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르고>의 한 장면. ⓒ스틸컷 |
미국은 이란, 이라크, 북한을 눈엣가시처럼 여긴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이 세 나라를 ‘악의 축(The Axis of Evil)’이라고 지칭하며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 가운데 이라크는 미국의 직접적인 무력 공격을 당했다. 이제 북한과 이란만 남았다. 특히 미국은 이란을 적대시해 ‘빌어먹을(fucking)’이란 수식어를 즐겨 붙인다.
그러나 미국과 이란 사이에 처음부터 적대관계가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이란은 페르시아 제국의 후예이고, 예나 지금이나 중동의 맹주다. 또한 1979년 이슬람 근본주의 혁명 이전까지 미국 중동정책의 교두보였다. 현대 국제정치에서 석유는 중요한 변수다. 그런데 이란은 석유 매장량이 풍부하다. 게다가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채굴이 가능할 정도로 깊지 않은 곳에 매장되어 있다. 미국이 이란을 놓쳐서는 안 될 이유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1951년 모사데크는 반외세 민족주의를 내세워 총리에 오른다. 그는 총리에 오르자 석유산업을 국유화시켰다. 이러자 미국은 영국과 함께 쿠데타를 사주해 모사데크 총리를 축출하고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를 국왕 자리에 앉혔다. 팔레비 옹립은 사실상 미-영 석유자본의 위임통치나 다름없었다. 팔레비 국왕은 미국을 등에 업고 온갖 전횡을 휘둘렀고 이와 정비례해 이란 국민들의 삶은 피폐해져만 갔다.
1979년 이란 이슬람 근본주의 혁명은 미국과 이란의 관계를 라이벌 관계로 돌아서게 했다. 미국 입장에서 아야툴라 호메이니의 집권은 여러모로 뼈아픈 일이었다. 샤 왕조가 이슬람 혁명세력에 의해 무너지자 국왕은 미국 망명길에 오른다. 미국으로선 그의 망명을 승인할 수밖엔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음으로 양으로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는 제3세계 독재자들이 미국에 등 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팔레비의 압제에 시달렸던 이란 민중들은 분노했다. 이들은 미국 대사관 앞에서 매일 같이 집회를 열고 팔레비를 내놓으라고 외쳤다. 민중들의 분노는 결국 인질극으로 번졌다. 시위대는 미 대사관 직원들을 인질로 붙잡고 팔레비의 송환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으로선 엎친 데 덮친 악재의 연속이었다.
▲영화 <아르고>의 한 장면. ⓒ스틸컷 |
배우 출신 감독인 벤 에플렉이 연출한 <아르고>는 급박했던 이슬람 혁명 현장으로 관객들을 데리고 간다. 첫 장면부터 심상치 않다. 시위대에 포위된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의 분위기는 급박하기 그지없다. 연일 시위를 벌이던 시위대는 급기야 대사관으로 몰려든다. 이 와중에 6명의 직원은 대사관을 빠져 나가 켄 테일러 캐나다 대사가 머물던 관저로 피신한다. 이러자 미국 정부는 토니 멘데즈 CIA요원을 호출해 구출작전을 맡긴다.
사실에 바탕을 둔 영화는 고증이 사실성을 좌우하기 마련이다. 연출자인 벤 에플렉은 사진 자료를 바탕으로 1979년 혁명 당시 상황과 등장인물들의 면면, 그리고 당시 미국의 사회상을 꼼꼼하게 재현해 사실성을 높인다.
토니 맨데즈(벤 애플렉) CIA 요원은 구출작전 전문가다. 이란에서도 여러 번 작전을 수행한 바 있어 현지 사정에도 정통하다. 현지 상황은 급박하기만 하다.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에는 52명의 인질이 억류돼 있었다. 다행히 6명은 시위대가 장악하기 전 대사관을 빠져 나갔다. 이란 혁명군은 대사관이 파기한 서류를 복기해 신원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신원확인 작업이 마무리되면 6명의 존재를 알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이들의 목숨은 장담하기 어려웠다.
구출 작전 마련에 고심하던 멘데즈 요원은 한 가지 아이디어를 제안한다. 영화 촬영을 명분으로 이란에 잠입해 6명을 탈출시키겠다는 것이다. 얼핏 아이디어는 기발하다. 그러나 공항은 반미-반서방 성향의 혁명군이 장악한 상태다. 만약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모두가 목숨을 잃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멘데즈 요원은 작전을 강행한다.
유쾌함과 진지함을 동시에
영화의 이야기 전개는 유쾌하다. 주제부터 영화적이다. 그러나 이란 미 대사관 인질사건은 미국의 치부이자 세계 현대사의 분수령이 된 중요한 사건이다. 이를 의식한 듯 영화는 시종일관 진지함을 잃지 않는다.
▲영화 <아르고>의 한 장면. ⓒ스틸컷 |
이 영화의 매력은 무엇보다 이란 혁명군과 토니 멘데즈 요원 사이의 치열한 두뇌싸움이다. 혁명정부는 멘데즈 일행에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이에 맞서 멘데즈 요원과 6명의 직원들은 기지를 발휘해 위기상황을 재치 있게 모면한다. 특히 공항에서 멘데즈 일행이 혁명군을 유쾌하게 속이는 대목은 폴 뉴먼,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걸작 <스팅>을 방불케 한다. 당시 대통령이던 지미 카터가 직접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는 엔딩 크레딧은 더욱 진한 여운을 남긴다.
잠시 역사로 눈을 돌려보자. 지미 카터는 역대 최악의 대통령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독실한 침례교도였던 그는 도덕주의 외교를 표방했다. 그러나 그의 재임 기간에 이란 미 대사관 인질 사건과 소련의 아프간 침공 사태가 벌어졌다. 두 사건은 도덕주의 외교의 실패로 받아들여졌고, 결국 그의 발목을 잡았다.
공화당의 레이건은 공공연히 힘의 외교를 표방하며 나섰고, 실제 그가 집권하자마자 신냉전시대가 전개되었다. 카터로서는 아쉽기 그지없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벤 애플렉은 소문난 민주당 지지자다. 그래서인지 영화 곳곳에서 카터에 대한 연민을 드러낸다.)
토니 멘데즈 요원의 활약상은 그나마 미국의 자존심을 회복시켜줬다. 영화 촬영은 전적으로 그의 아이디어였다. 캐나다 정부는 그와 일행에게 비밀리에 여권을 발급했다. 그는 이 여권에 그가 직접 위조한 이란 당국의 출입국 도장을 찍었다. 그는 이때 이란 정부 당국이 이슬람 혁명 이후 일반적으로 쓰는 그레고리 역법이 아닌, 이란 혁명력을 쓴다는 사실까지 파악해 정교하게 위조했다. 이렇게 위조된 출입국 도장은 공항의 이란 출입국 관리를 감쪽같이 속였다. CIA는 세계 도처에서 벌인 갖가지 음모와 비밀공작으로 지탄을 받아 왔다. 그러나 멘데즈 요원의 사례는 CIA가 온갖 지탄에도 아랑곳없이 자국민 보호에 목숨을 바친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정치에 얽힌 영화는 자칫 딱딱한 문체로 흐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영화 <아르고>는 무게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감칠맛 나게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유쾌한 분위기 속에 20세기 현대사의 분수령이 된 사건을 곱씹어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정치영화다. 적극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