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이란과 정치적으로 껄끄러운 사이다. 이렇게 된 직접적 계기는 1979년 이슬람 근본주의 혁명과 뒤이은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 인질 사건이었다. 사실 미 대사관 인질극은 미국의 잘못된 정책이 빚어낸 결과였다. 미국은 영국과 함께 석유산업 국유화를 꾀하던 모사데크 총리를 축출하고 팔레비를 국왕에 앉혔다. 팔레비 옹립은 이란의 석유 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공작이었다.
팔레비는 집권 이후 미-영 석유자본을 등에 업고 이란 민중들을 도탄에 빠뜨렸다. 아야툴라 호메이니를 축으로 한 이슬람 혁명은 팔레비와 그를 후원한 미국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미국은 혁명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악수를 뒀다. 권좌에서 축출된 팔레비의 망명을 허용한 것이다. 미국으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만약 팔레비의 망명을 거절하면 이란 혁명으로 불안에 빠진 다른 제3세계 독재자들에게 미국이 지원을 끊을 수도 있다는 신호를 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팔레비 망명 허용은 이란 민중 사이에 팽배했던 반미-반서방 감정에 기름을 부었다. 급진 이슬람 청년들이 주축이 돼 팔레비 송환을 요구하며 연일 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급기야 이 시위대는 대사관에 난입해 미국인 직원들을 볼모로 잡았다. 이러자 미국에서는 인질들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노란 리본이 곳곳에 걸리기 시작했다. 인질 사태는 1년이 넘도록 이어졌고 노란 리본은 그때까지 풀리지 않았다.
사실 이란 인질 사태는 당시 카터 행정부에게는 악재였다. 침례교도인 지미 카터는 도덕주의 외교를 내세우며 백악관에 입성했다. 그러나 그의 외교 노선은 이란 이슬람 근본주의 혁명, 그리고 뒤이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시련을 겪었다. 이런 분위기에 비추어 볼 때, 카터 행정부 입장에서는 인질들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노란 리본은 정치적 행위로 볼 수도 있었다. 더구나 카터가 이란 인질사태에 발목이 잡혀 연임에 실패했고, 신보수주의를 내건 레이건이 집권했기에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노란 리본을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미국인들은 인질극이 해결되는 그날까지 노란 리본을 풀지 않은 채 인질들의 무사귀환을 염원했다. 언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미국 언론은 소련의 아프간 침공이라는 초대형 악재가 불거졌음에도 이란 인질 사태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세월호 참사 발생 5개월째로 접어들면서 앞다퉈 “세월호 피로감”을 확산시키는 우리 언론과는 무척 대조적이다.
권력자 심기만 챙기는 장로
세월호 참사가 장기화될 조짐이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은 사태 발생 직후부터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시민사회와 기독교계도 유가족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정치권은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입법에 냉담하기 그지없다. 여기에 대통령이 직접 나서 매몰찬 어조로 특별법은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이런 가운데 교육부가 학교에서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을 금지시켰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하고, 가치 판단이 미성숙한 학생들에게 편향된 시각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는 게 이유다. 교육부의 논리는 궁색하기 짝이 없다. 노란 리본은 이런 참사가 다시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일깨워주는 더 없이 소중한 교육 재료다. 또한 세월호라는 미증유의 참사는 정치적 해석을 초월하는 공동체의 문제다.
단언컨데 정치적인 쪽은 교육부다. 교육부의 노란 리본 금지 조치가 취해진 시점은 대통령이 특별법 거부 입장을 밝힌 직후였다. 교육부의 행보는 정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다. 더구나 교육부 장관은 입각 전 정부 여당에서 친박계 좌장격인 정치인이었다. 결국 교육부 수장이 노골적으로 대통령 심기를 고려한 조치를 취한 셈이다.
기자가 이렇게 교육부 장관에게 날을 세우는 이유는 그가 기독교인(충무 성결교회 장로)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정신은 약한 자, 상처 입은 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다. 그러나 교육부의 조치는 이런 정신과 거리가 멀다.
그는 입각 전부터 교회 강연을 통해 출세주의를 부추기는 한편 종교편향적 발언으로 구설수에 오른 전력을 지니고 있다. 사실 그가 교육부 장관에 임명된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그는 인사청문회 통과를 위해 대통령이 꺼내든 깜짝 카드에 지나지 않았다. 야당의 책임도 비켜갈 수 없다. 동료(?) 의원의 입각을 자신의 문제로 여겨 대통령의 깜짝 카드에 맞장구를 쳤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을 떠나면서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는 가르침을 남겼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권력자의 심기만 챙기는 기독교인 교육부 장관이 반드시 곱씹어야 할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