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드온의 스파이』 겉 표지. |
모사드는 히브리어로 ‘기구(institute)’라는 뜻이다. 이들의 행동반경은 미국, 유럽, 아랍은 물론 한반도에까지 미친다. 바로 북한의 존재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북한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가까운 동맹국 미국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해서? 아니면 유대 민족이 한민족과 약소민족의 아픔을 공유하고 있어서? 천만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이 북한을 감시하는 이유는 철저하게 ‘국익’ 때문이다.
북한은 80년대부터 탄도미사일 기술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관련 언론보도에 따르면 북한은 이미 1987년 이란에 개량형 스커드 미사일 100여기를 제공했다고 한다. 북한제 미사일은 이란을 거쳐 시리아에도 흘러들어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란, 시리아는 이스라엘의 적성국이다. 이스라엘 입장에선 북한제 미사일이 언제 자국으로 날아올지 모를 일이었다.
이스라엘은 한 번은 북한과 물밑 외교접촉을 시도하기도 했다. 지난 1993년 이스라엘 외무차관 에이탄 벤처가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해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북-이스라엘 국교 정상화 및 광산개발과 농업기술 지원을 위해 이스라엘이 수억 달러를 제공하겠다는 제안이었다. 에이탄 차관은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북한에 대해 이란 등에 미사일 수출을 중단해줄 것을 요구했다. 미국이 이 같은 사실을 알아채면서 이스라엘의 물밑 접촉은 무산됐다. 그러나 이 같은 사건은 이스라엘이 북한의 미사일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냈다. 모사드가 북한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서울은 북한 정보를 얻기 위해 전 세계로부터 스파이들이 몰려드는 ‘스파이 천국’과도 같은 곳이다. 이들은 탈북자들 중에서 가치가 있는 첩보, 특히 북한의 비밀 무기 프로그램에서 일했던 탈북자를 찾고 있었다” - 본문 중에서
세계 최강의 정보력을 자랑하는 모사드가 서울에 요원을 상주시키면서 북한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척 의외다. 바로 이 점이 이 책의 강점이다. ‘사실’ 자체가 얼마나 재밌고 충격적인지를 잘 보여준다.
빈 라덴-파키스탄 커넥션
흥미진진한 사실 한 가지 더 적고자 한다. 9.11테러 주범인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국 중앙정보부(CIA)를 비롯한 각국 정보기관의 집중적인 추적을 받아 왔다. 그러나 빈 라덴은 수년간 이들의 공작을 비웃듯 건재를 자랑했다.
저자인 고든 토마스에 따르면 그가 각국 정보기관의 추적을 따돌릴 수 있었던 데에는 파키스탄 정보부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즉 파키스탄 정보부가 서방 정보기관의 첩보를 빈 라덴에게 흘렸다는 의미다.
이 대목에 대해선 9.11테러 이후 국제정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당시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은 정권 기반이 취약했다. 군부 쿠데타로 집권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런 약점을 극복해야 했다. 그때 마침 9.11테러가 벌어졌다. 이 엄청난 사건은 알 카에다의 소행이었고, 미국은 이들이 은신한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무샤라프는 파키스탄이 아프가니스탄과 인접해 있음을 내세워 미국에게 손을 벌렸다. 미국은 무샤라프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아프가니스탄을 공략하려면 인접국인 파키스탄의 협조가 필수적이기 때문이었다. 무샤라프의 도박은 일단 성공한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무샤라프는 한 가지 중요한 현실을 간과했다. 바로 이슬람이었다. 이슬람은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파키스탄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정신적 요소였다. 군부와 정보기관도 이슬람의 영향권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이들 기관은 무샤라프의 친미정책을 못 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미국과 지하드(聖戰)을 벌이던 빈 라덴을 도왔던 것이다.
