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compassion), 자비(mercy), 불쌍히 여기는 마음
▲렘브란트, The Slaughtered Ox, 1655 |
몸의 여섯 번째 감각은 내장의 감각이다. 예수님의 핵심 心情인 긍휼과 자비는 그 어원에서 볼 때 내장의 감각에서 왔을 것이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다는 말씀(마 9:36)은 그리스어 “스프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ιζομαι)이다. 이 단어는 명사 splanchnon(창자, 내장)의 동사형으로 가여워서 애간장이 끓는, 창자가 끊어질 듯한 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성경에서 예수님의 치유와 사역의 동기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바로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막 1:41, 6:43, 8:2)이었다.
나는 산상수훈의 팔복의 말씀 중 처음 네 개가 모두 내장의 감각에서 나온 말씀이라는 생각이 든다.
심령이 가난한자,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애통하는 자,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자,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긍휼이 여기는 자,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치유란 보이거나 느껴지거나 손으로 만져지는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서 오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이처럼 신학자들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결코 육체를 정신보다, 감각을 마음보다 낮게 평가하는 낡고 영구적인 이원론(플라톤주의, 영지주의, 유심론)에서 떠날 수 없다. 기독교는 영지주의적 이단론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하여, 일찍이 샘 킨(Sam Keen)은 “내장신학”이란 말을 사용하여 육체적인 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했다. 은총의 육체성으로써 육체의 음성과 감각의 언어로 성스러움을 식별하는 방법이다.
은총은 육체적인 것이요, 치유는 육신을 통하여 온다.
“하나님의 행위”의 원초적인 현장은 고대 이스라엘이 아니라 내장에 있다.
성스러움은 육신 위에 근거한다.
칸트와 반대로 의무는 느낌으로부터 나오고 정언명령(the categorical imperative)은 동정에서 나온다.
종교개혁 이후세기란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의 귀로 듣지 않는 세대라는 뜻이다. 성스러움은 우리를 움직이고 건드리는 무엇, 우리를 떨게 하는 무엇, 먼 것보다는 가까운 것, 특별한 것보다는 일상적인 것, 수입된 것보다는 토속적인 것 속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내장신학은 온몸으로 느끼고 밀고나가는 몸의 신앙을 요구한다. 지금 우리는 말, 개념, 교리, 관념, 말, 말, 말, 말의 대양에 빠져 병들어 있다. 말은 신체(몸) 안에서 재발견되어야 한다.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겔 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