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대중문화 리뷰]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존재론적 질문 던지는 영화 <스포트라이트>

어느 편에 설 거야? 옳은 편에 서야하지 않겠어?

영화 <스포트라이트>에서 <보스턴 글로브>지 탐사보도팀 ‘스포트라이트'의 팀장 월터 로빈슨(로비, 마이클 키튼)이 던지는 질문이다. 먼저 영화의 구성요소들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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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 더 쿱)
▲보스턴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을 다룬 영화 <스포트라이트>

언론인을 그린 영화라서 그런지 주연 배우들이 구사하는 단어 하나 하나가 구체적이고 정확하다. 피해자를 취재하던 샤샤 파이퍼(레이첼 맥애덤스) 기자는 취재원에게 "이번 사건은 용어(laungage)가 중요하다", "성추행이라고 에둘러 말하면(sanitizing) 안된다", "삽입(intercourse) 했느냐"고 주문하며 사건의 실체에 접근해 나간다. 한편 성추행 피해자 중 한 명인 필 사비아노는 사제들의 성추행 행각을 ‘영적 학대'이며 자신을 학대에서 살아 남은 ‘생존자'라고 규정한다. 무슨 말이냐면, 어린 시절 사제의 성추행으로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고 술과 마약으로 버텨나가는 처지란 의미다.

영화는 사제들의 성추행 장면을 재연하지 않는다. 가톨릭 교회가 외압을 행사하는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오로지 주연 배우들이 주고 받는 대화를 통해 주제의식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배우들이 던지는 정확한 단어는 화살처럼 꽂힌다.

영화의 또 다른 묘미는 배우들의 연기다. 마이클 키튼, 마크 러팔로, 레이첼 맥애덤스, 스탠리 투치 등 탄탄한 연기력을 갖춘 배우들이 흡사 진짜 기자나 변호사가 된 듯 연기력을 마음껏 펼친다. 특히 열혈 민완기자 마이크 레벤데즈 역을 맡은 마크 러팔로는 <어벤져스> 같은 블록버스터보다 이 영화 같이 꽉 짜여진 드라마에서 진가가 제대로 드러난다.

가장 눈길이 가는 캐릭터는 리브 슈라이버가 연기한 마틴 배런 국장이다. 배런 국장은 부임하자마자 스포트라이트 팀원들을 모아놓고 취재 아이템을 제안한다. 그 아이템이 바로 사제 성추행이었다. 한국 같으면 어떨까?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여러 아이템 가운데 비교적 ‘무난한' 걸 골라내는 게 편집국장의 주요업무다. 정치 권력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거나, 혹시라도 명예훼손 소송에 걸릴 소지가 다분하거나, 광고주의 돈지갑을 닫게 만들 아이템은 일단 배제 ‘0' 순위다.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도 한국 같으면 ‘킬' 당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보스턴 글로브> 사주는 배런 국장에게 ‘독자의 53%는 가톨릭 신도'임을 주지시킨다. 그럼에도 배런 국장은 팀원들의 방패막이가 되어준다. 한국 같으면 꿈도 못꿀 일이다. 게다가 배런은 시대 변화를 내다봤다.

종이신문 가치, 시대 변화에도 빛 바래지 않아

영화의 배경은 2001년. 이 시기는 종이신문이 인터넷에 밀려 서서히 사양길로 접어들던 시기였다. 배런 국장은 아이템 회의 석상에서 매일 쏟아지는 뉴스 말고 보다 심도 있는 보도를 주문한다. 지금 돌이켜보면, 배런 국장은 종이신문의 생존방식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종이신문은 이제 속보에 관한 한 인터넷을 따라잡지 못하는 지경이다. 아침에 인쇄한 신문의 잉크냄새가 채 마르기도 전에 급박한 사태진전이 벌어지고, 그래서 종이신문은 금새 휴지조각으로 전락해 버린다.

그렇다고 종이신문이 설 자리가 없어져 버렸을까? 그렇지 않다. <스포트라이트>는 비록 속보에서는 인터넷에게 밀리지만, 지면 신문의 가치는 빛이 바래지 않다는 점을 일깨운다.

자,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 가보자. 영화의 주제는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즉 ‘언론, 아니 이 사회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어느 편에 서야 하는가?'하는 질문 말이다.

