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AP통신은 4월19일(화) 탐사보도를 통해 형제복지원 사건을 파헤쳤다. 형제복지원은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부산에 있었던 국내 최대 규모 부랑인 강제 수용시설. 형제복지원에서는 구타, 강간, 강제노역 등 인권침해 행위가 자행된 것으로 악명 높았고, 이로 인해 SBS <그것이 알고싶다> 등 지상파 방송의 시사고발프로그램에서 자주 다뤄졌다.
AP통신은 형제복지원이 한국 현대사의 이면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적었다. 아래는 AP통신 보도 내용 중 일부다.
"당시 한국은 일제의 40년 가까운 강점, 그리고 뒤이어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있었던 한국전쟁에서 입은 피해에서 여전히 회복 중이었다. 그리고 민주화 이전인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군사정권의 지배를 받았으며, 군사정권은 경제 개발에 압도적으로 관심을 집중했다. 1975년 현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인 독재자 박정희는 경찰과 지방 관청에 부랑자를 ‘정화'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업주의 지원을 받은 경찰은 걸인, 껌이나 잡동사니를 팔던 노점상, 장애인, 거리를 떠돌던 미아들, 그리고 반정부 선전물을 소지하고 있던 대학생 같은 체제 반대자를 잡아 들였다."
그동안 형제복지원은 주로 부랑자나 걸인들이 주로 수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AP통신 보도는 이 수용시설이 체제 반대자들을 ‘정화'시키려는 목적도 있었음을 드러냈다.
형제복지원의 노예노동 실태는 더욱 충격적이다. AP통신은 형제복지원이 원생들의 노동력을 착취해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는 사실을 전했다.
"한때 고아원이었던 형제복지원은 절정일 때엔 20개의 공장을 운영하면서 가구, 금속, 의류, 신발 등을 제조했다. 이들 제품들은 대부분 원생들이 무임금으로 생산한 것들이다. (중략) 공장들은 외견상 원생들에게 직업교육을 실시해야 했다. 그러나 AP통신이 부산시로부터 확보한 정부 문건에 따르면 1986년 말까지, 11개의 공장에서 이득을 취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문건에 따르면 형제복지원 측은 1,000여 명의 원생들에게 밤낮 없이 일한 대가로 현재 가치로 170만 달러에 이르는 임금을 지급해야 했다. 그러나 공장에 남겨진 기록, 그리고 당시 원생들과의 인터뷰 결과 거의 4,000명에 이르는 원생들이 무노동 임금을 강요당했다."
AP통신은 이 같은 사실을 전하면서 "정부 고위층의 조직적 은폐로 이제껏 형제복지원에서 자행된 강간이나 살인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기독교계에도 일정 수준 책임이 있다. 형제복지원 원장인 박 모 씨는 부산 ㅅ교회 장로였고, 몇몇 교계 언론을 통해 복지사업가로 미화되기도 했다.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그는 치매로 몇 년째 집에서 머물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언론 취재를 피하기 위한 속임수라는 입장이다.
형제복지원 피해자 가운데 한 명은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그때의 기억은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것"이라고 고백했다. 기독교계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 하나 더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