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대중문화 리뷰] 진실이 국익이다

임순례 연출 <제보자>

▲영화 <제보자>의 한 장면. ⓒ스틸컷

임순례 감독의 영화는 디테일이 풍부하다. 임 감독은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는 4인조 밴드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고단한 삶을 연민어린 시선으로 응시한다. 한편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선 평소엔 ‘한데볼’로 홀대 당하다가 올림픽 같은 대규모 국제대회에서만 반짝 관심을 끄는 여자 핸드볼 선수들의 애환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낸다. 임 감독은 신작 <제보자>에서도 특유의 필치로 지난 2005년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황우석 사태의 이면을 그린다. 

공중파 시사 교양 프로그램 의 윤민철 PD(박해일)는 어느 날 제보자의 전화를 받고 접촉한다. 제보자는 이장환 박사(이경영) 연구팀의 심민호 팀장(유연석). 심 팀장은 이 박사가 연구 중인 줄기세포의 진실을 윤 PD에게 제보한다. 심 팀장의 제보는 충격적이었다. 이 교수가 자랑하는 줄기세포가 실은 아예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윤 PD는 황당하다는 듯 끊었던 담배를 피워 물며 마음을 달랜다. 
여기서 잠시 시계를 2005년으로 되돌려 보려 한다. 당시 상황을 되짚어 보아야 영화의 전체적인 줄거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서다. 
서울대 수의학과 황우석 교수는 권력 그 자체였다. 황 교수가 자신의 이름을 알린 시점은 1999년. 그는 당시 체세포 복제방식으로 젖소 ‘영롱이’를 탄생시켰다고 발표했다. 영롱이의 탄생은 여러모로 의미가 남달랐다. 체세포 복제는 영국 복제양 ‘돌리’ 이후 다섯 번째, 그리고 젖소로는 세계 최초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후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영롱이에 힘입어 BK21사업, 농림부, 삼성그룹 등 각계로부터 많은 연구비를 받아냈다. 여세를 몰아 2004년 세계 최초로 인간배아 줄기세포를 만들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철옹성 같았던 신화는 일순간 무너졌다. 닥터 K로 알려진 제보자의 제보가 결정적인 단서였다. 
MBC 시사 보도 프로그램 의 한학수 PD는 닥터 K로부터 제보를 받고 5개월에 걸쳐 취재를 진행했다. 결국 황 교수 논문은 조작임이 드러났고, 과학자 지위와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스타 과학자’라는 허상이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한 PD의 취재는 순탄치 않았다. 권력이나 다름없었던 황 교수의 치부를 파헤치려면 외압쯤은 각오해야 했다. 그런데 진정한 난관은 위로부터의 압력이 아니었다. 오히려 일반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 취재진을 맹공격했다. 한 PD는 당시의 분위기를 이렇게 회고한다. 
“진실을 보도하려는 언론을 정권이 탄압해, 그에 반발하는 여론이 들끓은 적은 있었다. 그러나 2005년 한국 사회에서는 황우석 교수를 지지하는 네티즌들이 진실을 보도한다는 이유로 MBC와 수첩>을 압박했다. 네티즌들의 논리는 ‘진실보다 국익’이었는데, 이처럼 진실을 보도한다는 이유로 국민들이 나서서 개별 프로그램을 압박한 것은 언론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 한학수 PD는 <제보자>의 주인공 윤민철의 실제 모델이다. 
이 영화 <제보자>는 윤 PD와 심 팀장이 진실에 다가가면서 겪는 어려움을 숨 가쁜 호흡으로 재구성한다. 
이장환 박사 쪽은 윤 PD의 취재에 부담을 느끼면서도 협조를 약속한다. 그러나 이 박사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윤 PD를 곤경에 빠뜨린다. 이때 그가 사용한 도구는 ‘언론’이었다. 언론 취재를 막기 위해 또 다른 언론을 동원한 것이다. 
이 박사의 언론 플레이는 먹혀들었다. 어린 학생들까지 방송사로 쳐들어와 취재를 중단하라는 침묵시위를 벌인다. 윤 PD는 이 광경을 보면서 선배인 이성호 팀장(박원상)에게 이렇게 내뱉는다. 
“나.... 이제 저런 모습 보면 두려워.”
▲영화 <제보자>의 한 장면. ⓒ스틸컷 

