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돈 교수 진정한 감리교 운동 연구 심포지엄서 발제
1. 현대 한국사회의 종교성
1) 성장하는 종교에 대한 관심
한국사회에서 종교인구의 현황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소위 ‘인구 센서스(Census)’라고 하는 인구주택 총조사를 통한 것이다. 매 10년마다 전 가구를 방문하여 직접 조사하게 되는 전수조사로서 종교에 대한 질문도 포함이 되어 있어 가장 근접한 종교인구현황을 알 수 있다. 대개 각 종교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종교인구의 수는 개신교도 포함이 되지만 항상 부풀려지기 마련이기에 정확한 숫자 파악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 가구를 대상으로 하는 전수조사가 부분적인 오류가 배제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가장 정확한 조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05년도에 이루어진 이 조사에 의하면, 개신교는 불교, 천주교를 포함한 대한민국 3대종교 중에서 지난 10년간 유일하게 마이너스 성장을 하였다. 2005년 11월 1일을 기준으로 하여 10년 전인 1995년도와 비교해볼 때 개신교는 1995년 876만 명으로 인구 구성비에서 19.7%였는데 2005년도에 861만 1000명으로 절대적 인구에서 14만 4000명이 줄어들고 1.6%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이러므로 현재 개신교는 인구 구성비에서 18.3%를 차지하고 있다. 이에 비해 불교는 인구 구성비에서는 23.2%에서 22.8%로 0.5%로 감소하기는 했으나, 절대숫자에 있어서는 1072만 6000명으로 10년 전에 비해 40만 5000명이 증가하였으며, 천주교는 놀랍게도 295만여 명에서 514만여 명으로 219만 5000명이 증가하여 74.4%라는 경이로운 성장을 기록하였다. 이로써 현재 천주교는 10년 전 인구 구성비 6.6% 수준에서 10.9%로 급하게 성장하게 된 것이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전도에 어려운 사회적 환경이나 현실적으로 줄어들고 있는 교인들의 숫자로 인해서 대략 성장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막상 실제적인 숫자로 확인해 볼 때 이러한 우려는 현실이 되어 심각하게 다가왔다. 무엇보다도 불교나 천주교의 경우는 성장을 하였는데 반하여 개신교만이 마이너스 성장을 하였다는 사실에 상당한 충격이 되었음이 사실이다. 특히 천주교의 경이로운 성장은 이 부분에 있어서 종교사회학적인 분석이 필요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한 종교의 선교적 전략에 따른 성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급격한 변화이기도 하고 더군다나 양적으로도 상당히 커다란 성장이기도 하기 때문에 사회적 환경이나 현대인들의 종교성에 비추어서 살펴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또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 현대인들의 종교성을 살펴 볼 수 있다면 큰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또 중요하게 볼 부분이 있다. 그것은 이 기간에 이루어진 종교인구의 증가이다. 지난 10년간, 즉 1995년부터 2005년 사이 종교인구는 50.7%에서 53.1%로 2.4% 증가하였고 절대인구로 237만 명이 증가하였다. 보통 현대에 이르면 사회가 세속화가 일어나고 그 결과로 종교에 대한 사람들이 참여나 관심이 줄어들 것으로 보았다. 특히 베버는 개인적·사회적 합리화의 증대로 인해서 전통종교들의 사회적 영향력이 줄어들고 종교는 사사화의 경향을 갖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세상의 탈주술화(disenchantment of the world)'를 예견했었다.
베버의 이러한 예견은 현대사회로 들어오면서 현실화되는 것으로 보였다. 실제적으로 유럽에서는 종교인구의 감소로 인하여 교회가 일반 음식점이나 유흥업소로 팔려가기도 하고 예배 보다는 음악회나 다른 용도로 더 많이 사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교구제에 기본 되어진 독일의 루터교회의 경우 재적인원 2000~3000 명중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인원은 30~50명 정도밖에 안 되고 있다. 이러한 형편이기에 과거의 영광 가운데 지어진 웅장한 교회들은 유지가 어렵게 되고 휴가철이나 난방비가 많이 나는 겨울에는 임시휴업을 하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모습 가운데 세속화이론은 그 정당성을 인정 받는듯 했다.
