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왕상 19:1-8, 계 3:14-19, 요 4:31-34)
설교문
[안정과 변화 속에서]
기대와 설렘으로 새해를 맞이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시간을 어떻게 통과해 오셨는지요?
다행스럽게도 우리 사회는 조금씩 정의로운 일상을 되찾고 있습니다. 지난 21일, '12.3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며 헌법 수호의 의지를 보여준 법원의 준엄한 판단이 있었습니다. 이진관 재판장은 "국민이 선출한 권력자가 법치를 흔드는 행위는 민주주의의 뿌리를 뒤흔드는 것"임을 명확히 하며 엄정한 법질서가 무엇인지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양심 있는 법조인들의 존재는 우리 사회가 여전히 살만한 곳이라는 안도감을 안겨줍니다.
경제 시장에서도 코스피 5,000 달성이라는 희망적인 소식이 들려옵니다. 우리 기업들이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아 국민의 자산이 늘어나고 노후의 걱정을 덜 수 있게 된다면 참으로 반가운 일입니다.
새 정부 들어서서 한미 관세 협상 타결, 외교 정상화, APEC의 성공적 개최, AI 강국으로의 도약 등 여러 면에서 좋아지는 것은 사실이고, 만약 윤석열 정부가 지속되어서 27년까지 임기를 계속했다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면 내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운 우리 자신들이 대견하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앞에 놓인 과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최근 며칠간 동북아시아의 강추위가 계속되고 있고, 러시아의 캄차카 전역에는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습니다. 이 모두가 기후 온난화로 북극의 해빙이 감소하고, 대기가 따뜻해지면서 제트 기류가 약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기후 재앙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지요. 새해 들어서 여기저기에서 AI가 몰고 올 세상의 변화에 대한 소식들이 들립니다. 인공지능이 바꿀 세상은 흔히 전기와 비교되곤 합니다. 여러분! 전기가 없는 세상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은 앞으로 우리 사회의 산업구조, 노동과정, 일자리, 고용 형태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것을 바꾸게 될 것입니다. 벌써 신입(Entry-level) 일자리 감소가 전 세계에 눈에 띄게 증가했습니다. 사회 양극화는 더욱 심화될 것이 분명합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오늘날의 시대를 일찍이 예측하여 "액체 현대(Liquid modernity)"라는 말로 불렀습니다. 현대의 특징은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 현대화를 하도록 집요하게 강요하는 것인데, 액체 현대는 "변화"야말로 유일하게 영속되고, "불확실성"만이 유일하게 확실하다는 특징을 지닙니다. 물과 같은 액체는 흐르고, 엎질러지고, 튀기도 하고, 서서히 새어 나오기도 하면서 늘 변화합니다. 견고하고 든든하게 서 있지 않습니다. 바우만이 말하는 현대는 이전에 견고하게 서 있다고 생각하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전부 액체처럼 녹아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늘 완벽을 추구하지만, 겪게 되는 것은 중압감, 불안감, 그리고 자기 착취에 의한 피로감입니다. 이런 것들을 반복적으로 겪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삶의 의욕이 상실됩니다. 오늘 저는 이 무력감의 늪에서 어떻게 빠져나와, 매일의 삶을 시들지 않는 나무처럼 생기 있게 살아갈 수 있을지 성서의 지혜를 빌려 나누고자 합니다.
[엘리야가 겪은 자살 충동]
오늘 먼저 다룰 성서 본문의 주인공은 바로 엘리야입니다. 개인의 성격이 질병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를 경영학에 접목하여 회사 조직에서 높은 성과를 내는 사람의 성향을 연구했는데, 여기에서는 사람을 A 유형과 B 유형으로 나눕니다. A 유형의 사람은 공격적이고, 성취 지향적인 사람들입니다. 매우 도전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시간 내에도 이를 달성하려고 노력하며, 모험을 즐기고, 극한 상황에서도 많은 에너지를 분출하면서 남들과 경쟁하여 승리할 때 자신의 가치를 느끼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B 유형의 사람은 비교적 느긋하고, 덜 공격적이면서 자율을 매우 중시합니다.
