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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

2016년 4월 3일 경동교회 주일예배 설교자 채수일 목사

chaesuil
(Photo : ⓒ베리타스 DB)
▲경동교회 채수일 목사

성경본문

사도행전 5:27-32

그들이 사도들을 데려다가 공의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신문하였다. "우리가 그대들에게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엄중히 명령하였소. 그런데도 그대들은 그대들의 가르침을 온 예루살렘에 퍼뜨렸소. 그대들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였다.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은 여러분이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분을 높이시어 자기 오른쪽에 앉히시고, 영도자와 구주로 삼으셔서, 이스라엘이 회개를 하고 죄 사함을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십니다."

요한계시록 1:4-8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또 신실한 증인이시요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이시요 땅 위의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기의 피로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주셨고, 우리로 하여금 나라가 되게 하시어 자기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에게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 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보아라,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 눈이 있는 사람은 다 그를 볼 것이요, 그를 찌른 사람들도 볼 것이다. 땅 위의 모든 족속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이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20:19-31

그 날, 곧 주간의 첫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보았소" 하고 말하였으나, 도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도마도 함께 있었다. 문이 잠겨 있었으나,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그리고 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 도마가 예수께 대답하기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니,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하지 않은 다른 표징도 많이 행하셨다. 그런데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아멘(회중)

설교문

1. 요한복음 저자에 따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세 번 나타나십니다. 첫 번째 현현은 막달라 마리아에게(요한 20,11-18), 두 번째 현현은 제자들과 쌍둥이라 불리는 제자 도마에게(요한 20,19-29), 그리고 세 번째 현현은 디베랴 바다에서 다시 제자들에게(요한 21,1-25) 나타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두 번째 현현 이야기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말하자, 도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라고 말합니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집 안에 모여 있었고, 유대 사람들이 두려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는데,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십니다. 그리고나서 도마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

도마가 정말로 예수님을 만져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도마는 다만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며 놀라고, 예수님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몸의 부활을 증명하기 위한 전승이기는 하지만, 놀랍게도 같은 상황에서 여전히 서로 모순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던 방에 어떻게 예수님은 들어오실 수 있었을까요? 이때의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도마와 제자들에게 만져보라고 하신 몸과 다른 것일까요, 같은 것일까요? 그리고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면 더 이상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시대, 의심과 회의의 시대를 살아가야 할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기 위한 알리바이일까요? 오직 보이는 것만 사실이고, 증명 가능한 것만 이성적이라고 믿는 시대에 눈에 보이지 않고 증명도 불가능한 신을 믿는 신앙인들의 자기 합리화일까요?

이 말씀은 눈으로 보고 믿는 것보다 눈으로 보지 않고서 믿는 것이 더 위대하다는 의미인지에 대한 논쟁이 신학자들 사이에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그런 가시적 근거가 없는 신앙이 더 좋다는 해석을 부인하지만, 다른 신학자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부활한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 위치에 있던 도마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지 못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이며, 요한복음 저자의 의도, 곧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되다'는 말씀은 '표적을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표적을 보고 믿는 믿음보다 더 위대하다'는 뜻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은 물론 종교 체험과 표적의 역사성이나 그 가치를 경시한다는 것과 동일시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표적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셨지만, 표적을 보는 것이 곧바로 믿음과 연결되는 것도 아님을 성서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병에서 고침 받은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을 따른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예수님에게서 표적을 구하던 사람들이 마침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선동되기도 했습니다. 병자를 치유하신 주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표적과 무관하지 않지만, 표적 없이도 믿음은 가능하고, 믿음 없이는 표적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성서의 증언입니다.

2. 그러나 쌍둥이라 불리는 제자 도마는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자기 손으로 직접 만져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는 사람, 매우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하는 제자였음이 분명합니다. 도마는 신이 있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것이 사실로 증명되지 않는 한 믿을 수 없다는 우리 시대의 과학적 무신론자, 혹은 회의론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도마는 제자들 가운데 가장 충성스럽고 용감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 유대 지방으로 가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선생님, 방금도 유대 사람들이 선생님을 돌로 치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리로 가려고 하십니까?'(요한 11,7-8)라며 말리지만, 도마는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하는 용기를 보여줍니다(요한 11,16).

그러나 그는 또한 우둔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용감해서 우둔한 것인지, 우둔해서 용감한 것인지 모르지만, 도마는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에게 반문합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요한 14,5).

제자 도마만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었던 인물이 아닙니다. 제자 빌립도 말합니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요한 14,8).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느냐?'(요한 14,9).

