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식 한신대 명예교수(본지 회장) ⓒ베리타스 DB |
신학의 정절이란 말은 곧 신학자의 정절(貞節)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를 바로 찾아 물어서 교회가 그 진리를 세상에 올바로 증거하며, 신자들의 신학적 소양을 키워주어 그들이 세상을 변혁시키는 선교의 사명을 다하여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통치)가 실현되어 가도록 하는 사명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이 성경의 진리를 왜곡해서 가르치거나 교회의 선교에 지장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신학이 학문이기도 하여 학문하는 방법이 다를 수 있지만 신학이나 신학자는 성경 본문을 수시로 변하는 상황에 맞게 추상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신학자들은 모름지기 바울이나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이 복음을 해석하고 가르치고 전하게 된 이유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교의 최초의 신학자라고도 불리는데 만인을 위해 속죄의 제물이 된 예수의 사랑(고후 5:14)이 자기를 강권해서 그의 복음의 진리를 풀이하여 전하도록 부르셨기 때문에, 그의 사랑의 부르심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생활을 시작하였기에,그 사랑의 정절을 지키기 위하여 온갖 고난을 다 당했고 남은 고난은 자기도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의 고난을 받은 것이라고 빌립보서에서 토로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젊었을 때 오랫동안 방황하다가 종당에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죽기까지 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동하였는데 이것이 일시적 느낌이 아니고 확실한 의식이 되었다고 말하였다. (conf. 10:8) 그리고 그가 말하기를 자기는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는데 “당신이 나에게 정절(continence)을 명하시니, 당신이 명령하시는 것을 나에게 주시고 그리고 당신이 뜻하시는 것을 나에게 명령하소서”(conf. 10:37)라고 그의 참회록에서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평생 신학자로서 또 목회자로서 성경의 진리를 연구하고 가르치고 글쓰고 그리고 교회를 떠나지 않고 지켰다.
그리스도교 역사에는 바울을 이은 초대 교부들이 많았고 또 아우구스티누스를 이은 신학자들이 수없이 많다. 초대 교부들은 당시의 희랍-로마의 문화적 상황에서 적절하게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전하고 변증했다. 그 중에 일부는 그 문화상황에 적응하려든 신학이 너무 지나쳐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저스틴 마터와 같은 사람도 헬라 철학의 로고스 사상을 가지고 기독론을 전개하여 헬라 문화사상과 그리스도교의 진리의 공통점을 찾으려고 하였는데 이러한 신학 방법은 현대의 철학적 신학자 폴 틸리히의 소위 “상관관계” 방법과 유사한 것이었다. 그러나 틸리히는 “지나친 상황화 신학은 잘못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성경의 진리에 위배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 짧은 칼럼에서 지나간 세대에 있었던 변증 또는 상황 신학을 다 말할 수 없고 제19세기와 20세기의 신학사상 몇 가지를 추려서 말할 수밖에 없다. 다른 부문 보다 가장 치열했던 신학논쟁은 성서신학 부문이었는데 특히 구약 5경의 문서설이었다. 창세기만 가지고 말해보면 창세기 책이 단일 저자(모세)가 쓴 것이 아니고 여러 문서들의 편집이라는 문서 비평학이 있어서 보수파와 신신학파 사이의 논쟁이 심했다. 이 논쟁이 성경의 권위를 훼손시켰다거나 문서 비평학이 성서책을 해체시켜 버렸다거나 하는 말이 있었다. 이러한 논쟁이 일반사회에 영향을 주어 성서 불신 사상을 가중시켰다.
이제 그 논쟁이 끝난 것 같지는 않으나 필자의 여기에 대한 비판을 말해 보자면, 보수파는 모세가 5경을 다 썼기 때문에 5경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만일 그렇지 않으면 5경을 믿지 않겠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 태도도 문제이다. 반면에 문서비평가들은 그 책들이 편집된 것이고 모세가 다 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약 5경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아니라고 믿었을까? 하는 질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양쪽 모두가 다 잘못되었다고 생각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양편이 서로를 이해하고 신학이 일종의 학문이므로 단순히 5경 문서를 다룬 방법의 차이뿐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 문제는 신약학에서 복음서들의 편집문제로 양파간 대립한 것과 같은 성질의 것인데 예수의 생애가 복음서들의 편집의 방법의 차이에 따라 부정되거나 긍정된다는 말인지? 그렇지 않다면 예수의 생애와 사역문제로 성경을 해치는 인상을 줄 정도의 논쟁은 금물이다. 어느 편이든 간에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의 구원이 진리를 발견하고 바로 풀어서 전하여 교회와 신도사회의 일치를 증진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신학자의 정절이다.
