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따람공동체 강석찬 목사 |
올 해는 해방 70주년의 해이다. 윤동주 시인을 시론(時論)에 불러온 이유가 있다. 단순히 그의 70주기를 추모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기독교계를 그를 통해 반성하고자 한다. 1919년 3월1일 독립선언서가 선포되고,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독립만세운동의 정신은 대한민국 헌법에도 명시된 민족의 정신이 되었다. 이 민족사적 운동의 중심에 누가 있었나? 기독교인이 있었다. 목사도 있었다. 그들은 영웅은 아니지만, 존경받는 지도자였다. 당시 기독교인은 국민의 2%정도로, 현재의 20%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수였다. 그런데도 그때의 교회나 지도자들, 기독교는 세상에서 영향력이 있었다. 교회가 앞장서면 국민은 뒤를 따랐었다. 본받고자 한 것이다. 이것이 해방 이후 그리스도교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폭발적인 성장을 하게 된 한국기독교의 원동력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성빈(聖貧)을 본보였다. 성빈을 성직(聖職)의 본질로 믿고, 믿음대로 살았다. 존경받을 만 했고 신도들과 세상 사람들은 흠모했다.
대한민국이 한강의 기적을 이루며 산업화와 도시집중화로 변화하며 성장할 때, 한국교회도 외적으로 세계교회가 놀랄 정도로 부흥하고 성장했다. 그런데 오히려 세상에서의 영향력은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 왜 일까? 교회는 그 동안 세속적 가치로 판단하는 성공적인 목사를 찾았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를 부흥시키면 성공한 목사가 되고, 목사는 슬그머니 영웅을 목표로 삼고 영웅이 되었다. 영웅이 목표를 달성하여 성공하는 과정에서 저지른 사소한(?) 본받지 못할 잘못은, 영웅이니까 그 정도는 눈감아줄 수 있다고 했다. 문제는 목사영웅의 삶이 본받을만하지 못하니, 세상이 교회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는데 있다. 필요할 때는 영웅을 요구하고,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 할지 모르나, 세상이란 원래 그랬다.
예수님은 영웅이 아니다. 알렉산더 대왕, 시저, 칭기즈칸이 아니다. 예루살렘을 향할 때도 섬김의 본을 보이려 어린 나귀를 탔다. 영웅의 나라는 유적으로만 남았으나, 성빈을 본보이신 예수님의 나라는 영원하다. 이제 신도들은 영웅을 원하지 않는다, 본받을만한 성직자를 찾는다. 아니, 그래야 한다. 없으면? 교회를 떠나게 된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이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살다가 간 시인이 더욱 그립다.
위 글은 기독교연합신문에 3월15일자로 실리기도 했다. 필자가 보내와 해당글을 게재한다.
위 글은 기독교연합신문에 3월15일자로 실리기도 했다. 필자가 보내와 해당글을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