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모험을 감행하다

김종문의 필그림소나타 2

그 후로 1999년 강원동계아시안게임 개막식음악, 제80회 인천전국체전, 새천년자정행사,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삼척동굴엑스포, 경북도민체전, 2003년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게임의 개막식 등 많은 국내외 행사의 음악을 작곡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던 중 부산아시안게임 개막식을 준비하며 전자바이올린 솔리스트로 초대되었던 김신형 집사님(필그림앙상블 창립자)을 만나게 되었다.
 
김신형 집사님과는 사실 전부터 방송국이나 녹음실에서 가끔 마주치기는 했지만 서로에 대해 잘 몰랐는데, 아시안게임 음악 녹음 일로 스튜디오에서 종종 마주쳤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SBS 방송국에 신설된 프로에서 같이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 때에도 녹음관계로 스튜디오에 몇 차례 마주쳤다. 이렇게 마주칠때마다 김신형 집사님이 내게 뭔가를 이야기하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방송음악편집 일로 정신이 없어서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신형 집사님이 내게 조심스럽게 말하기를, 자신이 필그림앙상블이라는 선교 연주 팀을 하고 있는데 같이 해 보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사실 중학교 때 잠시 교회에 나가고 오래 동안 방황 끝에 교회에 다시 나간 후, 나는 줄 곧 ‘하나님께서는 왜 나를 다시 부르셨을까?’ 라는 물음을 가지고 있었다. 분명히 나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실 것이다라는 막연한 믿음은 있었지만 교회생활을 하면서 몇 년이 지나도 실제로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고 그저 집과 교회를 오가는 반복된 생활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는데 주제가 전도였다. 강사로 오신 장로님께서 전도 많이 하자고 권면하시다가 각자 몇 명씩이나 전도 할 건지 욕심껏 외쳐보라는 말에 나는 무심코 삼백만 명을 전도하겠다고 외쳤다. 그리고 바로 실소를 하며 후회가 되었다. 욕심을 내도 너무 냈구나. 지금 현재 내가 만나는 사람들 모두 합쳐도 몇 백 명도 안 될 텐데 삼백만 명은 무슨 수로 만나고 또 거기다가 전도까지 하려면 도대체 어떻게 할 수 있는 건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왕 말을 내뱉은 이상 하나님을 믿어 보자는 식으로 집에 돌아와 A4용지 몇 장에다 삼백만 명이라고 큼지막하게 써서 냉장고문과 현관문, 화장대 등에 붙이고 눈에 보일 때마다 속으로 삼백만 명 전도를 다짐하며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몇 달간 하고 있다가 김신형집사님으로부터 필그림앙상블이라는 팀을 같이 해 보자는 제의를 받자 귀가 솔깃해 졌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전도의 기회가 아닐까 라는 생각과 함께 이 팀을 잘 성장시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며 복음의 메시지를 담아 전도한다면 삼백만 명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그래서 팀의 구성은 어떻게 되고 무슨 연주를 주로 하느냐 하고 물었더니 바이올린이 3명이고 비올라가 1명, 첼로와 피아노, 그리고 성악 소프라노까지 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난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고작 일렉 기타와 밴드음악인데 지금 이야기하는 필그림앙상블은 완전 클래식음악 연주 팀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도무지 자신이 없어서 하나님께 바로 따지듯 투덜거렸다. ‘하나님! 팀을 주신 것은 감사한데 어째서 저와 아무 관계가 없는 클래식 연주 팀을 주시나요? 혹시 밴드를 주시면 제가 어찌 해볼 수 가 있을 텐데 지금까지 클래식이라고는 전혀 배워 보지도 못했는데 이런 팀을 주시면 어떻게 합니까?’ 나는 망설였다. 과연 이 팀을 할 것이냐. 만약에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중대한 결심을 해야 했다. 지금까지 내가 알던 것 과는 정반대의 음악을 한다는 것은 커다란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을 생각했다. 왜 이것을 내게 주시는지… 그러자 곧 이런 깨달음이 왔다. 이 세상에 가장 오랫동안 가장 골고루 널리 퍼져 있는 형태의 음악은 클래식음악이다. 그러니 전 세계를 향하여 전도를 하려면 마땅히 클래식 음악과 함께 대중적인 취향을 알고 있는 내가 합쳐져야 할 것 아닌가? 그래야만 누구나 알아 듣기 쉽고 친숙한 음악으로 고급스러움까지 부여 받을 수 있고 그럴 때에 비로소 삼백만 명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전도도 가능하지 않겠나? 

