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즘이 유행어가 된 것일까? '자생적 아나키스트'란 말을 남용하는 경찰과 언론, 또 붉은색과 검은색이 어우러진 깃발이 나부끼던 그리스 청년들의 폭동을 보면 그런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하지만 아나키즘은 원래 무슨 뜻이었을까?
이번 1월에 탄생 200주년을 맞는 피에르 조셉 프루동이 말했던 아나키즘의 이론적 범주 안에 그 답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전국 노동자연맹과 같은 어떤 조직들의 이데올로기로 여겨야하는 것일까? 아니면 약간의 급진성과 반(反)권위주의적 색채를 띤 사회·문화적인 투쟁과 관련된 다양한 사상들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변한 것은 아닐까? 이제는 '리베르테르'를 자처하던 많은 좌파 정치 지도자들까지 아나키스트를 언급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모든 게 뒤섞인 현실에서, 진정한 아나키스트들이 거의 몰락한 와중에서 그 사상이 작은 목소리로나마 이어지는 이유가 설명된다. 한마디로 아나키스트란 단어가 아무데나 무절제하게 사용되고 있다.
'아나키스트'와 '리베르테르'란 용어는 오랫동안 투사들에게 거의 똑같은 개념이었다. 그런 명칭을 띤 조직에 속하든 않든 간에 투사들은 자신들이 정치의 장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명확히 규정하기 위해서, 더 정확히 말하면 정치의 장에서 다른 부류들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불리기를 바랐다. 그들과 싸우고, 그들을 배척하던 사람들도 다를 바가 없었다.
부르조아 계급을 노골적으로 옹호하던 사람들만이 아니라, 좌우를 막론하고 모든 정당원들과 언론인들까지 아나키스트와 리베르테르를 동일한 부류로 여겼다. 따라서 정당과 언론에 영향을 받은 '여론층'도 마찬가지였다.
아나키즘은 노동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권력자들에 대항해, 노동자들이 집단적 자기 해방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역동적이다. 따라서 아나키즘은 개인을 소외시키는 제도와 규범과 종교에 견주어 개인의 자기 해방을 뜻하며, 이런 점에서 리베르테르와 비슷하다. 그러나 두 개념의 구분은 의미와 정치색에서 상호 보완적 관계를 더 확실하게 드러낼 뿐이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프랑스 아나키스트 연맹의 주간지는 <리베르테르의 세계> (Le Monde libert-aire)란 명칭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아나키즘과 리베르테르의 구분
그러나 국가라는 존재가 여느 때보다 자유를 침해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협소한 세계 밖에서도, 얼마 전부터 아나키스트와 리베르테르가 이제는 동의어로 쓰이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문제를 다룬 글을 읽다보면 엉뚱한 단어들의 재결합을 보는 듯하다. 실제로 정치인들과, 시장에 영합한 언론에 빌붙어 돈벌이를 하는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아나키스트'와 '리베르테르'를 이분적으로 대립시키는 게 유행이 돼 버렸다. 따라서 '테러와의 전쟁' 덕분에 아나키즘은 이제는 숨이 끊어진 공산주의를 대신해서, 이슬람 근본주의에 버금가는 악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반면에 '리베르테르'는 무사 안일을 거부하는 온갖 반항자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문화적이고 미디어적인 개념으로 돌변해서, 질서의 복원에 집착하는 그들을 반순응주의자로 포장해주는 역할을 한다.1)
