가, 아니면 가장 불리한 순간에도 붙들어야 하는 기준인가?" "당신은 지금 무엇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가, 그리고 그 선택을 끝까지 지켜낼 수 있는가?" 한 찬송가의 가사도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건넵니다. "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 건가... / 진리 위해 억압 받고 명예 이익 잃어도... / 십자가를 등에 지고 앞만 향해 갈 건가."(찬송가 586장 중)
모세의 뒤를 이어 해방과 정착의 과제를 감당한 여호수아는 세겜에서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모으고 마지막 설교를 합니다. 이제 나이가 들어 늙었지만, 그는 백성들에게 분명한 선택을 촉구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여호수아 24:14-15)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이 형편이 좋을 때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가장 불리한 순간에도 붙들어야 하는 삶의 기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집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공동 기도문으로 읽은 시편 137편은 제국에 의해 나라를 잃은 한 민족의 집단적 트라우마를 증언합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편 137:1) 시인은 고향 예루살렘을 잃은 상실과 애도의 정서를 숨김없이 드러냅니다. 바벨론의 압제자들이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시편 137:3)고 조롱할 때, 시인은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시편 137:4)라고 탄식합니다. 이는 단순한 향수병이 아니라, 민족 정체성의 붕괴에 대한 신앙적 저항입니다.
이 시편은 또한 피해자의 분노와 복수의 욕망을 가리지 않고 드러냅니다.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시편 137:8-9) 이 끔찍한 표현은, 억압받은 이들의 분노가 얼마나 깊은 심연에 닿아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성서는 피해자의 감정을 미리 검열하여 삭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분노가 어떻게 생명과 정의와 평화의 윤리로 전환되어야 하는지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적 과제로 남겨 둡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바벨론의 여러 강변에 앉아 울던 이들의 기억은 과거의 한 장면으로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 기억은 오늘도 불의와 폭력으로 고통받는 삶의 현장에서, 서로 갈라 싸우는 민족들의 경계선에서, 그리고 혐오와 불평등이 일상화된 자리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오늘 3.1운동 107주년 기념일은, 과거의 승리를 자랑스럽게 회상하는 날로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날은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와 생명을, 다시 이 나라와 교회의 중심 가치로 불러내는 날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또 다른 바벨론의 강변에 앉아, 또 다른 이름의 포로가 되어 시온을 기억하며 울게 될지도 모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서 5:1) 그런데 바울은 곧바로 자유의 오용을 경고합니다. "형제들아(자매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라디아서 5:13) 그리고 다시 경고합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라디아서 5:14-15)
해방과 독립과 자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만일 오늘 우리가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 것입니다. 남과 북이, 남과 남이, 동과 서가 서로 물고 먹으면, 결국 모두가 상처 입고 무너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선물로 주신 이 자유를, 각자의 욕망을 채울 기회로 삼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섬기며 지켜 나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더 큰 복을 받는 민족이 되기를, 3.1절 107주년 기념주일을 맞아 함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