엘리야 예언자를 가만히 살펴보면 전형적인 A 유형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불같은 믿음을 소유하였고, 도전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었습니다. 야훼 하나님만을 섬기며 한결같은 길을 걸어온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갈멜산에 불러 놓고 열정적으로 설교합니다. 그리고 바알과 아세라의 예언자 850명과 싸웠는데, 전혀 기가 눌리지 않았습니다. 아합왕의 병거보다도 빨리 달렸다는 기록(왕상 18:45-46)은 그가 얼마나 활동적인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속 엘리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이세벨 왕후의 서슬 퍼런 살기에 압도된 그는 이스라엘 최남단 브엘세바를 지나 홀로 광야로 숨어듭니다. 그리고 로뎀 나무 아래 주저앉아 하나님께 죽기를 간청합니다.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불의 선지자라 불리던 그가 지금 자살 충동과 극심한 우울에 빠진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갈멜산의 승리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홀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감당해야 했던 영적·정신적 에너지의 소모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게다가 이 정도의 승리와 성취를 거두었다면 북이스라엘 왕가의 실제적 변화가 있어야 했지만, 즉 아합왕이나 이세벨이 회개하고 엘리야 예언자의 말을 따라 야훼 하나님께 순종해야 했지만, 도리어 이세벨은 길길이 날뛰면서 엘리야를 죽이려 들었던 것입니다.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존재를 부정당할 때, 인간은 깊은 무력감에 빠집니다. '나 혼자뿐'이라는 고립감과 부정적인 사고는 결국 그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웠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저는 할 만큼 했습니다. 주님! 제 목숨을 거두어 주소서. 무덤 속에 있는 조상들 만날 준비가 되었습니다."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다 보면 엘리야가 처한 상황을 맞닥뜨릴 수가 있습니다. 거대한 성공 뒤에 오는 탈진도 그런 것이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반드시 성취해야 하는 과제 속에서 반복적인 일들을 무의미하게 해야만 할 때도 그렇습니다. 자기와 친한 사람이 겪은 고통에 함께 마음 아파해 주다가 심리적으로 전염되면서 나도 모르게 과거의 아픈 상처와 트라우마에 휩싸일 수도 있습니다. 너무나 빠르게 변해 버린 세상, 현대 사회에 몰아닥친 이 폭풍과 같은 변화에서 우리의 정서적 안정감이 산산조각이 나 흩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나도 모르게 낭떠러지 끝에 서 있고,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을 마주한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치유와 회복의 길]
하나님은 절망에 빠진 엘리야를 어떻게 회복시키셨을까요? 그 처방은 의외로 단순했습니다. 바로 '잠'과 '음식'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죽기를 기도하였지만 죽는 대신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렇게 자고 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시고, 그를 깨워 돌에 구운 과자와 물을 줍니다.
육체적 쉼과 정신적 안식은 우리 삶을 생기 있게 유지하는데 가장 필수적인 것입니다. 인간은 사유하는 능력으로 지구별의 리더가 되었지만 생각하는 힘도 건강한 몸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제 건강을 걱정하시지만, 제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어떤 일이 있어도 잘 자고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잘 먹기 때문입니다. 번아웃에서 벗어나는 첫 번째 길은 바로 우리들의 몸을 보살피는 것입니다. 나 자신도 모르게 받았을 모든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고, 일하면서 긴장했던 근육들을 풀어주며, 삼시 세끼 제대로 챙기지도 못했던 날들에서 벗어나 가끔씩이라도 자신을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규칙적인 휴식을 갖는 것이야말로 번아웃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입니다.
번아웃에서 벗어나는 두 번째 방법은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시편 1편의 말씀에 있습니다. 시편에서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잘 되는 것처럼 언제나 영적이고 정신적인 양분인 말씀을 가까이에 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한 또 다른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번아웃은 자신이 모든 것을 해야 하고, 자신만이 할 수 있으며, 자신이 전적으로 책임지려고 할 때 생깁니다. 그러니 2000년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이 알려 주는 지혜를 들으십시오. 사람은 의존적 존재입니다. 하나님만이 스스로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그러하기에 때때로 하나님께 맡기고, 자기가 다하려는 생각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의 상당 부분은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여러분이 너무 책임지려고 하시지 마십시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할 만큼만 하시고 나머지는 주님께 맡기시라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이 해 주실 것입니다. 제가 지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목회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목회의 스트레스가 크지 않습니다.
이런 기도문이 있습니다. "주님, 제가 세 가지 큰 죄를 범했으니, 용서를 청합니다. 첫째, 저는 어디에나 계시는 주님의 현존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주님의 많은 성지를 찾아다니며 헤매곤 했습니다. 둘째, 주님은 제가 잘 사는 것에 대해서 저보다 훨씬 더 마음을 쓰신다는 것을 그만 잊어버리고 너무 자주 당신께 도와주십사고 외쳤습니다. 셋째, 우리 죄는 우리가 범하기도 전에 이미 용서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용서를 청하고 있습니다." (앤소니 드멜로, <개구리의 기도 1> 27. 살짝 각색)
저와 여러분이 진정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어쩌면 우리가 드리는 상당수의 기도는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우리의 분주한 행동도 부질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목소리 높여서 외칠 일도 아니고, 안달하고 불안해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온갖 초조함과 불안, 짜증과 부담감, 부정적인 정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번아웃에서 벗어나는 세 번째 길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신 말씀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아 미적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부유하게 되려거든 불에 정련한 금을 내게서 사고, 네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서 드러내지 않으려거든 흰 옷을 사서 입고,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너는 열심을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여라."