그러나 최근의 종교사회학계에서는 이러한 세속화 이론에 근거한 ‘종교 이후기’라는 테제가 잘못된 이해에서 출발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입장이 ‘탈세속화론’이라고 할 수 있다. 탈세속화론의 기본적인 입장은 현재의 현상이 종교의 형태적 변화가 일어난 것이지 종교자체의 도태나 소멸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전통교회에 참석하는 인원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바로 사회적 종교인구의 감소로 볼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실제적으로 서구사회에서는 교회를 떠난 많은 사람들이 뉴에이지 운동이나 신흥종교, 또는 동양의 신비종교를 찾아가고 있고 심지어 이슬람으로 많이들 귀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는 예배의 참석보다는 교회에서 하는 프로그램이나 교회 주도의 사회운동이나 평신도 단체의 활동에만 참석하는 인원이 늘어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예배 참석 인원의 감소가 곧바로 종교인구의 감소로 볼 수 없으며 단지 이들이 비교회화(entkirchlicht)된 것으로 볼 수 있다.(Daiber, 1996: 128; 조성돈, 2004: 31)
즉 이러한 결과가 보여주는 것은 현대인들이 아직도 종교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종교적이며 초월성과 영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극도로 합리화되어지고 자연과학의 혜택으로 지극히 이성적으로 되어졌을 것 같은 이들이지만 이들 역시 종교를 찾는 실존임을 보여준 것이다. 이것이 현대인들의 종교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변함이 없는 인간의 본성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종교에 귀속된 사람들이 종교성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냐이다.
2) 종교적 정체성과 현대인이 추구하는 영성
2006년도에 진행되었던 목회사회학연구소의 연구에 따르면 현대인들의 종교성은 이전의 종교성과는 좀 구별되는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연구는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한 사람에 대한 심층인터뷰에 터하고 있다. 이 인터뷰는 서울에 있는 한 성당의 도움으로 10명의 개종자를 집담회 형식으로 진행되기도 하고, 이중 3명에 대한 일대일 심층인터뷰, 그리고 따로 4명의 심층인터뷰로 총 14명의 면접조사로 이루어졌다. 이 연구는 위에서 언급되어진 인구주택총조사의 결과에 대한 연구에서 시작하여 종교인구가 늘어난 것, 그리고 가톨릭이 급성장한 것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있게 추적을 하였다. 특히 심층인터뷰라는 방법을 통하여서 개종의 현실보다 각 개인들이가지고 있는 상황과 주체적 인식과 변화 과정을 쫒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종교성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종교성이 개종의 과정에서 어떠한 영향력을 미쳤는지를 살펴본 것이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결론적으로 개종자들을 통해본 한국인들의 종교성은 다음 세 가지 요약된다. 첫째는 종교인들이 정체성이 약하다는 것이다. 이번 연구에서 면접해본 사람들의 대다수가 개종과정에서 별다른 고민 없이 개종하였다고 증언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천주교나 개신교나 형제 종교이며 두 종교는 단지 ‘하나님’과 ‘하느님’의 차이 밖에 없다는 증언도 있었다. 이 부분은 이번 연구에서 상당히 신중하게 다루어진 면인데 종교를 갖거나 개종을 하는데 있어서 커다란 고민이나 갈등이 없었다는 것은 결구 현대인들에게 종교가 깊은 실존적 차원의 결단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사소하고 삶에 있어서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곧 종교 정체성의 깊이가 이들의 삶 가운데서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는 한국사회의 특징인 가족주의가 종교생활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이번 인터뷰에 응한 면접자들의 절반가량은 결혼 때문에 개종하였다는 것이다. 가족은 모두 한 종교를 믿어야한다는 시어머니의 권유에 의해서 개종을 하기도 하고 남편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개종을 하기도 한다. 심지어 상담을 해 주는 목사들조차도 가정의 화목이 우선이라고 이야기하고 시어머니의 뜻을 따르라고 권유해 주었다는 것이다. 