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대중문화 리뷰] 아날로그적 감성이여, 영원하라

벤 스틸러 주연·연출,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한 장면 ⓒ스틸컷

인터넷, 디지털 카메라, 스마트폰 — 인류의 삶에 혁명을 가져다 준 것들이다. 그러나 혁명적인 변화로 인해 직격탄을 맞은 곳도 많다. 가장 대표적인 영역이 신문, 잡지다. 인터넷, 스마트폰의 거센 파고에 밀려 잇달아 폐간되는가 하면 온라인 기반으로 아예 체질을 바꾼 매체도 많다.   

<박물관이 살아 있다>, <마다가스카르>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배우 벤 스틸러가 연출한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원제: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는 이런 시대 변화에서도 따스한 인간적 감성은 잃어선 안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주는 영화다.   
주인공 월터 미티는 『라이프』지에서 16년간 네거티브 필름을 관리하는 일을 해왔다. 잡지에 실린 모든 사진은 거의 그의 손을 거쳐 갔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영화엔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사실 굉장하다.   
『라이프』는 포토저널리즘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잡지다. 종군기자의 대명사 로버트 카파가 찍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현장, 그리고 영국 출신 사진가 래리 버로우즈가 담은 베트남전의 실상 등 보도사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걸작들 대부분은 이 잡지를 통해 발표됐다. 더욱 재미있는 점은 이 잡지의 사진들이 영화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카파의 사진을 보면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오프닝을 구상했고 래리 버로우즈의 베트남전 사진은 올리버 스톤의 <플래툰>에 영감을 줬다. 월터는 이렇게 세계 최고 수준의 사진을 다루며 어떤 사진을 어떤 방식으로 지면에 반영할지 결정하는 일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서 깊은 잡지도 시대변화의 파고 앞에 휘청거렸다.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예고되고 그를 비롯한 모든 직원들은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한다. 실제로도 『라이프』지는 2007년 공식 폐간을 선언했고, 지금은 웹사이트로 명맥만 이어오고 있다. 더구나 그에겐 설상가상의 위기가 닥친다. 마지막 호 표지를 장식할 사진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그는 고민 끝에 사진을 찾기 위해 사진가 숀 오코넬(숀 팬)을 찾아 나선다.   
다소 지루하게 흐르던 영화는 이때부터 활기를 띤다. 사무실을 박차고 나가기 전 월터는 소심하기 그지없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온갖 전표를 받아들며 부지런히 계산기를 두드리는가 하면, 직장 동료 셰릴 멜호프(크리스틴 위그)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어떻게 마음을 드러낼지 몰라 전전긍긍한다. 그저 상상만으로 그녀에게 다가갈 뿐이다.   
숀을 찾아 나선 여정은 모험 그 자체다. 그린란드에서 취객과 시비가 붙는가 하면, 차디찬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상어밥 신세가 될 뻔 했다. 아이슬랜드에서는 화산폭발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으나 현지 호텔 주인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그는 갖가지 모험을 거치면서 소심함을 벗어버리고 진정한 자신을 발견한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한 장면 ⓒ스틸컷

이 영화의 강점은 유명 사진잡지 『내셔널 지오그래픽』지를 연상케 하는 회화적인 화면이다. 모든 장면이 잘 찍은 사진 한 컷 한 컷을 이어붙인 듯한 느낌을 자아낼 정도다. 뉴욕을 떠나 첫 목적지인 그린란드로 향하는 장면 전개는 영화의 백미다. 이때 흐르는 『라이프』지의 슬로건은 감동을 배가시킨다. 
“세상을 보고,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이다.”   
화면 중간 중간 『라이프』지가 그동안 발표해 온 보도사진의 명작들을 연도순으로 감상하는 묘미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연출자인 벤 스틸러는 단순히 ‘좋은 그림’만으로 승부를 걸지 않는다. 그는 주인공 월터가 모험을 거듭하면서 소심함을 벗어던지는 과정을 세심한 필치로 그려낸다. 또 월터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묘사하는 대목, 특히 구조조정 책임자 핸드릭스(애덤 스콧)와 고무인형을 두고 다투는 장면은 가히 압권이다.   
연출자 벤 스틸러, 사진 예술 이해 과시   
무엇보다 그가 이 영화를 통해 보여준 사진에 대한 이해는 칭찬을 아끼지 않고 싶다. 그는 진정 ‘사진’이란 예술 장르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숀과 월터는 동업자 관계다. 숀이 사진을 찍어 네거티브 필름을 보내면, 월터는 이걸 들여다보고 지면에 반영할 사진을 골라내는 일을 한다. 이렇게 보낸 세월이 무려 16년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두 사람은 직접 마주친 적은 없다.   
월터는 온갖 모험에도 그가 보낸 네거티브를 찾지 못해 해고 위기에 처한다. 이러자 월터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그들은 너를 해고하지 못할꺼야. 숀이 그러더구나. 너만큼 자신의 의도를 잘 반영해준 사람은 없었다고.”   
사진은 사진가가 찍지만 화룡점정은 편집자의 몫이다. 지면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편집자의 예리한 눈매가 사진가의 의도를 살려낸다는 말이다. 사진가 가운데에 편집자를 잘 만나 성공한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다. 전설적인 잡지 디자이너인 『하퍼스 바자』의 알렉세이 브로드비치는 사진가들에겐 마이더스의 손이나 다름없었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한 장면 ⓒ스틸컷

특히 처음 사진에 입문하는 아마추어 사진가들이라면 숀의 작가정신을 깊이 음미해 주기 바란다. 숀은 히말라야에 틀어박혀 나올 줄 모른다. 그가 담으려 했던 주제(피사체란 말은 사실 굉장히 잘못된 말이다)는 눈표범이었다. 이 주제에 너무 몰두했는지 은인과도 다름없는 월터마저 못 알아본다.   
그가 월터와 담소를 나누는 순간, 그가 그토록 쫓아왔던 표범이 눈앞을 지나간다. 그런데 그는 그저 물끄러미 응시할 뿐 셔터를 누르지 않는다. 월터가 언제 찍을꺼냐고 묻자 이렇게 답한다.   
“안 찍어. 카메라로 방해하고 싶지 않아. 좋은 순간을 보면 때론 그 순간에 머물러 싶어지거든.”   
숀의 대사는 자신이 천착하는 주제에 대해 사진가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준다. 지금 이 나라에서는 저명 사진작가란 사람이 사진 한 컷 찍기 위해 수령 220년 된 금강송을 베어내는가 하면, 생태 사진가를 자처하면서 새끼 새를 포획해 어미 새를 유인한 다음 이 장면을 찍고 이 사진으로 버젓이 전시회까지 여는 일이 횡행한다.   
사실 이런 무리들은 작가가 아니라 잡배들이다. 카메라를 다루는 기술만 배웠을 뿐 자신의 주제의식과 주제를 다루는 태도를 제대로 배우지 못해 벌어지는 일이다. 이런 무리들은 숀이 눈표범을 찍지 않은 의도를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영화는 월터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문제의 사진을 마지막 장면에 가서야 딱 한 번 보여준다. 이 사진은 디지털의 거센 파고로 인해 뒤안길로 밀린 아날로그적 감성에 바치는 무한한 찬사다. 연출자 벤 스틸러의 감성이 돋보이는 장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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