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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흐른다. 그 어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이치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이 인간 의식의 진보를 담보해 주지는 않아 보인다. 최근 올리버 스톤의 1991년작 를 감독판으로 다시 본 느낌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렇다.
지금의 시각으로 볼 때, 음모론은 헐리웃의 단골메뉴다. 이런 음모론을 대중화시킨 작품이 바로 였다. 영화는 뉴올리언즈 지방검사인 짐 개리슨의 입을 빌어 케네디 암살 배후에 보이지 않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으며, 미국 정부가 이를 은폐했다고 주장한다. 오리지널보다 17분 가량 추가된 감독판에서는 이런 메시지가 보다 선명하게 강조됐다. 영화를 처음 봤을때나 지금 다시 볼때나 감독의 주장은 충격적이다.
한 걸음 더 들어가보자. 짐 개리슨 검사는 먼저 군산복합체가 존 F. 케네디의 암살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개리슨 검사에게 중요한 제보를 한 군 정보장교 X는 이 가설에 무게를 실어준다. 그는 이어 케네디 암살 사건이 미국 역사상 가장 추악한 범죄행위라고 열변을 토한다.
개리슨 검사 역을 맡은 케빈 코스트너의 연기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전율을 일으키게 할만치 강렬하다. 그는 남부식 억양 특유의 느슨한 액센트로 케네디 암살사건이 가진 역사적, 정치적 의미를 관객들에게 호소한다. 특히 감정에 복받쳐 울먹이며 변론을 펼치는 대목은 지금 보아도 여전히 감동적이다. 그가 <워터월드>, <포스트맨> 같은 영화로 자신의 이름값에 스스로 먹칠만 하지 않았어도 지금쯤은 로버트 레드포드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뒤를 잇는 명배우 출신 명감독으로 자리매김했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묘하게도 개리슨 검사의 법정 변론은 부림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변호인>에서 사자후를 토해내던 인권 변호사 송우석과 오버랩된다. 케네디 암살 사건의 수사를 재개한 끈은 뉴올리언스의 유력자 클레이 쇼(토미 리 존스)였다. 개리슨 검사는 그가 CIA요원으로 피그스만 침공 작전을 획책했고 이어 케네디 암살 사건에도 개입했다는 정황을 포착하고 수사에 착수한다. 이때부터 개리슨 검사는 전방위적인 압박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클레이 쇼의 주변인물들은 차례로 죽임을 당하고, 중요한 증인들은 한사코 증언을 거부한다.
미국 정부의 압박은 더욱 거세다. 개리슨 검사는 정부에 클레이 쇼 관련 기록과 함께 케네디 암살범인 리 하비 오스왈드 관련 기록을 요청했지만 정부는 이를 번번이 거절한다. 케네디 암살 사건 조사를 담당한 얼 웨렌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한다. 언론도 개리슨 검사 때리기에 나선다. 그럼에도 개리슨 검사는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사비를 털어 수사비용을 충당하는가 하면, 혼신의 열정으로 케네디 암살 의혹을 뒷받침할 증거 수집에 매달린다.
올리버 스톤, 워렌리포트에 근본적 의혹 제기
이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인 대목은 댈러스의 의류업자 아브라함 자프루더가 8mm 카메라로 찍은 케네디 암살 장면 영상이다. 이 영상은 자르푸더의 요청으로 오랫 동안 일반에 공개되지 않다가 를 통해 대중에게 공개된 것이다. 이 영상엔 어딘가에서 발사된 총탄이 케네디의 머리를 명중시키는 장면이 생생히 담겨져 있다.
이 영상은 ‘워렌리포트’, 즉 케네디 사후 전직 연방 대법원장 얼 워렌을 위원장으로 꾸린 사고조사위원회가 낸 조사보고서의 결론을 반박하기에 충분했다. 워렌리포트는 리 하비 오스왈드가 발사한 총탄이 대통령의 뒷머리를 맞혀 우측 정수리를 깨뜨렸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이 영상은 케네디의 머리를 맞힌 총탄이 앞쪽에서 날아왔음을 생생히 증거하고 있었다.
