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포괄주의 (3): 슈바이처의 '그리스도교와 세계종교'
슈바이처는 대립항들을 기준으로 각 종교들을 그리스도교와 비교한 후, "세계종교들이란 어떤 것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본격적인 분석을 시작합니다. 우선 비교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바라문교와 불교입니다. 어떻게 판정하고 있을까요? 바라문교나 불교는 우주의 지혜를 구하는 맥락에서 세계와 인간 삶의 수수께끼의 해결책을 갖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비해 그리스도교는 "우리를 그러한 자의식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겸허로 이끈다"(46)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슈바이처가 보기에 동양의 저 두 종교들은 '자의식적 종교들'인데 비해 그리스도교는 이와 대비되는 '겸허, 겸손의 종교'입니다. 자의식은 자기가 그만큼 그렇게 하고 있다는 의식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윤리를 강조하더라도 자기의식이 그렇게 함께 간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겸손이란 윤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자기의식에 비중이 주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불교와 바라문교는 본래 언어의 윤리지만, 행위의 윤리"는 아닙니다. 사랑이냐, 정의냐 한 쪽을 택하여 결단하고 실천해야 하는데 조화에 우선적으로 초점을 맞추니 행위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브라만과 불교도는 지적 연민으로부터 연민의 '행위'로 이르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뒤에 나오는 일말의 반성은 주목할 만합니다. 말하자면 자의식과 겸손의 대비 뒷면에도 주목하는 치밀한 분석입니다. 동양종교에서는 자의식을 떠올리다보니 자기성찰에 이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그리스도교는 겸손과 사랑을 강조하는 분위기에서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놓쳤다는 것입니다. 예리한 통찰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통찰이 배타주의와도 구별되는 포괄주의 입장을 취하게 합니다. 다른 것 안에서도 참된 것을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하는 지혜 덕분에 구도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가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인도종교는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내면을 돌아보게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관심을 지나치게 소홀히 하고 있다. (52)
이러한 표현은 포괄주의에 이르러서 비로소 가능해졌습니다. 적어도 다른 종교를 종교로 인정해야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비교를 통한 우열관계로, 종내는 그리스도교를 비교우위로 설정하는 방식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배타주의 유형에서 타종교는 고려의 가치가 없으니 비교를 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아니, 비교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포괄주의 유형에서는 비교를 해야만 하고, 그래야만 그리스도교의 가치가 드러나며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논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논의를 거쳐 급기야 비교우위의 최고단계를 선언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참된 것이며 가장 가치 있는 것이다"(53).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는 최상급은 비교급의 특수한 형태입니다. 비교 없이 최상급은 나올 수 없습니다. 포괄주의자들 중에서도 슈바이처는 이 비교우위, 즉,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에 가장 주목하고 또 가장 강하게 주장합니다. 이러한 논의가 트뢸취에 가게 되면 꽤 달라지고 라너에 이르면 우월의 방식이 아주 세련되게 진행됩니다. 얼핏 들으면 우월의 뉘앙스를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인도 종교를 이야기하고서 슈바이처는 중국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왜 힌두교를 뒤로 뺐을까요? 여타 종교 중 힌두교는 그리스도교와 가장 유무상통한다고 슈바이처가 파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브라만교, 불교와 같은 선상에서 힌두교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형이상학적으로만 보더라도 힌두교는 실체주의를 채택하는 데 비해, 브라만교는 실체를 부정하는 세계관을 표방합니다. 세계관 자체가 공존 불가할 정도로 다릅니다. 이런 방식으로 슈바이처는 동양 종교들을 다루는데, 포괄주의 유형에 속한 슈바이처가 브라만교, 불교, 중국종교, 힌두교를 대하는 방식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포괄주의 유형에서 그리스도교를 100점으로 놓고서는 어떤 종교를 80점으로 평가하고 또 다른 종교를 20점으로 평가합니다. 당연하게도 80짜리와 20점짜리를 대하는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슈바이처는 각 종교를 놓고 몇 점을 주고 있는지요? 브라만교, 불교, 중국종교에 몇 점을 매기고 있을까요? 이 눈을 가지고 중국종교에 대한 슈바이처의 언급을 보십시오: "중국의 경건한 이들은 사상누각을 지었습니다"(58). 이걸 두 글자로 줄이면? '착각'입니다. 그런데도 슈바이처는 계속해서 다른 종교들을 평가합니다.