즉 개인의 종교적 신념보다도 가족의 의사가 우선시되고 제사 등으로 나타나는 가족의례의 강권되는 분위기에서 가족주의에 의한 개종은 당연시 되고 있는 것 같다. 셋째는 현대사회에서 종교의 위치에 대한 질문이다. 다원주의 사회, 문화적 상대주의 태도 등이 융통성 있는 천주교 이미지와 선택적 친화력이 있다고 보았다. 다른 종교나 다른 문화에 대해서 폐쇄적인 개신교에 비해서 천주교가 개방적이라는 사실이 현대사회의 추세와 선택적 친화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결과를 보면 한국사회는 분명 종교에 대한 의식이나 생각이 많이 변화되었다. 그러한 것의 반영이 곧바로 천주교의 성장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특이한 사실은 천주교는 변하지 않았는데 시대가 변하여 천주교와 맞아 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천주교에서 적극적으로 시대적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을 했다거나, 아니면 시대를 이끌었기 때문에 그것이 현대인들의 종교적 심성과 맞닿았다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의 종교적 심성이 변화되어서 이제 천주교와 맞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종교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요약적으로 본다면 현대인들이 종교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사실이나 그 종교적 정체성에 있어서는 약해졌다는 것이다. 즉 종교에는 관심이 있으나 그것에 헌신하거나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의 영적인 관심이나 욕구를 충족해 줄 종교에 대한 관심이지 실존에 관한 문제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관심을 가진 현대인들은 결국 조직에 의해서 얽매이지 않을 수 있는 종교를 찾게 되었다. 그 결과가 한국에서는 천주교인 것이다. 천주교는 장엄한 예식을 통하여 영적 관심이나 욕구를 채워주면서도 개인들의 삶에 관여하거나 참견하지 않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지성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서 종교적 이미지만을 소화하고자 하는 현대인들에게 적합하게 보였다. 거기에 한국인 특유의 다원주의적인 심성에도 맞아 떨어져서 다양한 종교를 포용하고 한국 전례의 제사까지도 허용하고 있어서 종교로 인해서 마음에 갈등이 생겨나지 않도록 배려해 주는 측면이 있다. 거기에 개신교에서 항상 거리낌이 되었던 술과 담배의 문제에 있어서도 아무런 제약이 없기 때문에 남자들에게 더욱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최근 천주교의 급성장에는 바로 이러한 현대인들의 종교성과 그 실천이 그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2. 한국인의 신앙적 문법
한국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필자의 독일인 지도교수 다이버(Karl-Fritz Daiber)는 자신의 기도원 경험을 바탕으로 쓴 논문에서 한국인들의 특유한 영성을 지적한 적이 있다. 그가 기도원에 갔을 때 한국인들이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을 보니 일반의 종교적 상식으로 볼 때 완전히 엑스타시의 상황이었다. 일반적으로 엑스타시라고 하면 이성적 지배가 상실되어진 신접(神接)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보통 아프리칸 성도들에게서 우리가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제 삼자적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기도원의 통성기도는 집단 엑스타시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다이버 교수가 특별한 통찰력으로 지적한 것은 그렇게 신접한 수준의 집단 엑스타시 상황에서 기도를 인도하던 분이 종을 땡 치자 그 집단이 순간적으로 기도를 멈추고 이성의 상황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일반적이라고 할 수 없는 한국교회 특유의 독특한 영성인 것이 분명하다.
종교성이라고 하는 것은 지·정·의라는 세 가지 차원으로 접근되어지고 나타나게 되어있다. 이성이라고 하는 지적인 부분과 감정이라는 감성적 부분, 그리고 의지로 표현되어지는 행위적 차원이다. 이렇게 볼 때 분명 그가 지적한 한국교회 특유의 영성은 ‘지성에 의해서 지배(control)되어지는 감성적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다이버 교수의 지적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한국 개신교인들의 영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이끌 수 있는 정확한 틀이라고 본다.