성서학 연구자들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앙 상태는 로마제국과 하나님 사이에서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설합니다. 양다리 걸치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주제와 관련해서 라오디게아 교회가 미지근하게 된 것, 즉 삶의 의욕을 느끼지 못하고 그냥저냥 죽지 못해 사는 것처럼 살게 된 이유가 바로 번아웃 상태에 이른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주시는 조언도 바로 번아웃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로 보였습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세 가지를 갖추라고 요구합니다. "불에 정련한 금"과 "흰옷"과 눈을 밝게 하는 '안약'입니다. 불에 정련한 금이란 불순물을 제거하여 순도가 높은 금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박해와 시련을 이겨낸 참된 신앙을 가리키는 은유입니다(벧전 1:7 참조). 라오디게아 교회는 겉으로 볼 때 부자였고, 그래서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이 교회는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 모두는 진짜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참된 삶의 의미와 풍족함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것에 매몰되어 살다가 번아웃에 이르게 되고, 또 깊은 수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고요하게 머물러 있는 훈련, 주님 품 안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험, 나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능력, 예수님을 닮아 온유함을 유지하는 것, 신앙의 동료들과 나누는 교제, 성령님을 통한 깊은 영적 사귐 가운데 얻게 되는 놀라운 깨달음과 충만함의 선물들, 위기 상황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놀라운 자기 통제력, 미래의 소망으로 현실을 진단하고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능력 등은 모두 참된 신앙에서 얻을 수 있는 보물들이고, 이것은 우리 삶이 소진되는 것을 막아줄 뿐만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생기를 돋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흰 옷"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신앙의 실천을 말합니다. 한편 이것은 세상 문화에 물들지 말라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향린교회 교우 여러분! 전국에서 우리 예배에 함께 참여하시는 교우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우리를 못살게 굴고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모든 원인은 어디에서 왔나요?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세속적 문화로부터 온 것입니다. 보이는 것에만 신뢰를 두는 실증주의, 경쟁에서 이겨야만 살아남는 승자독식의 분위기, 참되고 옳은 것이 아니라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것, 숭고한 가치가 아니라 돈을 쫓는 천박한 삶의 추구들이 모두 세속의 가치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가치를 쫓아가다 보니 우리의 정신이 피폐해지고, 우리가 마음 둘 곳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눈을 밝히는 "안약"을 준비하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헷갈리는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참된 분별력을 지니고, 그것으로 세상의 망가진 곳을 치유해야 합니다. 모두 밝은 눈을 갖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은 겉으로 화려했지만 그 문명은 노예에게 부과한 가혹한 노동과 착취를 통해서, 다른 나라의 침략과 조공을 통해서 건설된 것이었습니다. 서커스를 보고 빵을 받아먹으며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로마시민들 뿐, 대다수의 식민 지배를 받던 사람들은 모두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존과 상생의 길을 우리 모두 찾아야 합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지구별 모든 자연 생태계가 함께 살아야 할 길을 찾아야만 우리 인간의 삶의 질도 나아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순금과 흰옷과 안약을 준비합시다. 서로가 서로에게 순금이 되고, 흰 옷을 입혀주고, 안약을 발라 줍시다. 함께 슬픔과 고통을 나눌 때는 반이 되고, 함께 기쁨과 즐거움을 나눌 때는 배가 된다는 변함없는 진리를 우리 향린 공동체가 실현해 봅시다. 무엇보다 하늘과 땅을 휘젓는 폭풍우 속에서도 태풍의 눈과 같은 고요함을 간직하고 주님 앞으로 나아갑시다. 바로 거기는 치유의 장소이고 회복의 둥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그 양식으로 우리와는 다른 삶을 사셨습니다. 주님은 먼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셨고, 그래서 모든 것을 넉넉히 주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을 따라, 우리에게 주시는 또 다른 양식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전국의 믿음의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깨어나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양식을 얻으십시오.
시냇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철 따라 열매를 맺고
하는 일마다 생기가 넘치게 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