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복음주의/배타주의(5)
이런 마당에 맥그래스가 말하는 진리란 어떤 것일까요? 그가 '진리가 희생당했다'고 했을 때, 그 희생의 책임을 '규범적 다원주의'에로만 돌릴 수 있을까요? 현대, 즉 여섯 개의 의문사가 동시에 떠야 하는 시대의 참 그림은 '무엇' 물음이 지배하던 고전 시대와 비교하면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지저분하고 불편합니다. 어느 때에도, 어느 곳을 찍어서도, 확정시킬 수 없습니다. '무엇' 물음과 그 대답은 초시공적으로 확정이지만, '왜' 물음과 그 대답은 시공간적으로 흔들립니다. 확정시키는 순간 무시간과 무공간이 되니 언제/어디서가 배제되기 때문입니다. 즉, 현대의 진리 그림은 명백하면서 깔끔하게 정리될 수 없습니다. 독점이 불가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불가한 독점을 주장한다면 독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라면 독재를 해야 한다는 것이 되고 맙니다. 의도하지 않았을 터인데 이렇게 되어 버립니다.
슬프게도, 정말 아이러니컬하게도, 필자의 결론은 단지 규범적 다원주의가 어떤 중요한 점에서 지적으로 공허하다는 것뿐만이 아니다. 다원주의 또한 정통 그리스도교가 늘 쉽게 (그리고 무비판적으로) 욕을 먹는 이유인 교조주의와 패권주의적 오류를 범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227)
교조주의와 패권주의의 오류를 지적합니다. 정통그리스도교까지 언급하면서 '교조주의,' '패권주의적 오류'를 다원주의도 저지르고 있다고 기염을 토합니다. 옳습니다. 맥그래스의 비판은 참으로 타당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복음주의 입장에 서 있는 맥그래스의 자기고백이기도 한 것으로 들립니다. 그런데 그가 비판하고 있는 교조주의와 패권주의는 다원성이라기보다는 일원성입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결국 맥그래스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서구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다원주의가 지니고 있는 일원성에 대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비판의 초점은 다원성이 아니라 일원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원성으로 말하자면 맥그래스 자신의 입장인 복음주의의 논리적 구조에도 바로 해당하지 않은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자가당착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비판이 타당한지 그 여부를 가늠하기 위해 이야기를 좀 더 해 봅시다. 이 대목에서 앞당겨 말하자면, 서구 그리스도교의 다원주의는 비서구 그리스도교, 비서구 비그리스도교와의 만남을 통해 일원성이 와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회자되고 있는 동서간의 만남이나 종교 간 대화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 있습니다. 맥그래스도 이를 주시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서로 다른 종교들이 만나서 공통적인 것들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일원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대화는 부적절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분명히 '대화'를 그러한 가정에서 해방시켜야 할 때가 되었다. 종교적인 설득이든 아니든, '우리는 모두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라는 식의 지적으로 천박하고 온정주의적인 관점을 가지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전적으로 가능하다. 폴 그리피스(Paul Griffiths)와 델마스 루이스(Delmas Lewis)가 적절한 제목을 단 논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전통의 세계관에 잘못된 요소가 있음을 - 이성적인 근거에서 - 믿으면서도 그 대표자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경의를 표한 것이 논리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가능하다.' 존 힉의 동질화 접근법과 달리... (232)
맥그래스에 따르면 존 힉은 종교들에 대하여 동질적으로 접근했습니다. 모든 것들이 달라 보여도 근본뿌리는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부적절합니다. 이미 고전형이상학의 허상에 대한 인식론적 비판을 거치고도 실존으로 내던져지는 현대에서 아직도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역에 대해 판단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착각하는 시대착오적 발상입니다. 물론 종교간 만남이라는 형식으로 아직도 이런 동질화를 꿈꾸는 부류들이 적지 않지만 이도 역시 거의 자기방식으로의 동질화일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맥그래스의 비판은 적절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종교간 만남은 이런 정도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이건 이미 지나간 시행착오의 추억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맥그래스는 이런 진전을 주목하지 않은 채 서구 그리스도교의 다원주의와 구별되는 방식으로 폴 그리피스와 델마스 루이스, 존 테일러에 대해 말합니다. 복음주의자들이 말하는 대화, 상호존중의 방식입니다. 타자가 잘못했다고 믿으면서도 그들을 존중하고 경의를 표하면서 대화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논리적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현실적으로 가능할까요? 이어지는 이야기를 봅시다. 그는 유대교 학자 제이콥 뉴스너의 발언을 끌어와 말합니다.