1) 감성적 신앙형태의 태동
한국인들을 이야기할 때 감성적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인지 개신교인들 역시 상당히 감성적인 신앙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특히 ‘성령’에 대한 강조는 바로 이러한 신앙형태의 모습을 드러내는 단초라고 본다. 한국교회에서 몇 가지 언어적 오해가 있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이 성령이라는 단어도 여기에 들어간다. 우리는 보통 ‘성령 받았다’는 표현을 쓰는데 이것이 쓰이는 경우를 잘 살펴보면 감성적 터치(Touch)가 이루어진 경우들이 많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은혜 받았다’는 표현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필자의 경험에서 보면 ‘은혜 받았다’는 표현은 한국교회만의 특별한 언어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보통 외국에서는 ‘감동 받았다’고 표현하는 것들을 우리는 ‘은혜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예배가 끝난 뒤에 설교자에게 교인들이 나가면서 우리는 은혜 받았다고 인사를 하는데 외국인들의 경우는 감동 받았다고 이야기를 한다. 좀 더한다면 영적인 감동을 받았다고 하기도 한다. 우리 교인들의 사용을 보면 설교 중에나 예배 가운데 자신들이 눈물을 흘리거나 마음이 찡해지면 은혜 받았다고 한다. 심한 경우는 재밌는 설교자의 이야기를 듣고 실컷 웃고나서는 은혜 받았다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요즘 경배와 찬양을 중시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기존의 교회들이 드리고 있는 예배에는 성령의 운행하심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아마 그들이 이해하는 것은 기존의 예배에는 눈물이 없고, 울부짖음이 없고, 마음에 감동이 없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성령으로 이해하고 이러한 것이 없는 예배는 성령이 없는 죽은 예배라고 하는 것 같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성령 받았다’ 또는 ‘은혜 받았다’는 표현을 잘 못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본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교회는 은연중 종교성에 있어서 감성은 은혜이고 성령이라고 이해를 하고 그것만이 신성한 부분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성적 접근은 신성하지 못한 성령을 거스리는 일로 이해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신앙적 태도는 결국 반지성주의 내지는 비합리주의를 이 교회에 태동시킨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미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지·정·의라는 신앙의 삼요소가 감성만을 신성하게 여기는 풍토 안에서 깨어지고 이성적 사고와 합리적 삶의 태도 등을 배척하는 그래서 결국 감성주의적 신앙형태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싶다.
2) 개신교의 계층성 변동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이성적인 종교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 사회에서 이미지화 되어 있었다. 종교와 계층성의 연구에 의하면 그간 개신교는 한국사회에서 중·상층의 계층성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개신교는 그간 ‘엘리트 종교’라는 이미지로 이 사회에서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개신교는 근본적으로 이성적인 종교이다. 가톨릭의 예전 중심의 종교성에서 탈피하고자 하였던 것이 말씀 중심이라는 개신교를 낳은 것이다. 종교개혁가들은 제사장의 가운을 벗고 학사의 가운을 입음으로써 자신들을 예전을 집행하는 제사장의 반열이 아니라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선생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우리나라에 개신교가 들어와서도 특별히 행해진 사역은 교육이었다. 무엇보다도 한글교육에 치중했고 성도들이 말씀을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기독교 교육기관을 통해서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그들이 지난 세기 동안 한국사회를 이끌어 왔고 나라의 독립과 번영에 기여를 해온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 인재들을 통해서 한국교회는 엘리트 종교라는 이미지를 덧입게 되었고 그것이 한국교회 성장에 큰 영향력을 끼쳤던 것으로 보여진다.
즉 산업화 시기 때 아직 국민들의 민도(民度)가 낮을 때 이성적이고 엘리트화된 종교에 자신들이 편입되어짐으로 스스로를 중·상층으로 자리매김하기도 하고 그러한 바람을 투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이루어진 목회사회학연구소의 연구에 의하면 가톨릭이 오히려 중·상층 계층에 가깝게 다가가 있고 개신교는 중산층내지는 중·하층의 계층에 가깝게 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것은 개신교가 이성적 이미지를 많이 잃어버리고 감성적 종교화되어진 것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보여지며 특히 개신교인들의 비합리적인 삶의 태도에 의해서 나타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한국사회에서 남성종교성의 증가
