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제34회 국제성서학대회가 7월3일부터 7일까지 연세대에서 개최됐다. 전 세계 37개국에서 500여 명의 성서학자들이 모여 4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주로 구미 각국에서 매년 개최되다가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열린 이번 대회는 성서학의 상황화 담론이 반영된 결정이다. 이 대회를 서울로 유치하는데 일조한 아시아성서학회의 설립자 아치 리(Archie Lee) 박사를 모시고 대회의 취지와 성서학의 최근 조류에 대한 대담을 나누었다. 대담은 6일 연세대 백양누리 인근에서 진행됐으며 대담자는 본지 이인기 편집국장이다. 대담 내용은 2회로 나누어 연재한다.
이인기(문): 반갑습니다. 아치 리(Archie Lee)라는 성함을 처음 들었을 때, '아치'라는 말이 진실, 용기라는 뜻도 있고 대주교(archbishop)나 고고학(archeology)처럼 '최고,' 혹은 '오래된' 등의 의미로 읽혀서 혹시 이씨 가문의 비조이신가 했습니다.
아치 리(리): 하하. '아치'에서 '아'는 중국어 불변화사인데 어릴 때부터 저의 이름 앞에 붙여서 그렇게 불렸습니다. 저의 이름은 중국어로 쓰면 이치창(李熾昌)입니다. 말씀하신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만 묘하게 영어와 중국어가 어울려서 그렇게 들릴 겁니다.
문: 중국에서 성서를 연구하는 박사님의 상황이 이름에서도 재현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리: 하하. 성서는 서구의 고전이니까 내가 중국에서 성서를 연구하는 것이 그렇게 비칠 수도 있겠군요. 사실, 이번 대회의 주요 담론이 성서학의 상황화입니다.
문: 이번 대회의 주제가 "경계를 넘어서"(Crossing Borders)이던데, 그 경계는 성서학의 서구적 관점을 가리키나요? 그렇다면 그 경계를 넘는 것은 아시아적 컨텍스트 속의 성서를 발견하고자 하는 시도가 될 수 있겠군요. 대회의 주제에 대해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이와 관련하여 박사님의 학문적인 관심사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리: 네. 중국에는 고전들이 많은데 성서도 그 고전들과 함께 읽을 수가 있겠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성서의 말씀이 중국 고전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반대로 중국 고전도 성서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텍스트 사이의 상호작용(transtextuality)을 전제하는 것이지요. 예전에 텍스트끼리의 단순한 상호관계를 따지던 단계(intertextuality)를 넘어서 상호작용을 통해 제3의 의미를 도출해내는 단계로까지 진척된 것입니다. 성서의 말씀이 중국의 고전이나 중국의 사회 및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는 관점이 될 수도 있고 중국적 요소가 성서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게 돕기도 하는 것이지요. 두 텍스트 사이의 대화가 시도되는 것입니다. 한국으로 말하면 민중신학이 비슷한 사례가 될 겁니다.
문: 성서의 말씀을 중국적 상황에서 살아 있게 만들려는 시도이군요. 성서학의 중국적 상황화! 이것이 없으면 성서는 추상적 개념의 텍스트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리: 그렇습니다. 성서 텍스트를 중국적 관심사 속에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이지요. 성서는 우리에게 '걸어 다니는 텍스트'(walking text)입니다. 이런 시도가 없으면 우리는 성서를 추상적으로만 이해하고 말게 됩니다. 서구는 텍스트를 갖고 있는데 우리는 컨텍스트만 있는 상황이 지속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문: 그러면 박사님께서 성서를 이런 관점으로 연구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리: 나는 학부 때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구약학을 연구하게 됐습니다. 지도교수는 교회의 도움으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았는데, 자연스레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신학 공부를 한 뒤 홍콩으로 파송되어 왔지요. 그분은 성서를 가르치면서 유대인들의 전통을 강조했습니다. 유대인의 전통을 배경으로 신약의 의미도 파악할 것을 가르치셨지요. 이러한 경험이 성서를 중국적 관점으로 연구하게 한 동기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영국 에딘버러대학교와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교에서 구약성서를 연구했습니다. 귀국 후에 줄곧 구약성서를 가르쳤는데, 홍콩 중문대학에서만 34년간 교편을 잡았지요. 2년 전에 은퇴를 했고 지금은 산동대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거기는 유대교 및 종교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합니다.
문: 이런 배경에서 아시아성서학회(Society of Asian Biblical Studies)를 창설하셨겠군요?
리: 네. 올해로 아시아성서학회가 창설된 지 10주년이 됩니다. 올해로 136주년이 되는 국제성서학회(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에 비하면 일천하지만, 아시아적 관점으로 성서의 의미를 살려내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국제성서학회는 전 세계에 8천 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지요. 엄청 큰 학회입니다. 그 동안 미국과 유럽 등지를 번갈아가며 학회를 개최했었는데 이번 서울 대회는 오세아니아 권에서는 싱가포르, 뉴질랜드의 오클랜드에 이어 세 번째로 개최되는 셈입니다. 이제 점차로 성서학의 상황화 담론이 힘을 얻어갈 것입니다.
우리는 서구와는 다른 역사와 다른 삶의 이야기들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소외된 채로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므로 그 경계를 넘어서 소통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정체성도 확인할 수 있거든요. 아브람이 고향을 떠나서 하란으로, 가나안으로 옮겼고, 그후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로 건너갔으며 바빌론 유수 당시에도 이동을 했습니다. 다른 장소로 옮겨 다니면서 다른 문화, 다른 종족, 다른 텍스트를 만나게 되었지요. 이렇게 경계를 넘어서 경계를 옮겨 다니는 과정에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정체성을 규명해줄 구약성서가 바로 그 과정에서 체제를 갖추게 되지 않았습니까? 경계를 넘을 때 결국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문: 경계를 넘는 작업이 결국 우리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과정이라는 말씀이시군요.
리: 그렇습니다. 우리 상황에 유의미하게 텍스트를 읽음으로써 우리 자신의 면모를 고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문: 그러면 현재 "경계를 넘어서"가 함의하는 성서학의 상황화 담론이 성서학의 최근 경향을 가리킵니까?
리: 그렇습니다. 전통적 해석, 역사비평적 방법 등이 성서해석에 적용되어 왔지만 그 자체로 성서의 의미를 충분히 담아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성서가 아시아로 온 겁니다. 다른 관념, 다른 역사 속으로, 게다가 아시아 자체가 갖고 있는 우리 나름의 경전들 속으로 성서가 옮겨져 왔지요. 성서가 이와 같이 다른 텍스트와 어떻게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인가가 주목을 받게 됐습니다. 이 경우에 텍스트 비교 연구가 대화의 현장이 되었지요. 이러한 문화 간의 대화가 성서학의 주요한 한 경향을 형성했습니다. 또 다른 한 경향은 아시아 각국의 기층민, 즉, 달리트, 민중 등에 대한 관심에 기반한 사회정치적 관점입니다. 민중신학, 해방신학, 여성신학 등이 이것의 사례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문화적이거나 사회정치적인 차원의 두 가지 경향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때는 비교적 전통적인 입장에서 연구되었다면 점점 더 두 텍스트 간의 상호작용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입니다. 소위 문화 사이의 상호작용(cross-cultural)의 관점에서 성서를 고찰하게 된 것이지요. 문화의 상호작용이라는 관점의 우산 아래서 인간의 현실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아시아 각국의 문자 텍스트, 혹은 구전과 그 나름의 독특한 사회적 경험이 상호작용하면서 관점도 복수적(plural)으로 적용됩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누구인지를 발견하게 되지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