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가 강연하고 있다. ⓒ베리타스 DB |
기독교계 역사학자이자 장로로서 국정 교과서 반대 입장을 표명하며, 다양한 강연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가 23일 기독교사단체 좋은교사운동(대표 신병중)이 주최하는 <기독교사를 위한 역사 특강- 해방기의 역사 쟁점과 기독교> 세미나 강단에 섰다.
이 교수는 지난 16일 일제 치하의 한국 교회에 관한 강의에 이어 이번 특강은 해방 이후 교단의 재정비와 신학교의 설립, 그리고 남한에 수립된 미군정과 교회와의 관계 등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해방 전 한국 교회는 교단이 일원화되어 있었다. 일본의 종교통합정책에 의해 조선의 교단은 모두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해방 이후에는 이러한 통합된 교단 조직을 그대로 살리고자 했다. 비록 일제에 의해 강제된 교단 통합이었지만,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서는 교파를 초월한 하나의 조직을 만드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국가 재건에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하나의 단일한 교단이 더 효과적이라 판단했기에 교단 지도자들은 기존 조직을 유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 북한을 제외한 남한의 교단 대회인 남부대회에서 감리교 지도자들이 감리교회 재건을 선언했고, 장로교 또한 환원 움직임을 노골화하면서 남부대회가 해체되었다.
국내에서 이러한 움직임이 보일 무렵, 국외에서는 외국 선교사들이 한국선교를 재개할 움직임을 보였다. 태평양전쟁 직후 강제 송환된 선교사들은 재입국을 준비했고, 외국의 해외선교부도 한국선교의 재개를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애비슨(O.R. Avison), 헐버트(H.B. Hulbert), 아펜젤러(Alice R. Appenzeller: H.G. 아펜젤러의 딸) 등 저명한 선교사들이 귀환했다.
해외의 선교 재개 움직임에 힘입어 국내에서는 신학교가 재건되기 시작했다. 신학교 재건 운동은 남한과 북한에서 서로 다른 형태로 진행되었다. 북한에서는 장로교 신학교로서 평양신학교가 재건되고, 감리교 신학교로서 성화신학교가 설립되는 한편, 남한에서는 장로교 신학교로서 장로회신학교와 조선신학교가 건립되고, 감리교 신학교로서 감리교신학교가 건립되었다.
이후 남한에서는 교회와 미군정이 우호적인 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는 미국 선교와 영어 구사에 가장 앞선 단체가 교회였을 뿐만 아니라, 미군정청 소속의 선교사와 선교사 후손들이 통역관으로 군정청에 한국인 고위관리를 임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맥아더 장군(Douglas MacArthur)은 기독교가 민주주의의 근원이며 반공의 보루라고 인식했는데, 그의 이러한 기독교관이 미군정에도 영향을 미쳐 결과적으로 남한 교회와 미군정이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데에 일조하게 된다.
이러한 근현대교회사의 흐름 속에는 큰 두 가지 쟁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식민잔재 청산이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해방 후에는 미군정이 남한을 통치했는데, 미군정은 능률적인 사회 통제를 위해 일제 시절 관료를 그대로 활용했고, 결국 일제 기득권자들이 해방 후에도 기득권을 유지하게 되었다. 또한, 친일파를 청산하기 위한 반민특위도 결국은 친일세력의 방해와 이승만 정권의 비협조로 인해 일 년도 되지 않아 해체되었다. 기독교 내 친일 인사는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모두 기소유예로 풀려나게 된 반면,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전개한 소수의 인물들은 치안유지법이나 불경죄로 체포·투옥되었다. 이처럼 해방 후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일은 미해결의 과제로 남게 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두 번째 쟁점은 남·북한 분단의 문제이다. 해방 후 교단 통합 노력의 일환으로서 시행된 남부대회는 북한을 제외한 남한만의 교단 대회였다. 또한 신학교를 재건하려는 노력도 북한과 남한에서 서로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교회도 결국은 남한교회에 국한된다. 이처럼 해방 후 한국교회의 움직임은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어 이원화된 상태로 진행되었다.
이처럼 해방 이후에도 한국 기독교의 역사는 풀지 못한 과제를 남긴 채로 흘러왔다. 이만열 교수는 이러한 과제를 잊지 않고 끊임없이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바로 후대의 젊은 교사들에게 남겨진 과제이자 숙명이라고 강조하며 강의를 마무리 지었다.
글/ 신경택(객원기자/연세대 신과대 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