빈 라덴은 9.11테러가 벌어진지 10년 째 되던 해인 2011년 5월 미군 특수부대에 의해 사살 당했다. 미국은 그동안 그가 아프간 동굴에 은신해 있어 수색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미국이 보유한 정보력과 기술력을 감안해 볼 때 10년 가까이 그의 소재조차 파악하지 못했다는 설명은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이런 저간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파키스탄 정보부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흘렸다는 고든 토마스의 지적은 흥미진진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이 책에서는 빈 라덴 말고도 영국 다이애나 비 사망, 전설적인 스파이 엘리 코엔 등 첩보소설을 방불케 하는 이야기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정보력은 국가의 존립과 직결
이제 글을 매듭지을 차례다. 이 책은 국제정치 무대 이면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정보전쟁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즉, 정보전은 첩보영화 속 주인공인 제임스 본드가 영웅적인 활약을 펼치는 액션활극이 아니라 ‘국익’만이 지상가치인 국제정치의 연장선에서 전개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모사드는 정보력과 요원들의 잔혹성에 관한 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모사드의 무용담은 수차례 영화로 옮겨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모사드를 있게 했고 그 조직을 그토록 무자비하게 만들었을까? 바로 이스라엘의 열악한 안보환경이다.
이스라엘은 지정학적으로 지중해와 아랍권을 연결해주는 지역에 위치해 있던 탓에 예로부터 잦은 외침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구약과 신약을 통해 이스라엘이 페르시아, 로마 등 강력한 세력들에게 침략을 당한 이유도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비롯됐다. 지금 이스라엘의 안보환경은 더욱 열악하다. 사실상 이스라엘은 적대적인 아랍세계에 포위된 섬이나 다름없다.
이스라엘이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 선택한 선택지는 바로 정보력이다. 이스라엘이 건국 후 아랍세계와 벌인 일련의 전쟁에서 적의 월등한 군사력을 일순간 무력화시킬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정보력에서 우위를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의 정보전은 구약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내력이 깊다. 신명기 1장에서 모세는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12명의 정찰대를 꾸려 가나안 일대를 정찰하게 했다. 모세의 이런 조치는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첩보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 입장에서 정보전은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다. 당연히 강인함과 함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무자비함이 따를 수밖에 없다.
안보환경이 열악하기로 말하면 한반도도 이스라엘 못지않다. 한반도는 유사 이래 줄곧 강대국들의 외침에 시달려 왔으며 지금은 미-일-중-러 4대 강국의 이해관계가 교차하고 있다. 현재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돼 있으며 안보상 민감한 요소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그러나 이런 열악한 안보환경이 무색할 정도로 지금 이 나라의 정보력은 후진국 수준을 면치 못하는 실정이다. 그 극명한 예가 2010년 4월 천안함 사태, 그리고 2012년 12월 대통령 선거 당시 국가정보원(국정원)의 정치개입이다.
먼저 천안함 사태 당시 군 지휘부의 보고체계는 혼선에 혼선을 거듭했다. 무엇보다 군 당국이 정확한 정보를 확보하지 못해 구조작전은 갈팡질팡했고 결국 사태 초기의 결정적 국면을 놓치고 말았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천안함 침몰로 46명의 젊은이들은 차디찬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정부는 이 사건이 북한의 소행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이 같은 발표에 대해 논란이 분분하다. 2011년 7월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천안함 침몰원인에 대한 정부발표를 신뢰한다는 응답은 33.6%에 그쳤다.
국정원의 정치개입은 더욱 심각하다. 국정원은 이명박 전 대통령 재임 시절 세종시, 4대강 사업, 제주 해군기지, 주택정책, 복지 등 주요 국정현안에 관해 정부 입장을 옹호하는 한편, 대통령의 외교 실적, 경제성과 등을 홍보하는데 앞장선 것으로 검찰 수사결과 드러났다. 국정원은 한 걸음 더 나가 선거에까지 영향을 미치려 했다. 검찰 수사에 따르면 국정원 심리전담 직원 70여 명은 2012년 12월 대통령 선거를 즈음한 100일 동안 야당 후보를 비방하는 댓글을 무더기로 작성했다. 한 국가의 정보기관이 이토록 드러내놓고 국내정치에 개입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국제분쟁 전문기관인 국제위기그룹(ICG)이 보고서를 통해 국정원이 “정보의 정치화, 정치개입이라는 고질병을 앓고 있다”고 지적할 정도였다.
다시금 한반도의 현실로 돌아가 보자. 미-일-중-러 4대 강국의 이해가 교차하는 지구상 유일의 분단국 대한민국이 어떤 방식으로 열악한 안보환경을 극복하고 국익을 극대화시킬 것인가? 대한민국의 정보기관은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가?
바로 이런 의문점들이 이 책 『기드온의 스파이』가 한반도에 던지는 화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