제20세기에 접어들어서 세계대전의 비참과 함께 인간과 세상에 대한 심각한 회의사상이 풍미해졌었다. 현대 실존주의 철학은 데카르트의 실존적 자아인식(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은 인간의 생각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기독교 실존주의자인 키에르케고르도 자기 실존을 고독한 존재로 인식하였으나 그들이 생각을 가지고 자기는 보잘 것 없는 한 피조물이란 것을 성서를 통하여 발견하여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은 데카르트와는 대조적이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아발견과 유사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독백』에서 나는 잘못 생각해서 과오를 범하는 존재라고 말을 했다. 인간 실존에 대한 자아인식이 무신론적이고 인간 본위적인 것과는 달리 유신론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자아의 과오와 고독을 체험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적인 실존주의 철학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폴 틸리히의 철학적 신학사상은 현대의 무신론적인 실존주의 철학과 문화 사상과 대화하면서 하나님의 계시의 성경 말씀의 진리를 변증 또는 대변한 것이다. 그도 한 철학적 상황 신학자이다. 그는 키에르케고르의 “고독한 인간” 실존이란 말 대신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에게 떠난 인간들을 “비유”(none being)란 말로 고쳤다. 그리하여 이 비유로서의 인간들의 생활은 무의미, 자기 파멸 좌충우돌, 그리고 절망이라고 했다. 틸리히는 어디까지나 성경의 진리를 견지하여 그 진리를 전하려는 신학적 정절을 지키고 있고 또 현대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대한 비판도 하면서 교회 안의 성례전 의식과 그 의미가 사라져 간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현대인과 현대사회가 절망이라는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유물론자 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와 계급주의를 타파하면 이상적인 세계가 있다고 가정하여 그것을 무산계급만이 존재하는 프롤레타리아 공산사회라고 말했다. 사회적으로 호소력이 컸고 철학자들도 동조하였다. 그 중에도 독일의 불로호(Bloch)는 마르크스가 말한 이상세계로 가는 과정에서는 반동 세력들이 제거되는 비참은 불가피하다고 말하면서 『희망의 원리』라는 책을 썼는데 그의 역사의 희망은 무산 계급 공산사회였다.
『희망의 신학』을 저술하여 유명하게 된 몰트만은 불로호의 『희망의 원리』란 책을 잃고 신학적인 사로를 하여 『희망의 신학』을 논한 것이다. 일종의 정치신학적인 상황신학이다. 몰트만은 성경의 말씀대로 구약도 “약속”의 역사이고 신약도 예수의 재림과 더불어 새 하늘과 새 땅이(하나님 나라?) 전개될 것이라는 소망을 주장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 약속을 믿고 현실 역사에서 고통과 아픔을 참고 이겨내는 소망을 가져야 하는데 절망은 죽음이라는 말을 한다. 그런데 구원사학파의 신학자들은 현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 경륜이 개입하면서 종말로 가는 과정이라고 말함으로써 이 역사는 단순한 약속의 역사만이 아니고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 섭리가 진행되고 있다고 말한다.
WCC의 선교신학은 “하나님의 선교”란 대전제에서 “오늘의 구원”이라는 선교과업을 내세웠다. 이것은 상황 선교를 말하는 것인데 마르크스주의 현대 사회사상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학, 특히 상황신학에 많이 반영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남미의 “해방신학”이다. 남미의 빈민계급을 구원하기 위한 신학이론인데 그것을 상술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미국의 빈민계급과 인권의 탄압을 받는 상황에 대응하여 “흑인신학”이 등장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면 흑인해방자로 오실 것이라는 취지이다. 재림 예수와 흑인을 동일시 하는 신학이다.
한국의 “민중신학”도 상황 정치신학이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하는 신학자들 중심으로 부르짖은 것인데 여기서는 우리 사회의 미래의 희망 또는 구원자는 민중이라는 말을 하여 “민중이 예수다”라는 말까지 나왔다. 이 말이 얼마나 성경의 진리와 부합하는지 각자가 생각할 문제이지만 틸리히의 경고처럼 “지나친 상황화”는 위험하다. 보수주의 또는 복음주의자들이 반대는 WCC의 “에큐메니스트”들의 상황 윤리와 신학이 위험하다는 것인데 WCC의 선교의 모든 운동이 다 그러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예수님이 “정치범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고 한 민중 신학자가 한 말도 성경적인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예수님이 정치범의 누명을 쓰고 돌아가셨다는 것이 성경적 해석이다. 그는 유대인 사회에서 간혹 일어났던 반로마적 정치적 메시야 운동가는 아니었다.
성경의 계시의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을 바로 하여 신학과 신학자의 정절을 지켜서 정치학이나 사회학의 텍스트북으로 성경을 이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구약 잠언에는 성경 말슴에 아무것도 더하지 말라고 경고했다.(30:5,6) 오늘 이 시대를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신자유주의 시대니 또 그 밖의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하는데 이러한 상황에 신학을 적응시켜보려고 성경과 어긋나게 말을 하거나 교회 밖에서 하는 말을 너무 귀담아 들으면 신학적인 과오 또는 부정(不貞)을 저지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