이러한 변화는 종교인구의 변동에서도 읽을 수 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최근 십년간 개신교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는 동안 가톨릭은 74.4%라는 경이로운 성장을 이루었다. 그 속사정을 좀 더 살펴보면 이러한 성장의 배경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지난 10년간 종교인구는 50.7%에서 53.1%로 2.4% 증가하였다. 절대인구로 본다면 237만명으로 결코 적다고 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다. 천주교가 이 시기 219만 5천명이 증가했으니 단순 비교를 해 본다면 증가된 종교인구가 가톨릭으로 몰려갔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면으로 지난 이십년 동안에 남성종교인구의 증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난 이십년 동안 남성종교인구는 39.3%에서 49.7%로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어떻게 보면 종교인구의 증가는 그간 종교에서 멀리 있었던 남성들이 현대사회로 들어오면서 정신적 공허도 느끼고 삶의 여유도 가지게 되면서 종교화되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기 가톨릭의 남성성도의 숫자도 역시 급격하게 늘어났다. 지난 20년 동안 가톨릭의 남성성도가 2.5배 가량 늘었다고 하니까 이것도 어찌보면 가톨릭의 성장은 남성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데이터들을 종합하고 단순화해 본다면 종교인구의 증가는 남성종교인구의 증가와 가톨릭의 성장에 의한 것이고 이 가톨릭의 성장은 남성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동을 통해서 우리는 현대인들의 종교성을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인데 그것은 현대는 남성종교성이 점점 중요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4) 한국교회의 남성종교성과 여성종교성
그러면 남성종교성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남성들의 종교성은 여성들에 비해서 이성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들이 감성 중심의 종교성에 가깝다면 남성들은 이성에 의한 이해에 의해서 종교에 다가간다고 할 수 있다. 이성은 삶의 태도로 드러나게 되어 있고 이러한 이성에 의한 삶은 논리적 사고에 근거되어진 합리적 삶의 태도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종교의 한 단면을 지금 개신교회는 잃어버린 것이고 그 결과는 증가하고 있는 남성종교인구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간 한국에서 장로교회가 특별히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의 종교성과 친밀성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예를 들어서 남성종교성과 여성종교성이 함께 공존한 것이다. 과거 한국의 가정 안에는 두 가지 종교가 공존해 있었다. 사랑방에서는 남성들이 중심이 된 이성적 종교인 유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경전을 중시하고 행위를 존중했으며 명분을 중요한 가치로 삼았다. 그러나 뒷마당에 가보면 여성들이 정한수를 떠 놓고 천지신명께 가정의 안녕과 복을 빌고 있었다. 유교라고 하는 것은 그들 가운데서는 사소한 문제 하나를 놓고도 목숨을 걸고 싸우는 아주 엄격한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이 뒷마당에서 행해지는 미신과 같은 종교에 대해서 아무런 제재를 안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아니 오히려 이분화하여 여성들의 종교성을 인정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처음 들어오면서 이미 언급한 바가 있는 저자의 선생이신 다이버 교수는 이러한 종교적 성향에 비추어 한국에서 장로교회의 성장이 이러한 종교성에 근거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주일에는 엄숙한 말씀 중심의 예배가 남성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금요일에는 여성 중심의 감성적 기도회가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과거 사대부 집안에서 앞마당과 뒷마당에서 남성종교와 여성종교가 공존해 있듯이 말이다. 그의 지적은 어쩌면 일관되게 한국교회의 종교성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감성적 종교와 이성적 종교의 절묘한 조화인 것이다. 이것이 외국인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에는 아주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모습이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귀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에 이러한 균형이 무너진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오순절 중심의 성령운동과 경배와 찬양이라는 감성중심의 예배경향으로 주일오전예배와 금요일 기도회가 구분되지 않고 모두 감성중심의 종교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성경공부나 사경회와 같은 경우도 이성적 과정에 중심을 둔 교육과정이라기보다는 감성적 접촉에 중심을 둔 이야기나 축제로 변해간 것이다. 이렇게 한국교회 특유의 말씀중심, 경전중심의 전통이 사라지고 난 이후에 결국 교인들 사이의 기쁨은 유지되었으나 외부에 비쳐지기는 비이성적 종교집단으로 보이는 것이다.