'아나키즘', 악마적 의미로 변질
이처럼 아카니즘을 악마적 의미로 변질시키고, 리베르테르의 원래 의미를 퇴색시키는 현상은 새삼스런 게 아니다. 19세기의 전환점에도 아나키즘이란 이름으로 행해진 '사실상의 프로파간다'가 러시아와 프랑스 등의 지역에서 살인에 버금가는 악질적 범죄를 야기하면서, 아나키즘은 테러 행위와 동일시되고 말았다. 또한 아나키즘은 그 모태인 노동운동에서도 허무주의적 사회적 혼돈 상태를 떠올려 주면서, 지리학자 엘리제 르클뤼(Elys맯e Reclus)가 '권력없는 질서'로 요약했던 사회적 삶이란 개념과는 동떨어진 개념으로 인식됐다.2)
그 후에도 아나키즘은 세상을 비판적으로 보는 집단에 의해 다시 의미가 변질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반대로, '부르조아 미학의 기준'을 뒤흔들겠다고 나선 예술가와 작가를 높이 평가하는 용어로 쓰였다. 다다이즘과 그후에 '초현실주의 혁명'을 이끈 사람들에서부터, 2차대전 후에 '우익 아나키스트'로 자처한 일부 보수적 소설가와 수필가를 거쳐 '누벨 바그'를 주장한 영화인들까지, 많은 전위적 예술가가 아나키스트로 불렸다. 따라서 '리베르테르'란 수식어는 가요계(조르주 브라상스, 자크 이즐랭, 르노 세샹 등)로 넘어갔고, 그 후엔 장 피에르 망셰트, 프레데릭 파자르디, 장 베르나르 푸이 등과 같은 프랑스 '네오 폴라'(n맯o-polar) 운동을 주도한 작가들에게 그 이름이 붙여졌다. 사회 변혁을 외치는 구시대적 개념으로 밀려난 아나키즘에서 떨어져 나와,3) 리베르테르는 경제의 자유화와 맥을 같이 하는 사고와 습관의 자유화를 뜻하며, 결국에는 '리버랄 리베르테르'라는 모순 어법적 돌연변이까지 낳기에 이르렀다.
이 괴상 망측한 용어가 개념어로 정립되기 전에, 프랑스 공산당 소속의 한 사회학자는 '사회적' 차원에서는 억압적이지만 '사회성'이란 차원에서는 관용적인 '유혹의 자본주의'의 도래를 비난하고, 68년 5월의 지도자들이 혁명을 주관주의적 입장에서만 기억하고 받아들이며 우익화되는 경향을 비판하면서
'리버럴 리베르테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4) 다니엘 콘 벤디트(Daniel Cohn-Bendit)가 그 대표적인 대상이 된 인물이다. 많은 사람에게 그는 "권력자를 혐오하던 사람에서 권력을 탐하는 사람으로, '아니요'라며 반론을 제기하던 사람에서 '그렇습니다'라며 넋을 잃고 동의하는 사람으로, 또 좀처럼 고집을 꺾지 않는 반항아에서 비굴하게 추종하는 사기꾼으로 변신한 사람"으로 여겨졌다.5) 붉은색에서 '녹색'으로 변신한 다니엘은 '리버랄 리베르테르'라는 비판을 재빨리 왜곡 해석해, '생태·사회적 개혁주의'를 뜻하는 표어로 뒤바꿔 놓았다. 덕분에 그는 정치·언론계에서 남다른 전문가로 평가받아 어엿한 관리 노릇까지 할 수 있었다.
모순 어법 '리버랄 리베르테르' 등장
다니엘에게는 곧 훌륭한 동반자가 생겼다. '계급투쟁'에서 살아남은 세르주 쥘리(Serge July)가 1981년 5월 일간지 <리베라시옹>을 새롭게 탈바꿈시키면서 '리버랄 리베르테르'란 깃발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완전히 현대적인 모습으로 탈바꿈한 <리베라시옹>은 편집장의 입을 빌어, 두 가지 유산에서 물려받은 노선을 충실히 따르겠다고 선언했다.
하나는 계몽 시대 철학자로부터 물려받은 자유주의 정신인 '리버럴'이었고, 다른 하나는 반권위주의를 주장한 1968년 5월 세대의 정신인 '리베르테르'였다. 두 세대 사이에 애매한 공백기가 있기는 했지만,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언급되는 '기억의 공백'처럼 블랙홀까지는 아니었다. 한 세기 반 동안 노동운동이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그와 더불어 노동운동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사상과 이상도 있었다. 달리 말하면, 좌파 정권이 시장과 기업을 복권시켜 이윤을 보장해주면서 더 이상 적절하지 못한 이념으로 전락해버린 반자본주의가 있었다.
