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1659-60. |
“자기(어떤 사람)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삶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창 32:25)
렘브란트의 이 그림에 잘 착륙하기 위해 그동안 먼저 동일한 주제로 그린 샤갈, 고갱 그리고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비행했다. 이 글은 독일의 학자 요하네스 태쉬너(Johannes Taschner)의 “야곱은 밤에 누구와 씨름하는가. 렘브란트와 함께 행간을 조명하기 위한 시도”(Mit wem ringt Jakob in der Nacht? Oder: Der Versuch, mit Rembrandt eine Leerstelle auszuleuchten)의 관점을 차용하면서 서술된 것이다. 이 그림은 서양세계에 오랫동안 금기시되어온 종교와 성(性) 사이의 갈등과 적대감을 야곱이 씨름하는 인물이 에로틱한 매력을 유발하는 한 여성이며 동시에 신적 존재인 천사라는 시점(視點)에 착안하여 몸 담론이 이 본문의 본질적인 특징이라는 점을 강조한다고 보고 있다.
야곱이 그의 생의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얍복 강가에서 날이 새도록 씨름한 이 인물은 도대체 누구인가? 江의 神인가, 천사인가, 하나님인가? 히브리 성경은 한 차례 “어떤 사람”이라고 언급하고 나머지는 삼인칭대명사 “그”를 사용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성경의 독자에게 울타리를 쳐 생각의 테두리를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의 날개를 달아준다. 물론 야곱은 “어떤 사람”에 대한 신비를 알기 위해 밤새도록 허벅지 관절이 위골될 정도로 격렬하게 씨름하고 몸에 심한 충격을 받은 후, 동트는 새벽녘에 하나님을 보았다고 주장한다. 허벅지를 질질 끌면서도 걸을 수 있었다 하니 험하게 부러진 것은 아닌가 보다. 암튼 강변에서 아름답고 거룩한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동트는 새벽을 맞이했다 하니 이 얼마나 신비한 종교체험이고 장엄한 광경인가!
성경본문(텍스트)이 야곱에게만 일어났던 과거의 장엄한 광경으로 완료되고 만다면 그건 우리가 바라는 살아있는 성경이 아니라 형해(形骸)화된 고문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성경이 성경인 것은 독자가 삶의 경험을 복음적으로 재정위하고 현실을 새롭게 읽을 수 있는 눈, 해석의 능력을 얻어 현재의 직접적인 경험으로 생생하게 살아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저자의 의도나 텍스트의 본래적 의도를 아는 것은 이차적이다. 말씀이 오늘 여기서 다시 생기(生起)해야 한다. 이것을 우리는 성경에 대한 진정한 ‘미적 경험’(ästhetische Erfahrung)이라 말할 수 있다.
이야기로 된 성서는 많은 부분이 비결정적이다. 특히 구약의 이야기가 그렇다 성서 이야기에는 여백이 많다. 여기에 독자가 들어가 쉬고 상상의 날개를 자유롭게 펼 수 있는 놀이공간, 은혜 받을 수 있는 빈 터가 참 많이도 생긴다. 동일한 본문이라도 삶의 경험과 물음을 가지고 보고 느끼고 읽는 관점에 따라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빛깔로 빛나게 된다. 칼 바르트는 성경을 ‘주석’(exegesis)하고 주석하고 또 주석하라 했지만, 사실 정직하게 그 주석의 과정과 결과를 알고 보면 성경은 ‘주석’과 ‘경험적 해석’(eisgesis)의 상호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나(우리)의 말씀으로 현재화되고 있다.
본 이야기는 야곱과 에서의 재회(再會)에 이상하게 긴 시간을 투자하여 독자로 하여금 긴장감이 극도로 생기도록 만든다. 에서는 야곱에게 속은 것이 분해 늙은 아버지 장례식까지 언급하면서 그 때 동생 야곱을 다시 만나게 되면 죽이겠다고 결심한 바 있다.(창 27:41) 야곱은 에서의 감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兄 에서를 만나기 전에 사자를 보내 에서의 감정을 읽으려 했고(창 32:6), 재산을 선후로 나누어 배치하기도 한다. 그리고 난 후 다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리고(32:10-12), 예물을 보내 형의 환심을 사려하고, 두 아내와 자식을 보내고 자신만 홀로 남는다.
히브리어로 21-22절을 읽으면 어근 ‘pn’(얼굴)이 들어간 단어가 5번 나온다. 그리고 씨름 후에 ‘하나님의 얼굴’(pne-elohim)을 보았다 고백하고, 그 장소를 “브니엘(Pnuel)”(하나님의 얼굴)로 명명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야곱이 씨름한 ‘그 남자’는 바로 형 에서가 아닐까 하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야기는 兄 에서와 하나님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양자 사이에서 왕래한다. 만일 야곱이 현재 에서의 얼굴에서 험상궂은 적(원수)의 얼굴, 추악(醜惡) 그 자체를 떠올린다면, 나중에 바로 이 얼굴에서 은총과 사랑의 이미지인 미선(美善, kagathos=kalos+agathos)의 얼굴,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역사가 일어나니(창 33:10) 그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가!
이야기는 적의 이미지와 하나님의 이미지 ‘사이’에서 파도를 타고, 독자는 야곱의 이야기를 읽는 동안 이 ‘사이’가 야기하는 긴장과 갈등의 그네를 타고, 그리고 마침내 적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큰 화해의 역사를 경험한다. 이전에 야곱에게 내린 하나님의 신탁(창 25:23), 하나님의 약속(창 27:27-29)은 존재론적으로, 정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 많은 인간의 고투와 분투 속에서 실현되어가는 과정 속에 그 약속은 실현되며, 하나님은 변증법적 대화 속에 존재하시는 분이다.
천사[적(敵)]의 가치는 그의 위대함과 존엄 속에서 빛나지 않는다. 그가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그는 야곱의 몸에 상처를 낸다. 그렇지만 야곱은 몸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적) 위에 있다. 마침내 그자가 자신을 놓아줄 것을 요구한다.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다시 야곱은 그에게 청한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러한 위기상황 속에서 그는 야곱을 축복한다. 야곱은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고, 그는 야곱에게 새로운 이름을 선물하며 야곱은 새로운 정체성(자기)을 얻는다. 야곱은 자신이 본 투쟁의 장소를 “브니엘”, 곧 “하나님의 얼굴”이라 명명한다. 개명하는 사건, 새로운 의미부여와 의미 탄생이 자기 안에서 그리고 자기 밖에서 동시에 안팎으로 일어난다. 새로운 세계는 새롭게 펄럭이는 기호들의 놀이체계!
야곱이 만난, “어떤 사람”의 행위는 야곱의 몸을 상하게 하고, 축복하며, 새로운 이름을 선사한다. 이 행동들은 분명 서로 모순된 행동들로서 야곱과 에서의 관계가 지닌 이중적 정체성을 드러낸다. 이 일련의 과정은 원수로서의 兄 에서와 화해된 兄 에서, 그리고 하나님을 연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