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골로새서 1장 24-29절)
설교문
유대인의 지혜서인 <탈무드>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나라의 왕에게 외동딸이 있었는데, 그 딸이 중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왕은 포고문을 내려 "누구든지 내 딸을 살려주는 자를 사위로 삼고, 나를 이어 왕이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에 신기한 물건을 가진 3형제가 살았는데, 첫째는 아주 멀리까지 볼 수 있는 망원경이 있었고, 둘째는 세상 어느 곳이라도 갈 수 있는 날으는 양탄자가 있었고, 셋째는 어떤 병에 걸려도 살릴 수 있는 마법의 사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망원경으로 먼 나라에 붙어있는 포고문을 읽고 동생들에게 가서 도와주러 가자고 합니다. 그리하여 형제들은 둘째의 날으는 양탄자를 타고 먼 나라의 왕궁으로 날아가서 셋째가 가지고 있던 마법의 사과를 주어 공주의 병은 깨끗하게 낫게 됩니다.
문제는 이때부터 생겼습니다. 삼형제는 자기가 없었으면 공주의 병은 고칠 수 없었노라고 주장하면서 서로 공주를 차지하기 위해서 다툼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맏형은 "내가 망원경으로 보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헛것이 아니냐"는 것이고, 둘째는 "내가 마법의 양탄자로 빨리 오지 않았으면 공주는 죽었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셋째는 "마법의 사과가 없었으면 어떻게 살겠느냐?"고 했습니다.
결국은 임금님은 사과를 준 셋째에게 딸을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망원경이나 양탄자는 그 주인들이 지금도 가지고 있지만, 셋째는 사과를 주었으므로 없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무엇을 해 줄 때에는 모든 것을 거기에 거는 자가 가장 존귀하다"는 것입니다.
베다니의 한 여인이 자신의 전 재산인 옥합을 깨트려 주님께 헌신함으로써 예수님을 기쁘시게 한 것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희생하는 자에게 하늘의 상이 있는 법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말하기를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고 했습니다.
바울은 본래 교회를 탄압하는데 선봉에 섰던, "죄인 중에 괴수"였습니다. 바울은 그런 자신을 오래 참으시고, 복음 전도자로 불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서 온 몸으로 헌신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헌신은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배고픔과 목마름과 매맞음과 조난과 투옥을 수없이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어떤 고난 앞에서도 좌절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같이 "죄인 중에 괴수" 같은 자가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는 감격 속에서, 어떤 고난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기꺼이 감당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미래에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며 그 모든 고난을 감내할 수 있었습니다. 즉 그에게는 장래에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얻을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견디기 힘든 고난도 감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다른 서신서에서도 여러 차례 고백한 바 있는 바울의 확신이었습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딤후 2:11-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6)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 올라갈 것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부족하지만,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영광을 바라보면서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서 헌신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는 말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머리와 몸의 관계, 즉 일체적 관계로 생각하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교회는 그의 '지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머리가 받는 고통을 몸이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받는 고난에 그 몸 된 교회가 동참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일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몸이 받는 고통을 머리가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수난은 곧 그리스도의 수난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직접 경험한 것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초대교회를 박해하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4-5).
즉, 그리스도와 교회는 일체적 관계로써, 그리스도의 고난은 교회의 고난이요, 교회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인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당하는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받은 대속적 가치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교회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를 세워 나가는 고난이요,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한 고난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은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롬 6:10). 그러나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성도들이 감당해야 하는 고난은 주님의 재림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해야 할 일, 감당해야 할 고난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교회는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해 받으신 고난에 보답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며,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보답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 고난에 기꺼이 동참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감당하는 고난이 우리 주님의 십자가 고난과 비교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고난은 주님이 당하신 그 십자가 고난에 감사하는 고난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해 오히려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도들도 처음에는 고난받는 것이 두려워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에는 오히려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고난 당하는 것을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5:41).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감당할 고난이 있다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유명한 기독교 영화인 "쿠오 바디스"(Quo vadis)는 본래 폴란드 작가 생케비츠(Henryk Sienkiewicz)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입니다. 이 책에 보면 베드로가 다 늙어서 로마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로마의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극심하게 박해했습니다. 로마 교인들은 베드로에게 일단 로마를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다른 성도들을 놓고 자신만 피할 수 없다고 하며 그 제안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교인들이 간절한 요청을 받아들여 어느 날 새벽에 로마를 탈출하여 언덕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찬란한 광채 속에서부터 홀연히 사람의 형상이 나타나서 가만히 보았더니 예수님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자리에서 땅에 엎드려 주님을 부르며 물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쿠오 바디스 도미네, Quo vadis Domine)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내 백성을 버리고 가니 나는 로마로 들어가서 다시 십자가에 죽겠노라."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로마를 떠나 온 것을 후회하고 다시 발길을 돌려 로마로 향했습니다. 그때 베드로를 따르는 제자가 베드로에게 "어디로 가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결연한 의지로 "나는 로마로 돌아가겠다"고 하면서 다시 로마에 들어가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다가 로마 군인들에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십가가형을 당하게 되었을 때, "주님이 십자가에 바로 못박혔거늘 내 어찌 주님과 같이 달리리오"하고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순교당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남겨진 "남은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이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워야 합니다. '누군가 하겠지' 하고 방관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주님이 남겨 놓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슬람권에 간 선교사들은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도 그곳에서 복음을 위해서 일하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직접 그곳에 가서 선교활동을 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교회와 복음 선교를 위한 사업에 적극 나서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이 교회의 일꾼으로 세움을 받은 목적은 만세전부터 감추었던 하나님의 비밀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 3:8-9).
바울은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는 저주 속에 있던 이방인에게도 이제 그리스도가 오셔서 구원받게 되었다는 사실에 감격하여, 이 감추어 졌던 하나님의 비밀의 열쇠인 그리스도를 이방인들에게 전하는데 전력투구하였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철저히 내놓는 희생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바울과 많은 순교자들과 믿음의 선각자들을 통해서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비밀의 경륜이 드러났습니다. 또한 우리에게도 이것을 온 세상에 전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복음의 빚진 자들입니다. 이 빚은 갚아도 되고 안 갚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갚아야 할 빚입니다. 우리는 이 빚을 갚기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 빚을 갚기 위해서 자진하여 일생을 복음 전도에 나섰습니다. 강남교회 성도 여러분도 복음의 빚진 자로서 주님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자가,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