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호프>의 한 장면.
낯선 존재를 마주했을 때 인간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는 감정의 본질은 무엇일까? 태어나 단 한 번도 백인을 본 적 없던 뉴기니 고지대인의 감정은 영화 <호프> 속 인물들이 외계인을 처음 마주했을 때 느낀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홍진 감독의 문제작 <호프>를 둘러싸고 다양한 평론이 쏟아지고 있다. 한국 SF·액션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찬사가 있는가 하면, 지나치게 불친절한 서사라는 비판도 적지 않다. 그 가운데 <호프>를 묵시록의 관점에서 읽어내려는 기독교적 해석까지 등장했다. 적어도 <호프>는 종교와 문화, 예술을 넘나드는 논쟁을 촉발하는 데에는 성공한 듯하다.
그 논쟁의 실체가 궁금해 필자도 영화 <호프>를 보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필자의 시선은 외계인을 마주한 인물들의 감정 변화에 머물렀다. 특히 성기(조인성 분) 일행이 숲속에서 외계 생명체와 맞닥뜨려 그들에게 포위된 채 대치하는 장면은 영화 전체를 압축하는 명장면이었다.
▲영화 <호프>의 한 장면.
팽팽하게 대치한 외계인과 인간 사이. 숨 막히는 적막을 깨뜨린 단 한 발의 총성은 비극의 서막을 열었다. 외계인의 입장에서는 자기들의 본거지인 우주선에 무단 침입한 침입자들을 경계하고 그들의 동태를 예의주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조치였을 법하다.
물론 인간의 입장에서도 지구에 불시착한 이들 외계인이 불청객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이 멀쩡한 짐승들을 해치고 인명 피해를 발생시켰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오해와 불신이 방아쇠를 당기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낯선 존재를 마주한 성기는 외계인이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그는 대치하고 있던 동료들에게 연신 "쏘지 말라"고 당부하며 외계인의 동태를 살피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조심성은 우주선을 순찰하는 과정에서도 돋보였다. 그는 외계인의 물건에 함부로 손대지 말라고 거듭 경고한다.
▲영화 <호프>의 한 장면.
낯선 존재에 속한 것과의 접촉을 금기시하는 성기의 조심스러운 태도는 외계인을 처음 마주했을 때도 곧잘 드러난다. 성기는 망설였다. 특히 인간처럼 외계인이 언어를 구사할 때 그는 곧바로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오히려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 내던져진 동료들에게 연거푸 불편한 대치를 명령했다.
성기는 무엇을 기다렸던 것일까? 성기는 '다름'이라는 혼란 속에서 외계인을 자신의 세계 안에서 이해 가능한 존재로 번역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갈피를 잡지 못하는 다름 속에서 공통성, 즉 같음을 찾아내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것은 익숙한 것들로 두려움을 몰아내는 성기의 방식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때문에 외계인과의 전투가 한창인 가운데 동료들 시신 앞에서도 꾸역꾸역 성기는 밥을 먹을 수 있었고 또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것은 익숙한 것들로 낯선 세계를 견뎌내려는 성기의 방식이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것은 성기가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택한 의식과도 같은 행동이었는지 모른다.
▲영화 <호프>의 한 장면.
하지만 성기의 기다림은 오래가지 못했고 두려움이 촉발한 동료의 총성 한 발로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남은 것은 서로를 적으로 규정한 두 집단 사이에서 폭력만이 증식하는 악순환이었다.
백인을 처음 본 뉴기니 고지대인은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단다. 하지만 그 손에 자기에게 익숙한 무기가 들려 있었다면 어땠을까? 영화 <호프>에서처럼 얼떨결에 뜻밖의 비극이 발생하지는 않았을까? 오늘 현대사회에서도 우리는 종종 우리 스스로가 이방인이 되며 또 이방인을 만난다.
성서에서 이방인은 경계와 환대의 대상이다. 이스라엘도 한때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약자의 심정을 누구도보다 공감할 수 있었을 터, 야훼는 그 경험을 기억하며 약자를 돌보라고 하신다. 환대의 대상인 이방인의 범주는 민족의 장벽마저 허물어서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인, 로마 백부장, 가나안 여인 등 당시 유대 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여겨진 사람들에게 은총을 베풀었다.
▲영화 <호프>의 한 장면.
영화 <호프>는 이러한 이방인의 범주를 단순히 민족 간 문제를 넘어 행성 간 이슈로, 즉 우주적 서사로 풀어내면서 새로운 이방인 범주로 편입된 외계인을 인간이 과연 환대할 수 있는지를 놓고 진지하게 묻고 있다. 성서는 이방인을 무조건 배척하지도, 그렇다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도 않았다. 사랑과 분별, 환대와 경계를 함께 요구했다. 성서는 이방인을 적대시하거나 어쭙지 않은 동정의 대상 또는 이용 가치와 투자를 목적으로 박제하는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낯선 존재에게 너무 서둘러 이름을 붙이는 순간, 우리는 상대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두려움을 정당화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정당화된 두려움은 폭력을 낳는다. 어쩌면 <호프>가 끝내 묻고 싶었던 것은 '외계인은 누구인가'가 아니라, '우리는 왜 타자를 이해하기도 전에 적으로 규정하는가'였는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