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선 감독의 <이태원 살인사건>의 한 장면. ⓒ스틸컷 |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물론이다. 지난 8월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암살>은 친일부역자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 현대사의 아픔을 공론의 장으로 끌고 나왔다. 마침 1,000만 관객을 넘어선 시점이 광복절이어서 의미는 더욱 남달랐다. 이제 소개할 홍기선 감독의 <이태원 살인사건> 역시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온 작품이다.
작품의 소재는 ‘이태원 버거킹 살인사건’이다. 1997년 4월 버거킹 이태원점에서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다. 당시 홍익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고 조중필 씨가 이곳 화장실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발견된 것이다. 피해자는 목 뒤를 네 번, 심장을 두 번, 그리고 다시 목을 네 번 찔렸다. 미국인 아서 패터슨과 재미교포 에드워드 리가 용의자로 지목됐다. 이들은 서로에게 범행을 뒤집어 씌웠고, 사법당국은 두 사람 모두 처벌하지 못했다.
영화는 비극의 현장으로 관객들을 데리고 간다. 애초 사건은 싱겁게 끝나는 듯 보였다. 미군 범죄수사대(CID)는 피어슨(장근석)을 용의자로 지목하고, 그를 검찰에 넘긴다. 그의 범행을 입증해 줄 참고인도 검찰을 찾아왔다. 현장에 같이 있었던 알렉스(신승환)는 담당검사인 박대식 검사(정진영)에게 피어슨의 범행에 대한 구체적인 정황을 진술한다. 피어슨은 줄기차게 무죄를 주장하지만 받아들여질 것 같지 않다.
무난하게 보였던 이야기의 흐름은 부검결과가 나오면서 요동치기 시작한다. 부검의는 박 검사에게 피해자에게서 아무런 반항의 흔적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상흔이 위에서 아래로 났다는 점을 짚어준다. 즉, 가해자가 엄청난 완력으로 피해자를 한 번에 제압하고 칼로 내리 찍었다는 것이다. 부검결과만 놓고 본다면, 범인은 비교적 마른 체구의 피어슨보다는 거구의 알렉스가 유력했다. [실제로도 에드워드 리는 키 1m80㎝, 몸무게 105㎏이었고 아서 패터슨은 1m72㎝에 63㎏이었다.]
부검의의 소견이 나오기 무섭게 박 검사는 즉각 알렉스를 살인범으로 체포한다. 그러나 범죄 혐의 입증은 쉽지 않다. 무엇보다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으로 인해 애초부터 피고에 대한 강도 높은 수사가 어려웠다. 피고인 신문에서도 늘 SOFA가 걸림돌이다. 심리와 재판과정에서도 미군측 법무담당 장교가 배석해 있다. 법정에서도 피고들은 줄곧 서로가 범인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다 증인들의 증언도 오락가락이다. 박 검사는 앞으로가 험난하리라 예상했는지, 부검결과가 나오자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한다.
“절더러 CID 수사결과를 뒤집으란 말입니까?”
재판부는 검찰과 변호인측이 지리한 공방을 이어나가자 현장검증을 제안한다. 양측이 모두 합의하면서 현장검증은 성사된다. 그런데, 막상 현장검증을 해보니 박 검사의 기소의견에 결함이 있음이 드러난다. 변호인 측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부장판사 역시 변호인 측에 기우는 모습이다. 이러자 박 검사는 진실의 향방을 찾지 못하고 심하게 갈등한다.
미궁에 빠진 진실, 이번엔 드러날 수 있을까?
▲홍기선 감독의 <이태원 살인사건>의 한 장면. ⓒ스틸컷 |
사건은 알렉스에 대해 무기징역, 피어슨 징역 장기 1년 6월, 단기 1년을 선고하며 마무리되는 듯 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알렉스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피해자의 어머니는 “죽은 사람은 있는데 죽인 사람이 없냐”며 절규하고, 박 검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혹시 피어슨이 진짜 범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알렉스의 변호인 역시 의뢰인의 무죄를 확신하지 못한다.
영화는 이토록 묘한 여운을 남기며 끝을 맺는다. 죽은 사람은 있는데 죽인 사람은 오리무중이고, 누가 진범인지 헛갈린다. 더구나 진실은 자명하다고 배웠는데, 되려 진실을 찾는 여정 곳곳에 암초투성이다. 이런 기막힌 상황은 주인공인 박 검사는 물론 보는 이들의 마음마저 짓누른다.
그러나 이 영화는 영구미제로 남을 것만 같았던 ‘이태원 버거킹 살인사건’에 다시금 불을 댕기는데 크게 기여했다. 당시 검찰은 재미교포 에드워드 리의 단독범행으로 기소했다. 리는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1998년 4월 “여러 정황상 리의 단독 범행으로 보기 어렵다”며 사건을 파기 환송했다. 이후 서울고법은 그해 9월 무죄를 선고했고, 대법원은 1999년 9월 무죄 판결을 확정했다. 리는 2009년 SBS 시사고발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와의 인터뷰를 통해 재차 패터슨을 범인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한편, 또 다른 용의자인 패터슨은 징역 1년6월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98년 8.15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가 1999년 미국으로 도주했다. 담당 검사가 실수로 출국금지를 연장하지 않았고, 이 틈을 타 빠져나간 것이다. 영화 개봉 이후 그에 대한 재판 요구는 커졌고, 그가 미국으로 도주한 원인을 제공한 당국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도 들끓었다. 결국 검찰은 보강조사를 통해 그가 범인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법무부는 미국에 범죄인 인도를 청구하기에 이른다.
그가 송환된 과정은 영화만큼이나 극적이다. 현행법대로라면 그에 대한 공소시효는 2012년 4월2일이었다. 사건 발생일이 1997년 4월3일이니까 만 15년에서 하루 빠지는 날이었던 셈이다. 만에 하나 시효가 지나버렸다면 유족들의 마음은 황망하기 이를 데 없었을 것이다. 이러자 검찰은 극적인 카드를 꺼내 들었다. “범인이 형사처분을 면할 목적으로 국외에 있는 경우 그 기간 동안 공소시효가 정지된다”는 형사소송법 제253조 제3항을 근거로 그에 대한 시효를 연장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여론과 사법당국의 노력으로 아서 패터슨은 지난 9월23일(목) 한국으로 송환됐다. 그는 입국하면서 “난 언제나 에드워드 리가 죽인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 여전히 충격적이며 옳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패터슨이 한국에 온 바로 그날 밤, 우연히 케이블TV를 통해 <이태원 살인사건>을 다시 접했다. 영화를 본 뒤,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무런 잘못 없이 끔찍한 범죄로 생을 마감해야 했던 고 조중필 씨의 넋이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였다. 몇 차례고 위령제라도 하듯 그의 넋을 위로하는 기도를 한 뒤에야 잠을 이룰 수 있었다. 이 나라는 왜 이리도 억울한 죽음이 많을까?
수사를 맡은 검찰이 지금도 이승을 떠돌고 있을 고인의 넋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