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대중문화 리뷰] 후버의 생애로 조명한 미국 현대사

클린트 이스트우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의 한 장면. ⓒ스틸컷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그다지 드라마틱하지 않다. 또 문체는 그의 생김새만큼이나 무뚝뚝해서 종종 지루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용서받지 못한 자>, <엡졸루트 파워>, <미스틱 리버>, <밀리언 달러 베이비>, <아버지의 깃발>, <체인질링>, <히어 애프터>, <그랜 토리노> 등 그가 연출한 작품들은 한결같이 작가정신이 번득이고 울림이 깊다. 이 점이 그의 영화가 가진 매력이자 마력이다. 

이 대목에서 아쉬운 점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그의 작품 가운데 2006년 작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원제: Letters from Iwozima), 그리고 2011년 작 (원제: J. Edgar)는 국내 상영관에 걸리지 않았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아버지의 깃발>과 짝으로 만든 영화로 태평양 전쟁 막바지 가장 치열했던 이오지마 전투를 그렸다. <아버지의 깃발>이 미국 쪽 시선으로 이오지마 전투를 조명했다면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일본군 지휘관 쿠리바야시 다타미치를 축으로 한 일본군이 겪는 전쟁상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미군에게 맞서 승산 없는 싸움을 벌이는 일본군 병사들의 심리를 리얼하게 묘사한다. 특히 미군에게 거점인 쓰리바치 산을 빼앗기고 궁지에 몰린 일본군 병사들이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수류탄으로 자결하는 장면은 충격적이다.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 장면을 통해 일본 군국주의의 광기와 이로 인해 전쟁 최전선에 내몰린 평범한 일본인들의 감정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 극단으로 치달았던 일본 군국주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훌륭한 텍스트다. 그러나 ‘네이버,’ ‘다음’ 등 검색 포털에서 이 영화를 검색하면 부정적 평가 일색이다. 특히 주인공 쿠리바야시 다타미치를 미화하는 것 아니냐는 평이 많다. 사실 이런 평가가 아주 틀리지만은 않다. 
쿠리바야시는 일본 군부에서는 이례적으로 미국에서 훈련 받은 군인이었고, 이스트우드는 그에게 한없는 연민의 시선을 보낸다. 그러나 감독의 이런 시선은 쿠리바야시가 ‘미국통’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쿠리바야시는 확실히 다른 일본군 장성과는 다른 면모가 존재했다. 가케하시 구미코의 책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보면 쿠리바야시의 풍모가 더욱 확실히 드러난다. 이스트우드는 전쟁 앞에 마주선 인간으로서 쿠리바야시의 풍모를 드러내려 했던 것이다. 이 작품에 대한 평가가 표피적인 인상에 치우쳤다는 점은 아쉽기 그지없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의 한 장면. ⓒ스틸컷

