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조찬기도회, 그리고 이재철 목사의 세월호 유가족 ‘언터처블' 발언으로 교회는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도대체 왜 이런 발언들이 불거져 교회가 세상의 질타를 받아야 할까? 부산에서 로고스서원을 운영하는 김기현 목사는 자신이 한 마디로 ‘교회가 없다'고 진단한다. 즉 말만 있고 행동은 없다는 의미다. 김 목사는 "교회 안에서 먼저 하나님 나라가 구현되어야 한다"고 일갈한다. 김 목사의 동의를 얻어 전문을 싣는다. 편집자 주]
국가조찬기도회에서의 소강석목사의 설교에 이어, 목회자멘토링에서의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이재철 목사의 답변이 문제가 되고 이곳저곳에서 토론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목사의 발언을 실마리로 삼아 교회의 사회를 향한 정치적 발언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발언을 위한 전제 조건에 관해 말해 보렵니다.
목회자들의 정치적 발언에 관한 저의 최종 진술은 이것입니다. 교회가 없습니다. 교회 없는 목사만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교회라는 공동체적 실천은 없고, 목사 한 사람의 말만 있습니다. 말만 있고 행동은 없습니다. 증인이 아니라 기소하는 검사나 재판하는 판사 같아 보입니다. 때로 목사의 발언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정부의 잘못을 비판하는 용기가 있다고 해도, 반대로 정부의 잘못을 눈감고 아부성 발언을 하더라도, 그들의 발언에는 교회가 없습니다. 결국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서 스캇 맥나이트는 "하나님 나라는 교회다"라는 대담한 주장을 펼칩니다. 그것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비밀병기이자 알다가도 모를 모략이라는 것이지요. 그에 따르면, 지역 교회 안에서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드러나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맛볼 때, 교회가 세상과 같지 않을 때, 교회는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자 목표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왕국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Kingdom)'이 먼저 되지 않고서는 세상을 향한 일체의 발언과 행동은 속빈 강정과 같아서 허무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교회가 살아내지 못하는 복음을,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그 무슨 수로 증언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기에 스캇은 "통전적 구속의 사회적 차원은 무엇보다도 교회라고 불리는 사회적 현실 안에서 발견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먼저'라는 단어를 중간에 끼워넣어야 저 의미가 잘 전달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먼저 하나님 나라가 구현되어야 합니다.
맥나이트의 주장은 존 요더의 신학에 많이 기대고 있습니다. 그가 인용한 요더의 말은 곱씹어 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사회 안에서 근로자들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교회는 노동자들을 공정하게 대하는 첫 번째 고용주가 되어야 한다. 만약 보다 넓은 사회 안에서 우리가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이나 물질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교회는 그런 가능성이 가장 먼저 실현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Priestly Kingdom, 93쪽. 187쪽에서 재인용)
친절하기보다는 시니컬하면서도 날카로운 금자씨의 말, ‘너나 잘 하세요'를 자기 성찰적인 말로 바꾼다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나부터 잘 하자.' 고통 받는 노동자를 위해 성명서를 발표한다고 해도, 그 교회 안에 자신의 권리를 빼앗기고 부당하게 대우받는 부교역자나 사찰집사, 직원이 있다면, 야고보서의 말을 빌려 말합니다. "아, 어리석은 사람이며, 그대는 행함이 없는 발언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싶습니까?"(2:20) 그 자체로 죽은 믿음입니다.