5) 활력목회의 에너지
감성적 종교성은 결국 교회에 논리적 설득이나 합리적인 삶의 태도를 저해하는 결과를 낳았다. 감성적이라고 하는 것은 순간적이고 지속성을 가지기 힘들다. 감성적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계속되는 감성의 자극을 요구하기 때문에 차분한 논리적 설득이 설 자리를 잃게 만드는 것이다. 논리적 설득이 자리를 잃은 그곳에는 결국 합리성보다는 과격한 선동이 자리를 하게 되어 있다. 과격한 선동은 단순한 논리를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들며 그러한 것들은 대부분 또 합리적 태도보다는 과격한 극단적 태도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러한 결과들이 만들어 낸 것이 ‘활력형 목회’라고 할 수 있다. 활력형 목회는 지난 산업화시기에 한국교회에 자리를 잡은 형태이다. 그것은 당시의 산업화 시대다운 고성장 시기에 만들어진 한국교회의 특유의 성장모델이다. 그것은 성령이라는 내적 에너지와 은혜라고 하는 부의 축적이 교회적 상황 안에서 만들어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사회에서 급격히 성장하는 분위기를 경험하고 교회 안에서도 성령충만, 은혜충만의 비슷한 분위기를 경험하게 된다. 그들은 사회에서 정해진 목표를 향하여 일하고 수고하였는데 교회에 와서도 몇 명 전도의, 또는 교회건축의 목표를 향하여 일하여 수고할 수 있는 동일한 문화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당시 한국교회가 사람들을 끌어 들일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였다. 즉 사회에서 경험하는 활력 넘치는 산업화의 분위기와 교회의 성령충만의 활력이 동일한 삶과 신앙의 문법으로 경험되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한국교회의 목회 가운데 아직도 연결되고 있다. 외국 생활을 오래한 필자가 한국에 들어와서 경험하는 것은 한국교회는 반흥분상태를 유지하는 목회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년 내내 교회에서는 끊임없는 행사를 통하여 성도들이 흥분상태에서 내려오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 행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만 해도 송구영신예배, 춘계부흥회, 40일 새벽기도, 부활절행사, 여름 수련회, 총동원주일, 추수감사절, 종교개혁주간, 성탄절 등이 있고, 주일학교의 행사와 전도특공대, 기도특공대, 릴레이 기도회 등의 부서별 기관별 교육과 행사가 있다. 더군다나 한국교회나 노회차원의 동원형 행사나 특별한 행사까지 생각해 보면 모든 교회들은 끊임없는 행사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것이 다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바로 성도들이 감성적으로 흥분상태를 유지해가기 위한 교회의 장치들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 예배당에 들어가면 온 몸에 진동을 전하는 드럼소리와 여러 가지 전자악기들, 그리고 높은 볼륨의 찬양까지 합해지면 사람들은 그 흥분의 도가 수준 이상을 넘어서고 있다고 본다. 이것이 바로 활력목회인 것이다. 교회에 들어서면 사람들은 능력(Energy)을 얻어 살아있는 힘인 활력(活力)을 경험하고 그 힘으로 세상에 나가 소위 이 사회가 이야기하는 성공하는 사람이 되고자 힘써 일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산업화 시기 한국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라고 본다. 실제적으로 이러한 경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왔고 사회와 다르지 않음에 쉽게 적응하고 정착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 이것이 종교사회학에서 이야기하는 준거집단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기준이 되는 집단으로 그 집단을 통하여 세계를 볼 수 있는 관점과 자아를 이해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바로 교회는 산업화시기에 새로운 세계관과 정체성을 요구했던 사람들에게 훌륭한 준거집단의 역할을 감당하여 주었고 그러한 동일한 문법이 사람들로 교회로 찾아들게 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6) 감동과 흥분, 그리고 선동
이것은 산업화시기에 교회가 경험하였던 상당히 긍정적인 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적으로 1978, 1979, 1980년 한국교회는 매년 백만명의 인원이 늘어나는 경이로운 성장을 경험하였다. 현재 개신교인의 숫자가 861만이라고 집계가 되었는데 이 숫자에 비해서 한 해 백만명이 늘었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교회가 아직 그 때의 향수를 잊지 못하는 것이다. 사회는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데 교회는 그 변화를 실감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사회에서 산업화 시기는 이미 멀리 지나갔는데 한국교회는 그 당시의 그 활력목회의 탄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감성을 자극하고 흥분시켜 나가는 그러한 목회가 아직 교회에서 횡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감동과 흥분형 목회는 결국 선동으로까지 나아간다.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이야기보다는 감정에 호소하고 결단을 요구하는 메시지들이 교회에서 난무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의 대표적인 형태는 매년 교회에서 선정하는 표어들이다. 얼마 전 한 월간지의 의뢰로 500여 교회의 올해 교회 표어들을 분석한 적이 있다. 거기서 필자가 발견한 것은 선동에 가까운 표어형식들이다. 한해의 첫 주에 목사님의 선창에 맞추어 온 교우들이 한 손을 치켜들고 한 해의 전의(戰意)를 불태우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표어들이 많았다. 이러한 선동적 구호들의 특징은 뚜렷한 목표의 선정과 확연한 편 가르기를 나태내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구체적인 숫자를 명시한 전도목표를 제시한다든가 아니면 성전건축과 같은 형태의 단기적, 구체적 목표가 있는 것들이다. 또는 편 가르기의 형태인데 세상과 교회의 뚜렷한 구분을 보여주는 것이다. 세상에 살고 있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세상이 아니라 교회로만 모이기를 강조하는 구호들이 많다는 것이다.