이제 소개할 의 경우도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34년간 ‘어둠의 권력’으로 군림했던 미 연방수사국(FBI) 창설자 존 에드가 후버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이다. 이스트우드는 이 영화를 통해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논란의 중심에 섰던 후버의 일생을 차분하게 추적해 나간다. 이 영화는 이스트우드의 영화치곤 아주 드물게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전설적인 은행 강도 존 딜린저와 그를 체포한 멜빈 퍼비스 요원에 얽힌 일화라든지, 말 그대로 세기의 유괴사건이었던 찰스 A. 린드버그 영아 유괴사건, 그리고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섹스 스캔들 도청 등 파란만장했던 미국 현대사의 에피소드가 계속해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 이스트우드, 진면모 발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골수 보수주의자다. 지지정당도 공화당이다. 그는 2012년 미 대선 당시 공화당 전당대회에 깜짝 등장했다. 그리고 연단 옆에 놓인 빈 의자와 가상 인터뷰를 진행했다. 민주당 출신 오바마 대통령이 아무런 존재감 없는 대통령임을 비꼰 고도의 정치적 제스처였다. (이스트우드의 정치공세에 대해 오바마는 ‘자리 있음’이라는 의자 사진으로 재치 있게 받아 넘겼다)
이 영화 는 보수주의자 이스트우드의 진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후버 국장(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은 자신의 일생을 통해 미국을 볼셰비키의 준동으로부터 지켜냈고, 경제대공황기 암흑가의 제왕으로 군림했던 알 카포네와 존 딜린저를 잇달아 제압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하다. 이스트우드 역시 이런 면에 후한 점수를 주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가 후버를 ‘신’의 반열에 올리는 것은 아니다. 특히 후버의 동성애 성향과 여성 콤플렉스를 정면으로 다룬다. 후버가 부관이자 일생의 동반자였던 클라이드 톨슨 부국장과 난투극을 벌이는 장면은 사뭇 파격적이다. 톨슨은 후버가 아내를 맞이하겠다는 말에 격분해 그와 주먹다짐을 벌인다. 그러다가 그에게 키스를 한다. 그리곤 “당신을 사랑합니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뜬다. 이러자 후버도 “나도 사랑해”라고 되뇌인다. 톨슨과 후버의 연정은 리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 속 두 주인공 잭 트위스트와 어니스 델마의 연인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후버가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옷을 입고 오열하는 장면은 그의 일생을 지배했던 여성 콤플렉스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후버의 치부를 들추는 시선은 일정 정도 연민이 섞여 있다. 그러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명성을 흠집 내기 위해 그의 사생활을 도청한 행태, 그리고 회고록을 집필하면서 자신의 공을 과장했음을 그리는 대목에서 시선은 싸늘하게 돌변한다. 이스트우드가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즉, 대통령마저 넘보지 못할 수사제국을 건설했지만 이 과정에서 비리와 탈법이 공공연하게, 때론 거리낌 없이 자행됐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보수주의자 이스트우드의 품격이 유감없이 드러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의 한 장면. ⓒ스틸컷

나이를 먹으면 연민의 정이 싹트는 것일까? 이스트우드는 영화 후반으로 갈수록 후버에게 한없는 연민의 정을 보낸다. 특히 말년의 후버가 닉슨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글썽이는 장면은 연민으로 가득하다.   
여기서 잠깐 역사로 눈 돌려보자. 닉슨은 집권하자마자 친정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이런 권력의지의 연장선으로 FBI 제국에도 도전장을 내밀었다. 후버는 닉슨이 권력욕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라는 걸 대번에 간파했다. 영화에서도 후버는 톨슨 부국장에게 “닉슨은 권력이라면 무슨 짓이든 할 사람이야”라는 말을 건넨다.  
어느 날 후버는 닉슨에게 집무실에 녹음기를 설치하고 모든 상황을 녹음하라고 권했다. 닉슨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권고를 받아 들였고, 그가 집무실에서 했던 모든 행위를 기록했다. 닉슨은 이것이 자신을 옭죌 것이라곤 예상 못한 듯하다.   
잘 알려진 대로 닉슨은 워터게이트로 곤욕을 치렀다. 특히 의회와 언론은 녹음테이프에 주목해 쉴 새 없이 이 테이프를 공개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아마 이 테이프가 아니었다면 닉슨은 끝까지 버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닉슨은 스스로 물증을 남겼고,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지켜내야 했다.  
후버는 워터게이트가 불거지기 한 달 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공교롭게도 닉슨은 후버가 놓은 덧에 걸려들었다. 더구나 후버의 유산이나 다름없었던 FBI는 닉슨에게 결정타를 날렸다. 당시 FBI 부국장 마크 펠트가 워터게이트를 추적하던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 기자에게 결정적 단서를 제보한 것이다. 『삼국지』에서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아냈듯 ‘죽은 권력’ 후버와 ‘살아 있는 권력’ 닉슨의 투쟁은 후버의 완승으로 막을 내렸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연출력은 해가 갈수록 세련미를 더해갔다. 더구나 <아버지의 깃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체인질링> 등 그가 최근 5년 간 내놓은 작품들은 그가 청춘을 보냈던 20세기 역사와 궤적을 같이 하기에 무게감은 더하다. 특히나 이 작품 가 개봉되지 않고 DVD 샵 한 구석에 처박혀 있다는 현실이 아쉽기 그지없다. 대중의 영화 소비수준이 질적으로 저하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 돌아봐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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