아버지와 아들이 한 분이심을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 사람은 이미 하나님을 본 것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지요. 십자가에서 로마 제국의 정치범으로 죽으실 예수님, 나무에 달려 저주받은 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받은 외로운 죽음을 죽으실 예수님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데, 도마는 다른 길, 하나님에게 이르는 다른 길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3. 의심하는 제자, 도마를 작품으로 형상화한 예술가들이 많은데, 우리는 그 가운데 특히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의 작품, '토마'(1602년, 포스트담)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카라바조의 인간됨과 삶만큼이나 그의 작품 '토마'는 다른 여타의 작가들의 것과 확연히 다릅니다. 마치 의사가 면밀하게 부검하듯 예수님의 상처에 손을 조심스럽게 넣는 토마의 표정, 진지하게 이 모습에 시선을 집중하는 두 제자, 그런데 놀라운 것은 토마의 팔을 잡아 창에 찔린 상처 안으로 집어넣는 예수님의 표정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한 승리자의 모습이 아니라, 차라리 매우 슬픈 얼굴,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 대한 연민의 표정을 짓고 계십니다.

도마는 불신앙의 전형이 아닙니다. 믿음의 반대말은 의심이 아닙니다. 믿음의 반대말은 불신앙이지 의심이나 회의가 아닙니다. 의심과 회의 없는 믿음을 우리는 맹신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반대는 오히려 무관심입니다. 예수님이 토마와 제자들을 비웃는 것이 아니라, 연민의 표정을 짓는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표적 때문에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미신이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기적과 표적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 나섰던 민중은 십자가 아래에서 '그가 남은 구원하면서 정작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하던 민중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표적을 보고 믿는 사람보다, 표적 없이 믿는 한 위대한 시인을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입니다:

당신을 찾는 이들은 저마다 당신을 시험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당신을 찾은 사람들은 당신을

그림과 몸짓에다 묶어놓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대지가 당신을 이해하듯

그렇게 당신을 이해하렵니다.

나의 성숙과 더불어

당신의 왕국도 성숙합니다.

나는 당신을 증명하려는

어떤 허영도 당신에게 바라지 않으렵니다.

시간이란 당신과는

다른 것임을

나는 알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어떤 기적도 행하지마소서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며

더 선명해지는

당신의 법칙을 시인하소서.

내 눈빛을 꺼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아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내 팔을 부러뜨려주소서, 나는 손으로 하듯

내 가슴으로 당신을 끌어안을 것입니다.

내 심장을 막아주소서, 그러면 나의 뇌가 고동칠 것입니다.

내 뇌에 불을 지르면, 나는 당신을

피에 실어 나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한 인간의 삶의 성숙과 함께 성장하는 법입니다. 믿음은 삶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증명하시지 우리가 증명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면, 우리는 눈이 없어도 그 분을 볼 수 있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우리는 귀가 막혀도 그 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면 발이 없어도 우리는 그 분에게 갈 수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면 우리는 입이 없어도 주님을 부를 수 있습니다.

4. 그런데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주님께서 지상에서 몸으로 제자들과 함께 하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여 승천하신 주님을 더 이상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없는 현실, '포스트 예수 시대'가 온 것이지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요한은 성령에게서 찾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면서 '성령을 받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기' 위한 것(요한 20,21)이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고(요한 20,23),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하기 위한 것(요한 20,31)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기 전, 이른바 그의 '고별 설교'에서 성령을 약속하심으로써, 부활 이후의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를 암시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그는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를 보지도, 알지도 못하므로, 그를 맞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안다. 그것은 그가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14,16-17).

성령은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입니다. 성령은 보혜사, 곧 우리를 위한 변호인으로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진리의 영이십니다(요한 14,16). 성령은 하나님께서 주님의 이름으로 보내시는 영이십니다. 그를 믿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며,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영이십니다(요한 14,26). 성령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시는 분'(요한 16,8)이시며, 제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진리의 영'(요한 16,13)이십니다.

성령은 유대 지도자들이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님, 저주받은 자의 한 사람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높이셔서 자기 오른 편에 앉히시고, 영도자와 구주로 삼으셔서,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게 하신 일의 증인이십니다(사도행전 5,27-32).

요한 계시록의 저자 요한도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이시오, 땅 위의 왕들의 지배자'(계 1,5)라고 고백합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기의 피로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주셨'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님'(계 1,8)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어떤 몸으로 부활한단 말인가 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과학의 질문이지만, 신앙의 질문은 아닙니다. 신앙은 어떻게가 아니라, 왜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는지 질문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고 히브리서 저자는 고백합니다(히브리서 11,1). 바라는 것, 희망은 아직 현실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삶은 바라는 것들이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확신하는 것이요, 보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보이는 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라고 믿으며 사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은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 때문에 절망하는 법이 없고, 보이는 것만 현실이라고 믿는 세상에서 '아니!'(NO)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꿈 때문에 조급해하지 않고, 보이는 것만 중요하다고 믿는 세상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삶으로 증언할 수 있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들,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성도 여러분에게 보혜사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온라인이슈팀 newspaper@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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