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파크랜드>의 한 장면 ⓒ스틸컷 |
1963년 11월22일 오후 12시30분, 존 F. 케네디 대통령 부부를 태운 무개차가 미국 텍사스 주 댈러스 시 데일리 광장을 천천히 지나고 있었다. 이 순간 갑자기 총성이 세 차례 울려 퍼졌다. 대통령은 피투성이가 됐고 데일리 광장은 일순간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 피터 랜즈먼 감독의 영화 <더 파크랜드>(원제: Parkland)는 바로 이 시점부터 이야기를 풀어간다.
피투성이가 된 대통령은 인근에 위치한 파크랜드 병원으로 긴급 후송된다. 병원 의료진들은 당혹감을 금치 못한다. TV에서 보던 미남 대통령이 머리에 총을 맞은 채 응급실에 실려 온 상황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응급수술 담당의인 찰스 짐 제리코(잭 애프론 분)는 꺼져가는 목숨을 살리려 애쓴다. 그러나 꺼져가는 생명의 불씨를 살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초조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경호원들과 다른 의료진들은 대통령의 운명을 지켜보며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이 영화가 주목하는 죽음은 따로 있다. 바로 존 F. 케네디의 암살범으로 지목된 리 하비 오스왈드의 죽음이다. 그런데 그가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오히려 형인 로버트 오스왈드(제임스 뱃지 데일 분)의 감정 동선에 무게를 실어 준다.
일순간 미국 대통령 암살 용의자의 직계 가족이 된 로버트는 케네디의 응급치료를 맡은 의료진만큼이나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런 와중임에도 그의 동생과 어머니는 너무나 태연하다. 동생 오스왈드는 딸아이의 신발에 관심이 있고, 어머니는 아들 오스왈드가 미국 정부의 정보원이라는 확신에 차 있다. 이들의 모습은 그를 더욱더 당혹스럽게 한다.
▲영화 <더 파크랜드>의 한 장면 ⓒ스틸컷 |
리 하비 오스왈드는 케네디가 세상을 떠난 뒤 사흘이 채 지나지 않아 잭 루비라는 남성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카메라는 오스왈드의 죽음을 연민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런 연민의 감정은 케네디의 장례식과 겹치면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케네디는 미국 대통령으로서 죽음의 순간부터 세상과 마지막 이별하는 순간까지 최고의 의전을 받았다. 반면 오스왈드는 대통령 암살범으로 지목돼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사실 이런 싸늘함은 그가 총격을 받던 순간부터 예고됐다.
오스왈드는 잭 루비로부터 총격을 당한 후 응급실로 실려 간다. 그런데 그가 실려 간 병원은 공교롭게도 케네디가 후송된 파크랜드 병원이었다. 이번에도 응급수술은 제리코가 맡았다. 그는 오스왈드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때 동료의사는 냉소적인 어조로 이렇게 묻는다. “꼭 살리고 싶어?” 꺼져가는 생명에도 지위고하가 존재한다는 말일까?
한편, 우연히 케네디의 암살 장면을 포착해 낸 의류업자 아브라함 자프루더(폴 지아매티 분)와 오스왈드를 감시했던 제임스 호스티 FBI 요원(론 리빙스턴 분) 등 케네디의 죽음과 가까이 있었던 이들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오스왈드의 형인 로버트는 텍사스주 경찰관으로부터 속히 고향을 떠나 신분을 바꾸고 지내라는 충고까지 듣는다. 그러나 상처의 무게를 이긴 이들도 있다. 케네디의 응급수술을 담당했던 제리코는 미국 최고의 신경외과 전문의로 성장한다. 오스왈드의 형 로버트는 자신의 고향을 떠나지도 않았고, 자신의 신분을 세탁하지도 않았다.
케네디 암살을 둘러싼 의문들
▲영화 <더 파크랜드>의 한 장면 ⓒ스틸컷 |
미국 정부는 연방대법원장을 지낸 얼 워렌을 위원장으로 하는 ‘워렌 위원회’를 소집해 진상규명에 착수했다. 이 위원회는 케네디 암살이 있은 지 약 10개월 후인 1964년 10월 이른바 <워렌 리포트>를 통해 이 사건이 리 하비 오스왈드의 단독범행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 암살이라는 엄청난 일을 행적이 여러 가지로 의심스런 한 개인이 벌였다는 결론은 의혹만 증폭시키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더구나 사건의 유일한 단서일지도 모를 잭 루비는 사건발생 4년만인 1967년 사망해 진상규명은 미궁에 빠진 상태다.