'제2의 좌파'(deuxi맟me gauche)로 사회당에 가입해 꿈을 펼친 사람들 사이에서 '리버랄 리베르테르'라는 깃발은 가장 화려하게 펄럭였다. 1980년대에 파비위스파와 로카르파는 경제의 현대화가 있을 때 '지나간 시대의 고리타분한 부담에서 벗어나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삶의 양식인 리베르테르를 활짝 꽃피우는 보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며 '춘권'(rouleau de printemps)이란 이름으로 손을 잡았고, 내홍을 겪으면서도 경제의 현대화를 위해 부담스런 사회주의의 과거를 떨쳐내기로 합의했다.
알랭 멩크는 셍코벵 행정위원회와 생시몽 재단에서 활동하며, 언론에 뻔질나게 얼굴을 내비치며 '리버랄 리베르테르'라는 모순 어법으로 '68세대의 자본주의'를 미화시켰다.
'아나키즘'에 대한 경원시, 박대
시간이 지나면서 불평등과 불확실이 심화되고 가난까지 깊어지자, '리버랄 리베르테르'는 조금씩 그 진실성을 상실해갔지만, 리베르테르와 아나키즘을 짝짓는 시도는 없었다. 오히려 둘 사이의 간격이 더 넓어질 뿐이었다. 악화되기만 하는 민중의 소외와 가혹해져가는 억압에 반발하는 직접적 행위로 투쟁이 되풀이되면서 아나키즘은 점점 죄악시됐고, 리베르테르를 표방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복잡다기한 정치·언론계에서 꾸준히 증가했다. '쾌락주의적이고 무신론적인 개인주의'로 아나키스트 세계를 한동안 현혹시켰던 철학자 미셸 옹프레(Michel Onfray)의 영향력이 커져가고 있다는 게 그 증거이다.
아나키스트들이 '리베르테르'란 수식어가 그처럼 남발되는 현상을 방임하고만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이 보수주의자들을 공격하는 예술가나 작품에 '리베르테르'란 수식어를 전혀 붙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리베르테르'를 완전히 폐기시킨다면 그 이름에 담긴 원칙을 위배하는 것이라 말했고, 리베르테르란 단어가 어떤 형태로든 다시 쓰인다는 것은 리베르테르의 원칙을 얻었다는 뜻이 아니겠냐고 덧붙였다. 개인주의화되고 탈정치화된 문화주의가 비판적 급진성을 독차지하면서, 리베트테르의 원칙이 본연의 비판적 급진성을 대폭 상실했다는 사실을 외면한 셈이었다.
사회당에서 녹색당을 거쳐 혁명 공산주의자 동맹으로, 카멜레온처럼 변신한 사회학자 필립 코르퀴프 덕분에, '리베르테르'는 자본주의 국가를 떠받치는 굳건한 기둥의 하나인 사회 민주주의와 짝을 맺으며 외설적인 냄새까지 풍기기에 이르렀다.6) 향후 반자본주의를 표방할 정당을 대변해 코르퀴프는 로자 룩셈부르크과 루이즈 미셸, 심지어 '혁명적 아니키스트'인 엘리제 르클뤼까지 앞세우고, 얼마 전 재판 출간된 르클뤼 강연록의 서문까지 쓰는 기염을 토했다. 또한 그는 사회 민주주의보다는 덜 위험하지만 그래도 모순된 개념에 '리베르테르'란 수식어를 서슴없이 덧붙이며, '게바라주의자인 동시에 리베르테르'라고 자처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목숨까지 버리며 반제국주의에 저항한 게바라에게 경의를 표하지만, 게바라의 인간됨과 행동에서 반권위주의적 흔적을 찾기 무척 힘들다.