개리슨 검사는 모든 증거를 기초로 정부가 거짓말을 한다고 강변했다. 그는 배심원을 향해, 그리고 전세계의 깨어 있는 양심을 향해 결연히 외친다.
"정부가 진실을 죽였다면, 국민이 정부를 믿을 수 없다면 그건 이미 내 조국이 아닙니다."
그의 외침은 <변호인>의 송우석이 오만한 국가권력 앞에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입니다"고 외쳤던 그 외침과 동일하다.
정부의 은폐와 비밀공작, 기술과 결합하며 진화
▲영화 <변호인>에서 피고인을 변호하고 있는 주인공 송우석(송강호 분). ⓒ영화 <변호인> 스틸컷 |
이 영화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무엇보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케네디 암살의혹을 전면 재조명하는 기폭제로 작용했다. 영화 개봉 후 케네디가 암살된 장소인 텍사스주 댈러스시는 1992년 1월 시경찰국이 관리해 온 2,500건의 수사 자료를 공개했다. 제럴드 포드 前 대통령은 관련 자료의 기밀해제를 요구하고 나서기까지 했다.
지난 해 말 <변호인>은 1,0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영화가 그린 공안정국이 30여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데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올리버 스톤 감독이 를 통해 강력히 비판했던 미국 정부의 은폐와 비밀공작, 그리고 군산복합체의 횡포 역시 진행형이다. 보다 경악스러운 일은 미국 정부의 비밀스런 행태가 첨단 기술과 결합하면서 가공할 형태로 진화했다는 사실이다.
올리버 스톤이 이 영화를 통해 던지고자 했던 메시지는 정보의 투명한 공개, 그리고 민주주의의 회복이었다. 영화는 케네디 암살을 둘러싼 모든 증거를 빠른 호흡으로 보여준다. 아차 하고 한 순간을 놓치면 영화의 흐름 전체를 놓칠 수 있을만큼 빠르게 흐른다. 이런 장면전개는 감독 자신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한 장치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정확히 반대방향으로 진화했다. 미국 정부, 그리고 전쟁 비즈니스의 주체인 군산복합체는 베트남 전쟁의 패착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더욱 엄격히 정보를 통제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2003년 이라크 침공이다.
당시 부시 행정부는 전쟁을 미화하고 애국심을 고취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전쟁 초까지 이런 전략은 먹혀드는 듯 했다. 그러나 차츰 이라크 전쟁은 제2의 베트남이 되어 갔다. 이러자 부시 행정부는 미군 병사의 시신이 본국에 후송되는 장면이 노출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언론을 통제했다. 한편 언론은 부시 행정부의 애국심 마케팅을 측면지원했다. 이라크 전쟁과 관련한 정보 공개는 '국가기밀'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접근이 차단됐다. 베트남전과 달리 이라크전은 반전 여론이 비등하지 않았다. 이런 데에는 미국 정부의 언론통제가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개리슨 검사는 배심원들을 향해 또 하나의 강력한 경고메시지를 던진다.
"국가기밀이 더러운 냄새를 풍길 때 파시즘이 찾아 온다"
개리슨 검사를 통해 던진 올리버 스톤의 경고는 가 만들어진 1991년이나, 22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이나 여전히 유효하다.
다시 처음의 감상으로 되돌아가보자. 시간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의식의 진보 혹은 민주적 가치의 증진으로 직결되지 않는다. 그보다 인간의 의식적인 노력이 개입될 때 비로소 진보는 성취될 것이다.
“인간이 시간의 흐름을 자연적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보지 않고 인간이 의식적으로 관련되고 또한 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특수한 사건이라는 연속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역사가 시작된다.”
- E.H. 카, <역사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