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에 이런 식으로 응답해 주시는 것으로 확신했다. 비록 음악의 형태는 전혀 내가 모르는 것이지만 이젠 무작정 하나님만 믿고 따라 가 보기로 했다. 그래서 김신형집사님의 제의에 흔쾌히 승낙을 하고 그 때부터 필그림앙상블의 연주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필그림앙상블의 연주에 바로 참여하지는 못하고 2003년 초반부터 8개월 정도를 그저 따라다니기만 하며 음향관계 쪽의 일만 돕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일렉기타 연주뿐이라서 덜컥 클래식 악기들과 섞일 수가 없었다. 작전도 잘 짜고 편곡도 잘 해야만 무리 없이 합류를 할 텐데 도무지 합류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연주할 기회를 준비하고 있는 때에 어느 날 팀원 중에서 한 친구가 자기가 아는 성악가 전도사님이 우리 팀을 태국의 선교지에서 열리는 음악제에 소개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외국에 가게 되나? 하고 기대 속에 흥분하며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 곳에 초청된 사람은 모두 자비로 와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곧 실망하고 말았다. 현실적으로 우리 팀은 아무런 재정도 없었고 선교에 대해 잘 모르던 나는 그렇게 초청을 하면서 경비에 대해 하나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비용의 절반이라도 그 쪽에서 준비 할 테니 나머지는 알아서 해 달란다면 모를까 그 때의 내 상식으로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어쨌든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단원들은 마치 가는 것이 확실 한 것처럼 생각하고 어떻게 던지 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팀의 재정이 전혀 없었으므로 우선 부모님께 타서 가자는 의견이 나왔다. 나와 김신형집사님을 제외한 나머지 단원들은 그 때 당시 고등학교 3학년부터 대학생 등,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나는 그 의견이 도무지 탐탁치가 않았다. 왜냐하면 음악을 전공시키신 부모님들은 이미 많은 비용을 들여서 교육을 시키셨고 또 신앙을 가지고 계신 부모님들이긴 하지만 명분이 선교라고 해서 그 때마다 별도의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면 아마도 조금씩은 불편한 마음이 들지 않을까 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단원들에게 마지막으로 가야 할 건지를 묻자 모두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만 바라보는데 마치 ‘우리 어떻게 해서든 지 꼭 가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눈들을 보니 나도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어서 ‘그럼 내가 우선 여행에 드는 비용을 카드로 결재할 테니 부모님들에게 손 벌리지 말고 팀과 함께 나중에 벌어서 갚도록 해라’ 라고 하고 태국으로 가는 것으로 결정을 하였다. 그리하여 내가 합류한 후로 첫 해외연주이자 필그림앙상블과 나의 첫 무대가 될 태국연주여행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러한 모든 사정을 안고 어찌되었든 우리는 태국선교지로 향하는 연주여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기타연주자인 나를 비롯하여 방송국 오케스트라의 단원인 바이올린의 김신형집사, 오케스트라단원인 첼로의 이운주, 대학생이던 바이올린 김영인, 첼로 이윤정, 피아노 박계정, 소프라노 김수진, 고등학생이던 바이올린 김숙연 등, 그 사이 단원 한 명이 더 불어나서 태국여행길에 오른 단원은 모두 8명이 되었다. 필그림앙상블은 태국의 북부에 있는 치앙라이의 산을 향해 출발하였다. 그 때  8명의 개인 스케쥴을 조정하느라 땀깨나 흘렸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나와 김신형집사는 맡고 있던 방송일 때문에 단원들을 하루 먼저 보내 놓고 방송으로 밤을 꼬박 새운 우리는 연주 당일 아침에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비행기가 직행편이 없었으므로 방콕에서 비행기를 갈아 타고 치앙라이에 도착하자 현지의 선교사님이 대기하고 계시다가 우리를 맞아주셨는데 인사를 제대로 할 겨를도 없이 급히 차를 몰아 연주시간에 맞추기 위하여 황급히 차를 몰기 시작했다. 머리를 자동차 지붕에 몇 번을 들이 받은 끝에 시간에 맞춰 간신히 도착하게 되었다. 도착하자마자 악기를 주섬주섬 챙겨 미리 준비 중이던 단원들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대나무를 쪼개어 발을 엮듯이 이어 만든 무대에 올라서 가만히 앞을 살펴 보니 앞에는 많은 현지의 산지 족들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연주가 시작되자 우리는 예상치 못한 문제에 부딪혔다. 공기 중에 습도가 너무 높아 단원들의 악기에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한 것이다. 바이올린 같은 현악기는 습도에 매운 민감한 악기라서 참으로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단원들은 아무런 동요 없이 웃는 얼굴로 잘 해 나가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같이 맞춰보는 무대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우리 팀은 모든 악보를 외우고 악보 없이 연주하기 때문에 아직 악보를 미처 못 외운 나는 몰래 악보를 보고 하느라 더욱 정신이 없었다.

