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고] 순례자들의 발걸음

대한성공회 동두천 나눔의 집 김현호 요아킴 신부

[편집자 주] 대한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은 가을비가 내리던 지난 9월29일 팽목항에서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며 걷는 생명평화 도보순례>를 떠났다. 이번 순례는 동두천 나눔의집 원장인 김현호 신부의 제안으로 이뤄졌다. 김 신부는 출발하기 전 팽목항에서 성찬례를 봉헌하면서 “우리 안에 내재한 분열의식이 살아나 세월호 참사라는 아픔이 이념의 도구로 전락했다”며 아쉬움을 내비쳤다. 그러나 이런 아쉬움은 사제들로 하여금 머나먼 순례를 떠나게 한 원동력이 됐다. 20일 간의 순례를 마친 김 신부는 순례 여정이 성찰의 발걸음이라고 회고했다. 김 신부는 그간의 심경이 담긴 글을 본지에 보내왔다. 

“미안합니다,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변하겠습니다”  
▲순례를 떠나기 전 팽목항에서 봉헌된 성찬례에서 설교하는 김현호 신부. 김 신부는 설교 중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304명의 희생자와 10명(지금은 9명)의 실종자 이름을 일일이 연호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사진= 팽목항 지유석 기자

지난 9월29일부터 10월18일까지 진도 팽목항에서부터 서울 광화문까지 걸었습니다. 천삼백리의 거리를 20일 동안 걸었습니다. 자동차로 6시간이면 이동하는 거리를 스무일 동안 두 다리를 믿고 바보스럽게 그리고 우직하게 걸었습니다. 지난 4월16일 진도 앞바다에서 발생한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며 걷는 생명평화도보순례라는 깃발을 앞에 치켜세우고 걸었습니다. 20일 동안 등에 매고 다닌 가방에는 ‘미안합니다’라는 몸자보를 붙였고 가슴 앞쪽에는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등에는 ‘변하겠습니다’라는 몸자보를 붙이고 걸었습니다. 비오는 흐린 날 팽목항을 떠날 때는 언제쯤 서울에 닿을까 걱정을 했는데, 한 발 한 발 옮기다보니 어느새 서울에 다다랐습니다.  
순례자들의 첫 발걸음은 ‘미안합니다’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를 지켜보며 온 국민이 큰 충격과 슬픔을 경험하였습니다.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채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어린 학생들을 속수무책 지켜봐야 했던 안타까운 마음들이 하나같이 미안한 마음으로 이어졌습니다. 기성세대의 물신주의와 반생명적 삶의 태도가 수많은 어린 생명을 구하지 못한 채 죽음에 이르게 한 현실을 목도하며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들은 시간이 흐르자 점차 변색되기 시작했습니다. 미안했던 마음은 흐릿해지고 그 자리에 의심과 외면, 그리고 분열의 태도들이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순례자들의 발걸음에 담은 미안함은 어린 생명들의 죽음을 충분히 애도하지 못하고 그 의미를 새기지 못한 채 의심과 외면, 그리고 분열의 마음으로 변질되는 우리의 태도에 대한 참회의 표현이었습니다.   
순례자들의 발걸음은 또한 기억하는 마음을 담고자 하였습니다. “망각은 노예의 길이요, 기억은 구원의 신비”라는 말처럼,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고 기억함으로 진실을 보고자 하는 마음을 한 발 한 발 심으며 걸었습니다. 순례자들은 120년 전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믿음으로 일어섰던 동학농민군들의 발자국 위로 한 발 한 발 오늘의 발걸음을 포개며 걸었고, 이념의 대립으로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했던 증오와 원한의 현장에서 용서와 화해를 구하며 걸었습니다. 독재의 어둠 속에서 민주주의의 빛을 밝혔던 민중들의 애환을 가슴에 새기며 걸었고, 무고한 생명들의 죽음을 묵묵히 그리고 넉넉하게 품고 이어오는 대지의 깊음을 느끼며 걸었습니다. 순례자들의 발걸음 위에 실린 세월호 304명의 아픔은 그 이전 이 땅의 애환들과 만났고, 죽은 자와 산자가 함께 순례자들의 발걸음 안에서 교통하는 놀라운 경험을 맛보았습니다. 지난 역사에서 진실을 마주하지 못한 채 금방 잊고 외면했던 태도와 그로 인해 화석처럼 굳어진 두려운 마음은 점차 사라지고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강한 심장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끝으로 순례자들의 발걸음은 외부를 향한 외침이 아니요, 우리의 내면을 성찰하는 발걸음이었습니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꾸만 구분하고 분열하는 오늘의 현실 앞에서 신앙인으로서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되돌아보는 기도의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용서와 화해의 마음이 우리 안에서 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물질의 유혹 앞에 우리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들이었는지 깨닫습니다. 물질적인 탐욕으로 얼마나 무고한 생명들에게 아픔을 주었던가! 맘몬과 하나님(생명)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갈림길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한걸음 한걸음이 결코 가볍지가 않았습니다. 서울에 가까워질수록 순례자들의 발걸음은 무거워졌습니다. 서울 광화문을 향하는 순례자들의 발걸음은 마치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발걸음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무수한 시간이 흘렀으나 진리를 향하는 발걸음의 간격은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의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자의식을 죽이지 않고는 희망이 자랄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스스로 죽으러 가는 길이기에 서울로 향하는 발걸음은 결코 가볍지가 않았습니다.  
10월 18일 순례자들의 발걸음은 서울 광화문을 향했습니다. 광화문 그곳은 다양한 소음들로 뒤엉킨 혼돈의 장이었습니다. 그 혼돈은 마치 거센 태풍처럼 순례자들의 발걸음을 삼켜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순례자들의 발걸음은 멈출 수 없었고 이윽고 진리를 갈망하는 마음들의 한 복판, 태풍의 눈에 섰습니다. 혼돈 가운데 고요한 울림은 생겨났습니다. 일천삼백리 길, 순례자들의 발걸음에 새겨진 진실의 울림은 메아리가 되어 퍼져나갔습니다. 순례자들의 보잘 것 없는 그 울림! 그것은 진실에 목말라하는 이들에게 한 줄기 단비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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