이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대목은 이 박사가 윤 PD를 찾아와 이면 거래를 제안하는 장면이다. 이 박사는 3개월 동안 줄기세포 배양 과정을 윤 PD에게 독점 공개하겠다고 제안한다. 귀가 솔깃한 제안이었지만 윤 PD는 단호히 거절한다. 이때 카메라는 이 박사와 윤 PD를 번갈아 비추며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이 장면은 황우석 팀과 PD수첩 취재진 사이에 물밑에서 치열한 기 싸움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더욱 극적이다. 실제 황 교수는 3개월 동안 줄기세포 시연 과정 전체를 팀에 공개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제작진은 이를 거절했다. 한 PD는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만약에 황 교수가 줄기세포 몇 개라도 만들어 놓았더라면 우리는 정말 고뇌가 깊었을 것이다. 그러나 줄기세포가 단 한 개도 만들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이러한 타협을 받아들이는 것은 죄악이었다. 그 순간 나는 ‘저널리스트’가 아니라 거래를 하는 ‘장사꾼’으로 전락하는 것이었다.”
<제보자>, 참담한 언론 현실에 경종 울려 
이 영화 <제보자>의 강점은 사실에 대한 치밀한 고증이다. 임 감독은 특유의 섬세함으로 막후에서 벌어진 긴박한 순간을 은막에 옮겨 놓는데 성공한다. 
배우들의 연기는 연출자의 섬세함을 더욱 빛나게 해준다. 박해일은 진실을 무기로 거악에 맞서는 윤민철 역을 맡아 거친 매력을 뽐낸다. 유연석은 겉으로는 유약해 보이면서도 강한 심성을 가진 제보자 심민철의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한편 이경영은 이장환 박사의 이중성을 소름끼치도록 잘 드러낸다. <부러진 화살>, <남영동 1985>로 친숙한 박원상의 연기도 칭찬할 만하다. 그는 이 영화에서 힘들어하는 후배를 다독이며 외압을 막아주는 이성호 역을 맡아 녹록치 않은 연기력을 다시금 뽐낸다.(이성호의 실제 모델은 뉴스타파 최승호 앵커다) 이 밖에 권해효, 장광 등 탄탄한 연기력을 지닌 조연 배우들이 주연 배우들을 받쳐 준다. 
영화는 이장환 박사가 파멸하고, 윤 PD는 또 다시 불편한 진실을 추적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결말은 거짓과의 싸움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임을 보여준다. 
영화와 달리 현실은 가혹하기 그지없다. 제보자인 닥터 K는 신경외과 레지던트였는데, 제보 이후 재직 중이던 병원에서 해고됐다. 이후 1년간 직장을 잡지 못하다가 다른 기초의학 분야에서 연구를 계속하게 됐다. 그럼에도 여전히 황우석 지지자들 때문에 자신을 숨겨야 하는 처지다. 
▲영화 <제보자>의 한 장면. ⓒ스틸컷 

언론은 더하다. 은 정권의 탄압으로 사실상 무력화됐다.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성을 경고했다가 정권으로부터 반격을 당한 것이다. 의 쇠락은 2008년 보수 정권 집권 이후 정권이 자행한 언론 장악 시도의 결정판이었다.  
이후 언론은 줄곧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해오다가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사실상 종언을 고했다. 탑승객 전원 구조라는 오보가 버젓이 공중파 TV뉴스에 보도되는가 하면 참사가 장기화되면서 유가족을 폄훼하는데 앞장섰다. 이런 탓에 기자가 ‘기레기’(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로까지 폄하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정녕 진실은 이대로 짓밟히고 마는가? 이런 현실 때문인지 “진실이 국익이다”는 극중 대사는 계속해서 귓전을 멤 돈다. 
덧붙이는 글 
<제보자>는 마이클 만 감독이 연출하고 알파치노, 러셀 크로가 출연한 1999년작 <인사이더>와 짝으로 보면 좋다. 두 작품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했으며 탐사전문 PD가 모델이다. 
<제보자>는 의 한학수 PD를, <인사이더>는 미국 CBS의 간판 탐사보도 프로그램 <60 Minutes>의 로웰 버그만 PD를 모델로 했다. 그리고 두 작품 모두 내부자가 스타 과학자(<제보자>)와 거대 담배회사(<인사이더>)에 제보하고, 이를 취재하는 두 언론인은 각각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의 압력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배우 박해일과 알 파치노는 남다른 연기력으로 타이틀 롤 윤민철 PD와 로웰 버그만 PD역을 연기해 낸다. 무엇보다 헐리웃에 필적할만한 우리 영화가 나왔다는 사실이 무척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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