무엇보다 케네디 암살 장면을 포착한 자료 영상은 워렌 리포트의 결론에 의문을 제기하기에 충분했다. 아브라함 자프루더가 촬영한 문제의 영상은 케네디 대통령 암살 음모를 다룬 올리버 스톤 감독의 1991년작 에서도 공개된 바 있다.
이 영상은 케네디가 총을 맞는 순간 그의 머리가 뒤로 젖혀졌음을 생생히 보여준다. 즉, 그가 앞쪽에서 날아온 총탄에 맞았다는 의미다. 파크랜드 병원의 의료진들도 “대통령의 후두부에 무참하리만큼 큰 구멍이 있었고, 결후에도 연필크기만한 구멍이 있었다. 긴급히 소생절개 수술로 튜브를 넣기 위해 이 상처를 직경 3cm까지 넓혔다”고 증언해 총탄이 날아온 방향이 앞쪽임을 강력히 시사했다. 그러나 <워렌 리포트>는 리 하비 오스왈드가 발사한 총탄이 대통령의 뒷머리를 맞혀 우측 정수리를 깨뜨렸다고 결론지었다.
올리버 스톤은 를 통해 이 같은 결론에 반론을 제기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케네디의 암살이 군산복합체의 음모라고 주장했다. 케네디 암살을 둘러싼 전후 상황은 그의 음모론에 힘을 실어줬다.
▲영화 <더 파크랜드>의 한 장면 ⓒ스틸컷 |
케네디는 집권 후 카스트로 체제 전복을 위한 피그스만 침공(1961년)을 감행하는 한편, 베트남엔 최초로 전투부대를 투입하는 등 강력한 냉전정책을 펼쳤다. 1962년 베트남에 파병된 병력은 1만 1,300명에 달했다. 그러나 그의 냉전정책은 쿠바 미사일 위기를 겪으며 극적으로 선회했다. 케네디는 위기를 통해 미소 핵전쟁이 인류공멸로 귀결될 수 있음을 인식했다. 그는 이후 소련과의 대화를 모색했다.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던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케네디가 “미국이 장래에 쿠바를 침공하지 않는다”며 한 발 양보했다고 적었다.
케네디는 이어 1963년 10월11일엔 ▲ 1963년까지 미군 병력 1천 명 베트남 철수 ▲ 1965년 말까지 베트남에서의 미군 역할 종료를 골자로 하는 ‘국가안전보장행동(NSAM) 263호 각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그는 각서에 서명한 뒤 한 달이 지나 암살당했고, 대통령직을 승계한 린든 존슨은 전임자의 계획을 백지화시키고 베트남 개입을 본격화했다.
무엇보다 케네디 암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이 베트남에 본격 개입했다는 사실은 케네디 암살에 모종의 음모가 있는 것 아니냐는 추측을 가능케 했다. 그리고 <워렌 리포트>의 결론은 이런 추측이 음모론으로 발전하도록 날개를 달아줬다.
영화는 리 하비 오스왈드의 장례식으로 끝을 맺는다. 그의 장례식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시신을 운구할 사람도, 그의 장례를 집전할 사제도, 그가 묻힐 묘지도 구하지 못했다. 대통령 암살범이라는 주홍글자 때문이었다. 결국 시신 운구는 형 로버트와 현장에 나온 취재진이 맡았고, 장례 집전은 은퇴한 사제가 발 벗고 나섰다. 그리고 그가 묻힐 묘지는 지인이 주선해 줬다. 온 국민의 애도 속에 묻힌 케네디와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올해로 케네디 암살은 52주년을 맞는다. 그러나 여전히 케네디 암살을 둘러싼 진실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워렌 리포트>의 결론 역시 의문투성이다. 그리고 케네디와 오스왈드의 죽음을 지켜본 이들은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다.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는 치료제는 다름 아닌 ‘진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