중국의 종교는 인도의 종교와 마찬가지로 먼 느낌이 든다. 중국의 종교는 통일적이고 자기폐쇄적이며 논리적인 세계인식이 되려 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노자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세계의 의미를 추구하는 행동으로서 자연과 조화하는 윤리만을 내세웠으며 모든 열정적인 형태의 사랑의 윤리를 거부했다. 그를 모범으로 본받는 가운데 현실을 고수하는 사상가들은 노자가 고정시킨 한계들을 고려하는 일 이외의 것을 할 수 없다.
'모든 열정적인 형태의 사랑의 윤리'는 그리스도교에 해당함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조화하는 윤리'는 '폐쇄적이며 논리적인 세계인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생기 있고 윤리적인 종교'는 '세계인식의 논리적인 결과'일 수 없습니다. 이는 '세상으로부터 획득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위로부터, 계시에 의해서 가능합니다. 하지만 계시만 가지고 다할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뒤에서 슈바이처는 이를 그리스도교의 과제로 남겨놓고 동양종교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 사유도 아울러 포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포괄주의 입장의 면모가 물씬 풍기는 대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눈으로, 슈바이처는 각 종교의 특징을 무엇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그 종교들로부터 그리스도교가 무엇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위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힌두교를 다루면서부터는 슈바이처의 어조가 달라집니다. 슈바이처가 보기에 다른 동양 종교들과 견줄 때 그리스도교가 지닌 대비적인 특징을 힌두교 역시 어느 정도 개연성 있게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논문을 참조하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힌두교가 그리스도교만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힌두교는 윤리적 일신론이 되려는 노력을 자체 내에 지니고 있는 다신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진전을 하지 못했다고 평가합니다. 외형적으로 다신론을 허용하기 때문에 힌두교는 그리스도교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헌데, 과연 그럴까요? 이것에 대해서는 다시 물을 일입니다. 다신교는 과연 윤리적이지 않은가요? 이건 어디까지나 일신론의 입장에서 보기에 그런 것 아닌가요?
초기 비교종교학에서 일신교가 다신교보다 우월하다는 이야기를 한참 하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논의를 개진한 이들 대부분이 그리스도교인들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이들에게 있어 비교종교학은 그리스도교의 가치를 내세우기 위한 일종의 도구였습니다. 그들에게 일신론은 다신론보다 당연히 우월한 것이었고, 슈바이처는 저들의 연구를 취하되 저 배경까지 성찰하지는 않았습니다. 다신론으로부터 일원론으로부터의 전환을 일종의 '진화'로 보는 관점을 저 시기의 종교학자, 신학자들은 암묵적으로 공유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현대의 맥락에서는 물음표에 붙여집니다. 다신론들이 이 신과 저 신 사이의 갈등을 불러오며, 이 신과 저 신을 모시는 이들의 전쟁을 일으키기 때문에 다신론의 열등함을 말하곤 하는데, 그렇다면 과연 일신론의 전환을 이룬 뒤에는 전쟁들이 덜 촉발되었습니까? 오히려 다른 종교들을 처단의 대상으로 보고 전쟁을 벌였고, 또 벌이고 있지는 않은지요? 현실은 덮어두고 논리적으로만 보더라도 다신론보다 일신론이 우월하다고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지, 더욱이 유일신론이 인류문명사에서 종교의 목적에 기여해왔는지 아니면 오히려 거슬러왔는지 솔직하게 성찰적으로 다시 살필 일입니다.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유대교와 이슬람교가 다 이 대목에서 해당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슈바이처가 역사를 되돌아보며 자기고백적인 방식으로 그리스도교의 현실 문제에 대하여 제기하는 고발은 결코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적인 국가들을 평화를 애호하도록 교육하는 것이 매우 충분치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리고 기독교가 전쟁 자체 속에서 매우 세속적이고 보기 흉한 성향을 가지고 사회화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성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로서 수행해왔던 것이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섬뜩한 방법으로 기독교는 예수의 정신에 불성실했던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설교하는 곳에서 우리는 이 슬픈 사실에 관해 아무 것도 부인하지 못하며 아무 것도 변명하지 못한다. 우리는 예수의 정신을 소유하는 것이 너무 쉽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너무 깊이 추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예수의 정신을 소유하기 위한 보다 진지한 노력이 경주되어야 하겠다. (78-79)