...명확하고 공공연한 차이점을 대면하지 않는 대화를 참된 대화라고 할 수 있는가? 무엇을 위해서 그러한 신앙 체계간의 토론은 그처럼 중대한 차이점을 간과하면서 일치점만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인가? (239)
물론 이 말씀은 그 자체로 지당합니다. 대화하면서 일치점, 유사성, 동질화의 가능성만 확인하고 만다면 이는 사실상 타자 안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로 끌어들이는 것일 뿐입니다. 타자의 자기화이면서도 대화인 줄로 착각하는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참된 대화가 차이점을 대면해야 한다는 주장은 지극히 타당합니다. 그리고 서구 그리스도교의 다원주의자들은 이를 받아들이고 반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인용구절과 바로 위의 인용구절을 이어봅시다. 어떤 이야기가 엮어지나요? 앞선 인용문에서 '잘못된 요소'와 바로 위 인용문에서 '차이점'이 서로 통합니다. 즉, 다른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다름은 그름이고 틀림입니다. 판단기준은 같음이었고 그 같음은 자기와의 같음이었으니 결국 기준은 자기였습니다. 이런 분석은 아래 문장에 의해 더욱 확실하게 옹호됩니다.
구원은 다양하게 이해될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근거를 둔다는 것이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244-45)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계시라는 기준에 입각할 때만 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바로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253)
여럿이 있으나 하나로 귀결되어야 하고, 다름을 인정하는 듯 같음만이 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실상 여럿과 하나는 서로 관계를 형성하지 않으며 다름은 같음에 의해 배제됩니다.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성경이 서로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동일시됩니다. 철저히 자기내적 순환논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안에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참되게 보이지만 바깥에 어떻게 보일지는 도대체 안중에 없어 보입니다. 자기와 같음이 옳음이라는 신념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맥그래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교가 지닌 차이는 다른 종교와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특수한 이해를 입증하는 가운데, 즉, 실체화시키는 가운데에서 나옵니다. 자기동일성에 뿌리를 둔 실체화입니다. 사실적 차원의 '무관계주의'입니다. 앞서 말한 '자체-실체-객관'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자체-실체'라는 것은 무관계를 가리키고, 관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 '객관'은 굳이 다른 유형들과의 비교에서 적용되는 표현에 불과합니다. 서로 '다름'이 건강한 '다름'으로 자리하려면 '관계'라는 틀이 있어야 하지만 복음주의는 관계 구도 안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관계를 배제한 채 '차이'를 내세우는 맥그라스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신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특수성을 선포한다. (245)
그리스도교 전통은 '하나님'에 대한 특수한 이해를 증거한다. 또한 이는 다른 종교들에서 나타나는 신성의 다양한 개념들과 융합될 수 없다. (246)
하나님에 대한 특수하고 독특한 그리스도교적 이해는 그분을 창조주로서 아는 것보다는 구속주로 아는 것과 관련된다. (246)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특수성'입니다. 앞서 살핀 대로 특수성이 전제되고 이를 토대로 보편성으로 선포됩니다. 특수성에 대한 강조는 자기의 같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더 반복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마지막 문장, '창조주로 아는 것보다 구속주로 아는 것과 관련된다'는 말을 애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창조는 보편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조주만을 붙잡으면 일원적 다원주의로 빠질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맥그래스는 창조주보다는 구원자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바탕으로 한 구속사역의 독특성을 강조합니다. 왜 맥그래스는 창조와 구원을 가르면서까지 차이와 특수성, 독특성과 고유성을 확보하려고 할까요? 중요한 것은 타자와 다른 자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의 같음만이 옳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에 대한 일반적 이해가 곧 구원과 연결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지식과 구원은 별개의 문제다. 그리스도교 외의 다른 종교에서도 하느님에 관해 무언가 알 수 있다고 인정한다고 해서 그리스도교적 의미에서의 '구원'이 그러한 종교들을 통해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247)
물론 안다고 하여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지식과 구원이 별개인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구원을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에 연관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대목이 앞서 논했던바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는 말에 대한 이야기를 되새길 곳입니다. 교회보다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교보다 성서가 더 크다고 했던 이야기 말입니다. 구원은 교회나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한 것이라고 한 것 말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을 교회 안에, 그리스도교 안에 가둘 수는 없습니다. 이건 신성모독이라고 누차 강조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구원이 종교와 엮이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 고리를 풀어야 할 때입니다. 구원의 주권을 하느님께 되돌려드려야 할 때입니다. 물론 우리가 되돌려 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하느님이 그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실 리는 없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