자, 그러면 반문할 것입니다. 그럼 아예 아무 말도 하지 말자는 건가요? 아닙니다. 말할 때 하더라도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번역한 『국가에 대한 기독교의 증언』이라는 책에서 요더는 교회의 대사회적 활동은 ‘로비'가 아니라, ‘증언'이라고 했습니다. 증언이고자 한다면, 기독교 신앙의 확신에 기초해야 하고, 행동과 증언은 일치되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교회는 무언가 할 말이 있을 때에만 발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 사안에 발언할 것도, 모든 일에 책임 의식을 느끼고 나설 필요가 없습니다. 예컨대, 수감자를 위해 일하는 교회가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부나 사회에 발언할 도덕적 권리가 있습니다. 농촌과 농부를 위해 일하는 교회가 책임감은 갖고 발언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인권이나 무슬림과 관련된 발언에 적용하면 됩니다. 그 교회나 단체, 목회자가 평상시에 인권과 관련된 어떤 실천이나 공부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활동과 아무런 연관도 없으면서 나서서 입장을 개진하는 것은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최근에 할랄 식품 반대 운동과 관련해서, 외국인 노동자 사역을 하는 목사님은 현장 사역의 경험을 근거로 해서 그것이 무익하다는 말을 하더군요. 더 나아가 왜 그런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무슬림 등 타종교인이든, 동성애자이든 간에 그들을 향한 구체적인 사랑의 섬김과 나눔이 없으면서도 그들의 잘못과 약점을 파고들며, 그들의 행동과 존재 자체를 반대하고 부정하는 것은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묻던 율법사와 하등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 또한 우리의 이웃이라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사랑으로 돌보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왜 저들이 문제인가, 가 아니라 왜 저들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가, 가 우리의 고민이어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이재철 목사의 발언을 되짚어 보지요. 그분은 세월호 유가족들의 고통과 진실 규명 노력에 관해 슬픔을 당한 이와 함께 하고, 동참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어떤 이유에서든 슬픔을 당했다는 이유만으로 ‘언터처블한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답변했습니다. 사실, 저 발언 자체는 일체의 맥락을 생략하고 본다면 별 문제 없습니다.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이고, 상대화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리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타락했기에 문제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논점을 잠시 벗어나는 두 가지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과연 우상시되는가?'입니다. 잘라 말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죄인시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약자 안에 존재하는 일부의 우상적 모습에 대한 일갈은 날카로운데 강자와 부자 안에서 늘 보게 되는 우상적 모습에 별다른 말씀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헤셸은 구약의 예언자를 ‘악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작은 악에도 남들보다 더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크게 소리 지릅니다. 세월호 유가족에게서 일말의 우상적 모습을 발견하고 말씀하신 것이라면, 현 정부의 정책과 정치에 대해서는 분을 참지 못하고 매주 설교하셔야지 균형이 맞지 싶습니다.
정치적 발언의 전제로서의 공동체와 공동체의 실천이라는 요점으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나는 이 목사와 백주년 기념교회가 세월호 유가족과 관련해서 어떤 일을 하였는지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가능한 경우의 수를 모두 고려해서 말할 수밖에 없네요. 만약 교회와 목사가 그들의 아픔과 함께 하는 많은 일들을 지속적으로 해 왔다면, 그리고 그 와중에 세심히 살펴본 결과 신성불가침이자 불가촉의 행태가 있었고, 그것을 그 단체 관계자들에게 지적한 바가 있었고, 그럼에도 그것이 여전히 고쳐지지 않고 있던 차제에 질문을 받았고, 그렇게 대답한 경우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무런 활동이나 봉사가 없는 경우, 주변의 지인이나 언론, 그리고 본인의 가치관에 의해, 질문자의 말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툭 튀어나온 것이라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앞서 인용한 요더의 말처럼 메시아 콤플렉스처럼 모든 일, 모든 것에 답변을 해야 한다는 책임을 갖고 발언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함 없는 믿음에 다름 아닌, 그야말로 죽은 말이고 죽은 신앙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하지요. 그럴까요? 하나를 보면 하나만 압니다. 하나로 다른 아홉을 미리 재단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봅니다. 자기 판단에 대한 과신입니다.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지만, 판단을 미리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이재철 목사의 그간 삶의 여정과 사역, 인품을 이 한 가지 발언으로 모조리 부정하고 비판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분명히 말하건대,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이 목사의 말은 실망스럽습니다. 그렇다고 침소봉대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분이 이런 류의 발언을 계속 해왔다면 달라지겠지만 말입니다.
저는 "민족복음화와 남북통일"이라는 주제로 열린 한국복음주의신학회의 기독교 윤리학회에서 "교회가 복음이다"는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성경과 신학」 37권(2005), 325-49.) 그 요지는 간단합니다. 교회가 남북통일을 말하기 전에 교회부터 통일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통일된 모습을 선취하자는 겁니다. 이 글의 제목처럼, 교회부터 통일하자, 그래야 교회가 갈등과 증오의 분단 역사를 끝내고 한국 역사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름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는 목회자들은 교회와 사회의 모든 사안에 일일이 대꾸하거나 대응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교회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사역의 열매로 말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의 말은 이것입니다. 사회에 말하기 전에 교회에 먼저 말하자! 교회부터 먼저 하자! 온 세상이 알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