현실 그리스도교를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인정합니다. 배타주의가 될 수밖에 없어 보이는 복음주의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입니다. 사실상 무슨 유형이든지 최소한 이 정도의 자기성찰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반복해서 강조하지만 '자기라는 인간'에 대한 주제파악에서 시작해야 하고 그리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슈바이처는 그러한 현대적 성찰의 실마리를 잡기는 했습니다. 다만 시작일 뿐이었지만 말입니다. 하여튼 그렇게 그는 실상을 인정하고, 해야 할 일을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이러한 자정 노력이 하나님 나라를 향하는 견인차였음을 역사가 보여준다는 분석에 근거해서 이런 논의의 끝자락에서 슈바이처는 결론적으로 선언합니다. 그의 주장을 한 문장으로 추리면 어떻게 될까요? 이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다른 종교와 비교하여 윤리와 행동에서 우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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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다른 종교와 비교) 주관(=윤리와 행동) 선험(=우월)
포괄주의를 이루는 핵심요소인 대상, 주관, 선험이 그대로 확인됩니다. 우선 포괄주의의 지평인 비교의 터전이 '다른 종교와 비교하여'라는 방식으로 추려집니다. 우월성을 말해야 하니 이와 다른 열등한 것들이 등장해야 하고 전제되어야 하며 결국 비교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다른 종교들이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을 귀결시킬 판단 근거로서의 비교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대상'입니다. '윤리와 행동'은 자신의 주체적 표출방식입니다. 당연하게도 주관에 속합니다.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우월'하다는 판단은 사실상 다른 종교들을 모두 다 검토하고서 추려지는 판단이라기보다는 몇 개의 원칙과 기준을 가지고 살피고서는 내리는 판단이니 모든 대상을 다 경험한 것이라기보다는 경험가능성을 추정하는 방식으로 도출하는 선험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은 우월성인데 이를 대상과의 관계에서 주장하면서도 경험적인 일반화를 향한 추론이라기보다는 선험적으로, 즉, 일일이 모든 종교를 다 검토하고 평가하지는 못하고 그저 몇 개를 살피고서는 직관적으로 선언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대상-주관-선험이라는 요소가 얽히면서 명실공이 포괄주의의 입장을 엮어냅니다.
다음에 살펴보게 될 포괄주의의 다른 사례들과 견주더라도, 슈바이처가 말하는 '우월성'은 아직도 오리엔탈리즘의 분위기가 물씬 배어나는 전근대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문화제국주의적인 '우월성' 담론에 대해 현대적 성찰의 진도를 그에게 기대하기는 아직 일렀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다 시대의 산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말하는 우월성은 반드시 열등한 것을 필요로 합니다. 이렇게 보면 이 방식은 다른 종교의 '열등성'을 토대로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을 말한다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때문에 제목이 '그리스도교와 세계종교'일 수밖에 없습니다. 맥그래스가 단락 제목으로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논한 것과 견주어 볼 때 그 뉘앙스가 사뭇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배타주의 유형인 복음주의에서 보편성 확보는 잠재적인 선에 머물러있습니다. 아직 역사 속에서 확보되지 않았으며, 역사의 종말에서야 이루어낼 일입니다. 이에 반해 슈바이처에서는 보편성에 근거를 둔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이 먼저 설정되어 있습니다.
각 종교들의 현실이 아닌 이상을 보고 논한다는 슈바이처의 전략도 여기서 나옵니다. 현실을 놓고 보면 이 종교나 저 종교나 다 엉망이긴 마찬가지기 때문입니다. 우월성은 이미 완성된 형태로 설정이 되었기에 '선험'이며, 이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 '보편'입니다. 우월을 설정해야 하니 비교 '대상'이 필요합니다. 윤리, 행위의 눈으로 바라보니 이 종교는 이렇게, 저 종교는 저렇게 '열등'합니다. 비교의 방식이기는 하나, 비교를 통해서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준'은 '이미' 설정되어 있습니다. 100점이 이미 설정되어 있고 이 기준에 맞추어서 80점, 50점을 매기는 것입니다. 윤리 대 언어, 행위 대 논리처럼 특성을 서로 나누고 있기는 하나 사실상 앞항은 뒤의 항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윤리의 그림, 행위의 그림은 이미 완성 형태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이게 트뢸취에 이르면 조금 달라지고, 라너에 이르면 또 달라집니다. 그리스도교라는 이름에 주목하는 슈바이처, 트륄취와는 달리 라너는 '익명성'이라는 범주를 사용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교라는 이름은 부차적이며, 때문에 덜 공격적이고 덜 지배적이어 보입니다. 말하자면 점차로 다듬어져가는 것이지요. 하지만 여기서도 우월성은 포기되지 않습니다. 포괄이라는 말이 이미 포함하는 것과 포함되는 것 사이의 우열을 깔고 있습니다. 해서 배타주의의 교묘한 변형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