연주가 한창 진행되며 분위기는 무르익어 가는데 연주를 하는 동안 나는 여러 궁금증이 들었다. 우리들 앞에서 관람하고 있는 현지의 산 족들은 우리말을 모를 텐데 우리의 노래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바이올린이나 첼로 같은 악기도 친숙하지 않다고 하고 심지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이런 연주를 어떻게 받아 들일까? 과연 우리의 연주가 이 분들에게 은혜롭게 들려질까? 저 분들이 예의상 그냥 봐주는 것 아닐까? 초보 찬양 연주자인 나는 계속 이러한 궁금증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정신 없이 연주를 마치고 내려 오자 많은 박수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왠지 창피했다. 박수 받을 만큼 잘 한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를 격려하는 듯한 박수는 크고 오래 계속되었다.

한 시간여에 걸친 우리의 연주가 끝나고 현지인들이 정성껏 준비한 마을간 찬양대회가 열렸다. 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 보았다. 과연 저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 뭐 좀 할 줄 아는 것이 있으려나? 과연 음악을 알고 있을까? 찬양도 할 수 있을까? 그들의 차림새를 보니 전통복장을 하고 있는 것이 왠지 초라해 보이기도 하고 뭔가 많이 부족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윽고 찬양이 시작되고 아기를 업은 아낙네와 초로의 노인, 동네 아이들까지 나와 여러 팀이 찬양을 하는데 나는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저렇게 보 잘 것 없어 보이는 그들의 찬양은 내가 그 때까지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훌륭한 화성과 목소리를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순간 부끄러움을 느끼며 나의 오만을 깊이 반성했다.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우리나라 분들이 그 동안 해외에 나가서 적절치 못한 행동으로 좋지 못한 소리를 들을 때도 많았고 부끄러운 경우를 당한 경우도 여러 차례 들었었는데 나는 그 때마다 철 없는 사람들이 밖에 나가서 나라 망신시킨다고 속으로 탓하곤 했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렇게 내가 손가락질 하던 사람이 바로 나였고 그렇게 비웃음 당하던 자가 지금의 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살아 가는 환경이 열악할 수도 있고 조금 불편할 수 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본성과 문화가 열악한 것은 분명코 아니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렇게 밤은 깊어 가고 모든 행사가 끝났다. 현지의 선교사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너무 좋은 시간이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러면서 당신의 선교에 대한 비전과 태국의 사정을 우리가 알기 쉽게 설명해 주시며 또 어떻게 이 곳에 와서 사역을 하게 되셨는지 지금까지 어떠한 사역을 하셨는지를 알려주셨다. 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아직도 아까 무대에서의 궁금증이 머리 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과연 우리의 음악을 들었던 산지 족 분들 중에 은혜를 받은 분이 계셨을까?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과연 그럴 수가 있을까? 나 자신조차도 허둥대며 연주를 해 좋은 연주라 생각하지 않는데, 그런 연주를 듣고도 감동이될 수 있을까?

나는 계속 머리 속이 복잡했다. 그러는 중에 선교사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그 동안 이 곳에 와서 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많은 현지인들을 전도하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건강도 안 좋아지고 너무 힘든 일이 많아서 한국으로 되돌아갈 마음이었는데, 오늘 필그림앙상블의 연주를 들으며 너무도 큰 은혜를 받고 새 힘을 얻었습니다. 앞으로 십 년쯤은 끄덕 없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 필그림앙상블 8명을 어렵게 이 곳에 오게 하셨는지… 우리 앞에 앉아 있던 1,000여명의 현지인들이 어떠한 은혜를 받았을 지 알 수는 없지만 이 곳의 선교사님께서 새 힘을 얻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한 분의 선교사님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 우리를 한국에서부터 이 곳까지 발걸음을 옮기게 하셨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그 동안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라는 이야기를 교회 안팎에서 많이 들어 왔지만 어떠한 경우에 해당되는 말인 지 조금 헷갈려 했는데, 지금 그 이야기가 나에게는 완전한 말씀으로 다가와 나의 생각과 진로를 돌리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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