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71주년을 맞이한 광복절은 온 종일 역사 논쟁으로 들끓었다. 발단은 대통령의 광복절 기념사 첫 문장이었다. 문제의 첫 문장은 이렇다.
"오늘은 제71주년 광복절이자 건국 68주년을 맞이하는 역사적인 날입니다."
1945년 일제 강점에서 해방됐으니 올해가 71주년 광복절인 건 맞다. 문제는 이어지는 ‘건국 68주년'이란 말이었다. 역산해보면 이 말은 대한민국이 1948년에 건국됐다는 의미이고, 이는 이른바 뉴라이트의 역사관과 궤를 같이한다.
사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이라는 뉴라이트 사관은 역사학계의 해묵은 논쟁거리여서 새삼스럽지만은 않다. 더 새삼스럽지 않은 건, 역사학계가 이미 이 사관에 오류가 있음을 지적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광복절이 임박한 12일 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한 광복군 출신 독립유공자 김영관 선생이 대통령 면전에서 "대한민국이 1948년 8월 15일 출범했다고 이날을 건국절로 하자는 일부의 주장은 역사를 외면하는 처사"라고 분명히 주지시키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아랑곳없이 건국절 주장을 되풀이했다. 이 정도면 거의 확신범 수준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대통령이 왜 이토록 1948년 건국절에 집착할까? 얼른 떠오르는 이유는 ‘불통'이다. 대통령은 자신의 의견에 토다는 걸 싫어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대통령의 역사관은 단순 불통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심각하다.
이 지점에서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바 있는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의 이야기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이 명예교수는 지난 해 11월 서울 명동 향린교회에서 열린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저지를 위한 시국기도회'에 참석해 시국강연을 했고, 기자는 현장에서 이 명예교수의 발언을 고스란히 지면으로 옮겼다. 대통령의 광복절 축사를 들으며 당시 강연이 떠올랐다.
이 명예교수는 강연 초입에 "1948년 8월 15일이 정부수립이냐 대한민국 수립이냐는 논란은 역사학자들에게는 아주 중요하고 민감한 쟁점"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러면서 건국절 주장의 허점을 이렇게 짚어 냈다.
"1948년에 대한민국 건국이 이뤄졌다는 소위 ‘건국절론자'들은 ‘국가는 영토, 국민, 주권 등 세 가지가 있어야 하는데 1919년엔 없었다. 따라서 1919년 건설은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얼핏 논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제헌 헌법을 논의했던 사람들은 이를 몰랐을까? 알았다. 국토, 국민, 주권을 갖춰야 나라임을 알았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헌법에 넣은 이유가 있다.
제헌 헌법을 기초했던 의원들과 지성인들은 ‘대한민국은 1919년 건립됐지만 그동안 일제가 강점했기에 정부를 강토 안에 세우지 못했다. 그래서 대한민국을 운영하기 위해 해외 정부를 세울 수밖에 없었는데 그게 임시정부다'라고 정리했다."
이승만 마저 ‘1948년 건국' 부정적으로 봐
이승만 대통령 역시 1948년 건국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이 명예교수의 말이다.
"이승만은 ‘1945년 연합국에 의해 해방되고 그 덕에 1948년 대한민국을 건국했다고 말하면 역사에 창피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일제의 강포한 지배하에 있을 적에 그걸 뚫고 삼일 민주혁명 일으켜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이게 자랑스럽지 않느냐?'고 말한 적이 있었다."
자, 이제 가장 근본적인 질문, 즉 현 정부가 왜 1948년을 대한민국 건국으로 보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볼 차례다. 다시 이 명예교수의 말에 귀 기울여 보자.
"그렇다면 현 정부는 왜 1948년을 대한민국 건국으로 보려 하는가? 바로 뉴라이트 계열의 식민지 근대화론 때문이다. 이건 역사를 보는 큰 흐름과 관점의 차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식민지하에서 근대화 되어서, 그 힘으로 1948년 대한민국을 건국하게 됐다'는 주장이다. 그러니 이승만은 국부로 치켜세워야 하고, 한일 회담 통해 받은 자금으로 제철소 만들고 고속도로 닦은 박정희를 치켜세워야 했다."
이 대목에서 역사학계가 뉴라이트의 오류를 짚어 냈음에도, 또 광복군 노병이 손수 대통령 면전에서 일침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이 ‘1948년 건국절' 주장을 굽히지 않는 이유가 드러난다. 바로 아버지의 위업을 치켜 세우기에 뉴라이트의 주장은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집권 기간 내내 아버지의 전철을 충실하게 답습했다. 특히 아버지 기념사업엔 국민혈세를 아끼지 않았다. <미디어오늘>의 2014년 11년6일자 보도에 따르면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 예산이 최근 7년간 1,356억 원에 이른다.
박 대통령의 아버지 사랑은 비단 기념사업에 그치지 않고 역사를 왜곡하는 지경까지 나아간다. 현 정권은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밀어 붙였고, 이는 박정희의 친일행적 세탁과 무관하지 않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그런 박 대통령이기에 광복절 축사에서 1948년 건국절 주장을 버젓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광복절은 단순히 공휴일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아픈 과거를 되새기고 다시는 이런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새로이 하는 날이다. 이런 뜻 깊은 날에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일그러진 역사인식을 드러낸 건 참으로 유감스럽다. 더구나 아버지를 흠모하는 마음에 사로잡힌 나머지 우리 민족의 역사에까지 생채기를 낸 대통령의 행태는 도저히 묵과하기 어렵다.
언제까지 대통령의 폭주를 지켜봐야 할까? 대한민국의 앞날이 실로 암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