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7일 신촌 일대에서는 소위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표방하는 난장판이 벌어졌다. 세간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퀴어문화축제(Korea Queer Festival)가 그것이다. 그 축제가 무엇을 지향하는지 알지 못한 채 소수의 인권 보호에 동참하려는 선한(?) 의지를 지닌 고상한 목자들도 그 축제의 대열 한 켠에 끼어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동성애를 허용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차별금지법의 내용으로까지 포함될 정도로 논의에 진전이 있었던 것은 동성애자들에 대한 한편의 연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촌의 축제 아니, 난장판은 그동안 동성애에 대한 논의가 소수자의 인권으로 각색되었음이 만천하에 공개된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로마서에 그토록 분명하게 지적된 동성애에 대한 위험성을 현실에서 목도한 이후 동성애자와 동성애 행위자의 구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천적인, 물리적인 한계상황에 직면한 이들에 대해 왜 성경에서 그토록 구체적으로 적시하며 죄악시하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행사에 참석해서 그들의 ‘퀴어’한 성향을 발산한 사람들은 한편의 긍휼을 담보하는 동성애자가 아니라 동성애 행위자였던 것이다. ‘동성애자’가 ‘동성애 행위자’까지 포괄하는 개념이기는 하지만 명백히 범주 구분을 해야 하는 이유는 그러한 성향을 표현하게 되는 근인이 다르기 때문이다. 전자가 실존적 고통을 감내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후자는 고통의 시뮬레이션에 집중하고 있다. 즉 후자는 동성애의 행위를 흉내 내고 있는 것이다. 고통을 실감하는 사람들이 백주대낮에 길거리를 반라로 활보하며 마치 그 고통이 동성끼리의 성행위에 대한 문화적 억압 때문이라는 양 소위 ‘정상적인’ 문화에 대해 ‘퀴어’한 공격을 감행해댈 리가 없지 않은가?
동성애의 경향이 실존적 고통인 이유는 그러한 자식을 낳은 부모가 자신의 종교적 신념조차 바꾸고야마는 결정을 감행하고 당사자는 생물학적이든 사회학적이든 정체감의 혼란으로 인해 전 존재가 옭매여 있는 느낌으로 평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고통 때문에 소위 ‘정상’으로부터 일탈을 하기도 하며 그 일탈로 인해 또 다른 고통의 순환 고리에 매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에 그 고통은 더욱 실존적이게 된다. 이러한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이 자신의 고통을 노골적으로 노출하며 해방구를 연출하듯 방종스럽게 행동할 리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신촌 거리에 나타난 그들은 실존적 고통을 흉내내는 자들이다. 그들은 고통을 모욕했다. 실제로 그들은 세월호 참사 때문에 전 국민이 애도하는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적 탐닉의 해방구를 연출했다.
그들은 인간의 성욕조차도 혐오스럽게 만들었다. 동성애의 고통을 성행위의 관점에서만 이해하고 있는 듯 성적 환타지만을 해방과 자유의 등가물로 취급하는 행동을 보였다. 그들은 반라로 거리를 활보하며 위생기구를 배포하고 선정적인 몸짓과 용어를 발산하며 엉덩이를 드러내 보이는 등 거의 공연음란죄에 해당할 만한 퍼포먼스를 자행했다. 만일 그 퍼포먼스가 고통에 겨워 자학적이거나 자폭적인 결단으로 행동화한 것이라면 동정심을 유발할 수는 있었겠으나 그들의 외형적인 행위는 성적 환타지에 끌려가는 모양새였다. 그래서 그들을 동성애 행위자라고 부르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의 축제는 동성애의 비밀을 간직한 진정성이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동성애 행위를 즐기는 양성애자들의 난동으로 비춰졌다.
그들의 축제에 진정성이 결여되었다고 보는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서구의 동성애자 축제를 흉내내고 있는 모양새가 역력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동성애 축제가 영어 사용 지역의 선진 문물인양 영어로 된 구호를 현시했다. 그리고 그들이 두 손으로 들고 흔들어댄 “Father, forgive Homophobes for they do not know what they are doing”(아버지, 동성애혐오자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이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합니다)이라는 구호자체도 예수의 말씀을 희화화한 것이다. ‘항문성교,’ ‘에이즈,’ ‘혐오,’ ‘HIV’ 등의 도장을 몸에 찍어주는 퍼포먼스 역시 그들에 대한 사회의 낙인 행위를 희화화한 것이다. 그들의 축제에는 그들이 진정으로 해방을 추구해야 할만한 논거가 상실되어 있다. 축제가 무슨 논거로 진행되는 것이냐라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스스로 성적 소수자의 자리에 서서 그들의 고통을 대변하는 양 훤화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몸짓에는 그들이 절감한 고통이 배여있어야 했다.
이러한 동성애 행위자들의 행위에 대해서는 마르크스나 포스트모더니스트들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사회적 소수의 고통을 모욕했고 다양성에 대한 욕망조차 혐오감을 유발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요즘처럼 성이 개방된 분위기에서 이러한 일들을 공개적으로 자행함으로써 미숙한 청소년들의 성의식을 왜곡시킬 만한 우려를 사게 되었다. 물론 동성애 행위자들의 행위를 비판한다고 해서 이성애자들의 난잡한 행위가 은폐되는 것은 아니다. 이성애 행위자들의 난잡함도 혐오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 어느 경우이든 행동화되어서는 안 되지만 적어도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남의 고통을 가면처럼 뒤집어쓰는 시뮬레이션은 아예 시도하지 말아야 한다. 남의 고통을 모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촌에서 난장판을 축제로 오인한 그들이 대구에서도 그런 축제를 벌일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