핵심은 부조리를 대하는 태도와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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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 더 쿱)
▲<스포트라이트>에서 취재팀장 로비는 취재과정에서 자신의 과오를 발견하고 자책감에 빠진다.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은 전혀 새삼스럽지 않다. 사건의 내력을 따지자면 중세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피해자들이 침묵했냐면 그것도 아니다. 피해자 중 하나인 필 사비아노는 이미 5년 전 자신의 증언과 이를 뒷받침할 자료를 <보스턴 글로브>에 보냈다. 교회 측과 비밀협상을 주도한 변호사 에릭도 이 신문에 성추행 가해 사제들의 명단을 제공했지만 역시 묵살당했다. 그러다 새삼 배런 국장의 제안으로 불빛(스포트라이트)을 비추니 그동안 몰랐던, 때론 감춰졌던 진실들이 하나하나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사실 신문사 내부에서 누군가 단단히 마음먹고 달려들었으면 사제들의 성추행은 진즉에 세상에 드러났을 것이다. 피해자들의 제보도, 이를 뒷받침할 자료도, 진실 규명을 위해 싸울 법조인도 있었으니까. 이 지점에서 의문이 생긴다. 왜 5년 전엔 아무도 이 문제를 건드리지 않았을까? 놀랍게도 이 문제를 덮은 장본인은 ‘스포트라이트' 보도팀 팀장 로비였다. 이 대목은 무얼 말하는 걸까?

먼저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실태는 충격적이었다. 영화는 아동 성추행을 병리현상이라고까지 지칭했다. 그러나 병리현상인 게 어디 아동 성추행뿐일까? 이것 말고도 노동자에게만 일방적으로 불리한 구조조정, 규제 풀린 금융자본, 인종차별 등등 부조리는 국경을 넘어 자유로이 활보한다. 몇몇 사람이 달려든다고 해서 감당할 수준이 아니다.

관건은 이 같은 부조리를 대하는 ‘태도'와 ‘관점'이다.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기 전,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이 그토록 심각한 문제인지 아무도 몰랐다. 다른 부조리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높다.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기 전까지 그토록 심각한지 몰랐던 사회적 병폐가 흉한 민낯을 드러낼 것이다.

과연 이런 부조리들에 대해 언론, 아니 사회 전체가 취하는 태도와 관점은 어땠을까?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으로 주제를 좁혀보자. 신문 독자 가운데 절반 이상이 가톨릭 신도니까, 교회가 좋은 일 많이 하니까, 성추행은 어린 시절 벌어진 일이고 지금은 처자식도 있으니 말하기 꺼려지니까, 조용히 처리하는 게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돈도 되는 일이니까 모른 척 하지 않았던가?

다른 부조리들은 어떨까? 광고시장을 쥐락펴락 하는 대기업에 취직해 일하던 십대 노동자가 원인모를 병으로 꽃 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언론은 광고계의 큰 손인 이 기업의 심기를 건드리기 싫어 모른 척하고, 일반 국민들은 이 기업이 죽으면 우리 경제 전체가 죽는다고 유가족들에게 침묵을 강요한다. 이런 일들은 나, 그리고 나와 가까운 이웃이 겪을 수 있는, 그리고 실제 겪고 있는 부조리다. 그러나 언론은, 사회는 공공연히 침묵을 강요하고 있지 않은가?

취재팀장 로비는 취재과정을 통해 지난 날의 과오를 깨닫고 심한 자책감에 빠진다. 이때 다시 한 번 배런 국장의 존재감이 드러난다. 배런 국장은 아래와 같은 말로 로비를 비롯한 ‘스포트라이트' 취재팀의 사기를 북돋운다.

"우리가 어둠 속이 있을 때엔 자주 넘어지고 부딪힙니다. 그러나 불을 켜고 나면 자책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여러분들에게 휴식을 주고자 합니다. 업무에 복귀할 때 다시 각오를 다져주기 바랍니다."

영화는 엔딩 크레딧을 통해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은 곳곳에서 진행 중임을 보여준다. 아마 드러나지는 않고 있지만, 진실의 불빛을 애타게 기다리는 다른 부조리들도 마찬가지로 진행형일 것이다.

이제 아동 성추행 뿐만 아니라 다른 심각한 부조리에 눈을 돌려보자. 어둠 속에 지내야 하는 이들에게 빛을 비추고, 목소리 없는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 주자. 이들은 의외로 우리 가까이에 있다.

덧붙이는 글.

로마 교황청은 <스포트라이트>에 대해 "가톨릭 사제 아동 성추행 피해자들의 깊은 고통을 들려준 영화"라고 찬사를 보냈다. 가톨릭의 넓은 아량에 깊은 존경과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한국 개신교는 일부 개신교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다룬 다큐멘터리 <쿼바디스>에 대해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는 한편, 극장 상영을 막으려 조직적으로 움직인 적이 있었다.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유석 luke.wycliff@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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