'리베르테르'가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저항이나 거부와는 거리가 있는 듯한 집단을 포함해서, 프랑스에서 이 단어는 야릇한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는 반면에, 아나키즘은 여전히 위험한 것이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구나 현실 세계가 아니라 추리소설에서 '아나키스트적 자율주의 운동'이란 불온한 세력이 아나키즘을 표방하면서, 이 단어는 더욱 위험한 것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게 됐다. 이른바 문화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것은 너도나도 '리베트테르'란 수식어를 받아들이는 반면에, 아나키즘은 정반대로 범죄적 사상으로 전락해가는 실정이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두 과정이 밀접히 연결돼 있어 그런 현상이 놀랍기만 하지는 않다.
강화된 보수주의 '신 리베르테르'
정치와 이데올로기의 회복이란 맥락에서 획일화나 집단화와 유사한 '사회적인 것'을 모든 해방의 출발점인 '사회성'과 대립시키는 사람들에게, '경제의 제약'에 순응하는 것이 반드시 옛날의 반체제적인 가치를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다. 신(新)프티 부르조아는 '리베르테르'에서 무엇보다 개인의 성공을 추구하며, 집단적 자기 해방을 민주주의와 법치국가에 대한 위협이라 생각하며 집단적 자기 해방이란 관점을 단호히 거부한다.
따라서 '비순응주의자'는 어떤 식으로 살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에 기존의 규범이나 규칙을 비난해야 할 이유가 없다. 더구나 개인적인 삶이나 제도적인 삶, 보조금을 받는 삶이나 돈벌이에 치중하는 삶을 거부하는 행위가 이제는 자본주의의 지배를 부추기는 꼴이 되기도 한다. 반면에 명시적인 동의나 암묵적인 동의 하에서, 적어도 이런 혜택을 받는 사람들의 침묵을 전제로, 지배자는 자본주의의 지배를 해칠 수 있는 모든 행위와 모든 발언, 요컨대 어떤 형태의 투쟁이라도 금지하고 억누르는 권한을 스스로에게 부여할 수 있다. 결국 '신(新)리베르테르'는 한층 강화된 보수주의에 '신'(新)이란 접두어를 덧붙인 것에 불과하다.
* 프랑스의 도시폭력문제 전문가.
1) '리베르테르'란 신조어는 1850년대 말 아나키스트이던 조제프 데자크가 처음 사용했다. 데자크는 당시 공화주의자이던 프티 부르조아의 타협적인 어중간한 태도를 끊임없이 비판했다.
2) 그렇다고 대안세계화(Altermondialisme)를 생각하는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권력을 쟁취하지 않고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부르조아 권력층부터 제거해야 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이기 때문이다. 또 아나키스트의 입장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인민'에게 행사된다는 건 모순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민은 자체적으로 조직화돼 권한을 위임하는 대신에 권한을 보유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3) 프랑스의 옛 아나키스트들이 이런 타락의 빌미를 종종 제공하기는 했다. 그들은 위대한 선조들과 해묵은 논쟁들--특히 프루동·바쿠닌 대 마르크스·엥겔스--을 무작정 숭배하면서, 마르크스 사상을 당이나 국가의 존립을 위한 도구로서의 마르크스주의로 전락시켰고, 위대한 공산주의 사상가들(안톤 파네쿡, O. 륄, P. 마티크 등)을 망각의 늪에 던져버렸을 뿐아니라, 본능적인 반마르크스주의로 결국에는 자본주의의 변화 과정을 유물적으로 해석하기를 포기했다. 더구나 자본주의 앞잡이들의 추측을 공인해주는 역할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아나키스트 서점 피플리코에서 혁명의 실패를 주제로 열린 토론에 참석한 스테판 쿠르투아의 <공산주의라는 검은 책(Le Livre noir du communisme)>(로베트 라퐁 출판사, 파리, 1997)은 미국 네오콘의 싱크 탱크에서 출간된 책처럼 읽혀질 지경이었다.
(4) 미셸 클루스카르, <신파시즘과 욕망의 이데올로기>, 드노엘 출판사, 1973, <유혹의 자본주의>, 에디시옹 소시알, 1981.
(5) 프랑수아 퀴세, <악몽같은 10년, 1980년대>, 라 데쿠베르트 출판사, 2006.
(6) 필립 코르퀴프, '리베르테르한 사회 민주주의를 위하여', <르 몽드>, 2000년 10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