7) 전도 이데올로기
이러한 것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전도에 대한 강조이다. 전도의 강조는 먼저 편 가르기에 있다. 세상에 자리하고 있는 사람들을 교회라는 울타리 안으로 모으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구원방주가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악의 장소인 세상에서 장소적 이전을 하여야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러한 이원론적 세계관은 결국 교회와 세상을 구별하고, 그것은 선과 악으로 구별되어지는 것이다. 좀 더 심한 경우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의 장소이고 세상은 사탄의 통치 영역으로 이해되어지고 이것이 더 나아가서는 사탄의 통치지역인 세상을 교회의 세력이 점령해야한다는 점령군적인 이해를 갖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또한 사람들로 예수를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그리고 구원 받은 사람과 구원 받지 못한 사람으로 구별하게 하고 구원 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모두 그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을 구원의 울타리가 되는 교회로 끌고 오는 것으로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전도의 이해는 개 교회를 부흥시켜 교회당을 채우고 넘치게 하려는 목회자들의 이해와 맞아 떨어지면서 더욱 강조되어지고 심화되어졌다. 이로서 점점 더 많은 ‘세상 등지고 십자가만 보는’ 성도들을 만들어 내고 그것이 ‘주님 뜻대로’ 사는 것으로 이해하게 만든 것이다. 교회는 점점 이러한 고립되어진 특수한 집단화를 이루면서 이러한 집단으로의 초대를 전도로 이해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와 교회라는 병립된 세계를 만들어 내었고 교인들은 이 세상에 나그네로 살면서 교회의 삶을 살기를 강요받은 것이다.
솔직히 이러한 논리는 과거 개신교가 소수였던 시절, 그리고 문화적으로 마이너리티였던 시절에 잘 맞는 것이었다. 많은 개신교인들은 그들의 신앙으로 인해서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눈에 보이는 핍박을 받았다. 적지 않은 교인들은 기독교를 믿는 순간부터 가족들로부터 고난 받을 각오를 하여야했고 제사 문제나 종교적 갈등 등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종교가 다른 가장(家長)으로부터 심한 핍박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하는 상황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 이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집단 내부의 결속력이었다. 사회로부터 받는 비난과 핍박을 함께 나누고 채워줄 수 있는 집단, 즉 공동체의 정신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이 교회가 소수로서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는지 모른다.
이것이 전도의 동기가 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 교인들의 세계관이고 정체성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부흥이라는 필요성을 가진 목회자들은 예의 감정에 호소하는 선동적 구호와 메시지로 이러한 전도관과 세계관을 이데올로기화한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그 표어분석에서도 이러한 결과는 고스란히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교회의 중요사역인 말씀(Kerygma), 예배(Liturgia), 교제(Koinonia), 봉사(Diakonia), 교육(Didache)보다도 전도나 부흥이라는 표어가 더 비중있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교회가 의도적으로 아니면 부지중에 교회의 그 중요한 5대 사역보다도 전도가 더 중요한 일인 것처럼 만들어 놓았고 그것을 성도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만든 것을 보여주는 결과라고 본다.
필자는 이것이 선동의 결과라고 본다. 실제적으로 표어들을 볼 것 같으면 100명, 300명, 500명 등의 구체적인 숫자가 단기적 목표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또는 ‘한 사람이 한 사람 전도’라는 마음에 와 닿는 구호가 외쳐지기도 한다. 좀 더 나아가서는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라는 구호로까지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현실에서 이 강권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심장하다고 본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여러 뜻들은 사라지고 강권이라는 수단만 교훈이 되어 나타나는 현실에서 우리는 상식 이상의 방법으로 사람들을 교회의 울타리 안으로 모으려 하고 있다. 이러한 전도형태 때문에 얼마나 많은 비신자들이 마음에 불편함을 느끼고 심지어 기독교에 대해서 반감을 갖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그러한 마음은 짐짓 외면하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하면서 우리의 전도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삶의 태도의 전형으로 보여지기에 강권하여 말리고 싶은 것이다.
8) 심정적 소수의식의 탈피
이제 이 사회에서 개신교는 결코 소수이거나 마이너리티라고 할 수 없다. 비록 감소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전 국민의 20% 가까운 숫자가 교인으로 응답하고 있고 사회에 미치는 그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20%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특히 매 주일 교회로 모이는 응집력이나 설교를 통하여 전달되어지는 가르침들, 그리고 그 가르침에 따라 살려고 하는 성실한 성도들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볼 때 개신교는 결코 소수이거나 약자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심정적 소수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거대한 세상에 맞서 있는 외로운 하나님의 일꾼들로 자신들을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 그들을 더욱 결속력 있게 만들고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살도록 만들지만 이 사회에서 볼 때는 제 역할을 다 못하는 비도덕적 집단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한다. 힘에 비례한 사회적 이바지가 없을 때 그 집단은 도덕적 결함이 있는 집단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이 사회에서 어떠한 일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 매 주일 교회로 모이고 있는 800만의 인구를 통해서, 그리고 그들에게 전달되어지는 교훈을 통해서 우리가 이 사회에서 어떠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교회를 통해서 사회가 변화되어지고 변화되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람들이 절망 가운데 바라보고 있는 이 대한민국에서 교회를 통해서 가능성이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3. 결론: 감성적 집단주의에서 합리적 민주시민으로
현재 한국사회의 중요한 화두 중에 하나는 시민사회이다. 시민사회라는 것이 시민운동을 하는 결사체로서의 의미도 있지만 시민이 중심이 되고 그들의 참여를 전제로 하는 민주사회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시민사회의 전제조건은 훈련되어진 개인이다. 시민사회는 어느 누구에 의한 또는 어느 특정한 집단에 의한 리더십이 형성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 참여하는 시민들의 의식이나 태도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 사회 안의 제 단체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각 단체들을 통해서 사람들은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참여를 하게 되고 또 그 단체를 통하여 교육받고 훈련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시민사회에서 중요한 역할로 자리매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참여의 통로로서 또는 훈련의 장으로서의 역할들이다. 교회와 같이 자발적 참여를 전제로 하고 의식 있는 행동을 제시할 수 있는 곳이 드물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식 가운데 교회는 교인들을 바른 민주시민으로서 이 사회에 참여하도록 독려해야하며 훈련해야한다. 교회의 울타리 안이 아니라 울타리 밖에서 그들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을 위해서 필요한 덕목들이 있다. 그것은 첫째 도덕이다. 공동의 삶을 형성하고 유지시켜 주기 위해서 개인의 욕망과 욕심을 제어하고 공동의 가치를 향하여 절제하고 나누는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둘째는 합리성이다. 시민사회의 특징은 대화에 있다. 시민사회의 합의의 과정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 대화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바로 그러한 대화를 위해 필요한 것이 대화를 만들어 갈 수 있는 합리성이다. 일방적 주장이나 선동이 아니라 설득과 취합을 통한 건전한 대화를 이끌어 갈 수 있는 합리성이 필요한 것이다. 셋째는 성찰이다. 시민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은 바로 합의되어진 가치라고 할 수 있다. 그 가치는 도덕의 기준일 수 있고 방향일 수 있으며 동시에 대화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 가치를 내재화하고 고민할 수 있는 성찰의 능력이 시민들에게 필요한 덕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도덕, 합리성, 성찰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중요한 덕목들이라고 본다. 이것이 교회가 중요하게 이 시민사회 안에서 감당할 수 있는 역할이고 동시에 가장 잘 할 수 있는 장점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 교회는 감성적 집단주의 안에 갇혀 있는 교인들을 풀어 합리적 민주시민으로 이 사회 안으로 파송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감성중심의 신앙문법에서 이성으로 지배되어지는 감성의 신앙문법으로 전환하고 합리성과 도덕으로, 그리고 성찰할 수 있는 능력으로 교인들을 훈련하여 이 시민사회로 그들을 파송하여야 할 것이다./ 조성돈 교수(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목회사회학연구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