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거래>, <베테랑>, <부산행>, <터널> 등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영화의 대세는 ‘부조리'다. <부당거래>가 스폰서 검사를 다뤘다면 <베테랑>은 재벌2세의 갑질을 고발한다. 그리고 <부산행>과 <터널>은 총체적 붕괴상황인 지금 대한민국의 은유다. 사실 이 영화들이 다루는 부조리는 신문·방송 등 저널리즘의 영역이다. 그러나 신문·방송이 제 구실을 못하다 보니 영화, 혹은 드라마가 저널리즘의 역할을 대신하고 나선 것이다.
부조리극 중에서 가장 백미는 우민호 감독의 <내부자들>이다. <미생>으로 친숙한 윤태호 작가의 웹툰을 영화화한 작품인데 좀 심한 비유일수도 있겠지만, 영화는 보면 볼수록 원작자와 연출자, 출연 배우 모두 요새 유행어로 ‘약 빨고' 만든 것 같다. 오해는 마시라. 구성도 탄탄하고 연기도 탄탄하다는 칭찬이다.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을 살펴보자. 폭력배 안상구(이병헌), 검사 출신 여당 유력대선후보 장필우(이경영), 조국일보 주필 이강희(백윤식), 미래자동차 회장 오현수(김홍파), 그리고 열혈검사 우장훈(조승우) 등이 주인공이다. 청와대 민정수석은 조연으로 잠깐 화면에 얼굴을 비춘다.
주인공들의 면면은 흡사 현재 청와대와 유력 보수일간지인 <조선일보>가 벌이고 있는 아귀다툼을 고스란히 옮겨온 듯하다. 이야기의 얼개도 현실과 판박이다. 그런데 영화는 이 아귀다툼 보다 약 8개월 이전에 세상에 나왔다. 그러다보니 흡사 원작자가 진짜 ‘내부자'가 돼 그쪽 세계의 속살을 면밀하게 정탐한 뒤 이를 대중에게 알린 듯한 착각이 든다. 실제로도 청와대와 <조선일보> 사이의 갈등이 전면전으로 치닫고, 이 와중에 송희영 주필이 잘려 나가자 많은 이들은 이 영화를 떠올렸다.
높은 분들의 일그러진 행각
사실 처음 볼 땐 불편한 장면이 꽤 많았다. 특히 오현수 회장과 장필우, 이강희 주필이 알몸으로 여성들과 놀아나는 장면이 그랬다. 이 장면을 찍으면서 배우들이 조금 민망해 하지는 않았을까? 저간의 사정이야 알 수는 없지만, 이 장면은 과장이 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런 생각은 빗나갔다.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1등 기업으로 소문난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이 복수의 여성들과 섹스에 탐닉하고, 삼성그룹 임원이 채홍사 노릇을 한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으니 말이다. 결국 <내부자들> 속 낯 뜨거운 광경들은 이 나라의 기득권을 움켜쥔 자들이 ‘노는' 방식을 옮겨온 셈이다.
어디 그뿐인가? 영화 속 이강희 주필은 오현수 회장과 만난 자리에서 냉정하면서도 무뚝뚝한 어조로 이런 대사를 되뇌인다.
"어차피 대중들은 개, 돼지입니다. 그 뭐하러 개, 돼지들에게 신경을 쓰고 그러십니까? 적당히 짖어대다가 알아서 조용해질 겁니다."
놀랍게도, 이 발언은 현실로 되돌아왔다. 고시를 ‘패스'한 고위공무원 입에서 ‘민중은 개, 돼지'라는 믿기 힘든 말이 튀어 나온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공무원은 <내부자들>의 이 대사가 생각나서 그런 말을 했다고 변명했다. 아마 원작자나 연출자, 배우, 관객 모두 이런 현실이 펼쳐질 줄 몰랐으리라.
배우들의 연기와 수 싸움, 극적 재미 높여
이병헌, 조승우, 이경영 등 주연배우들의 연기는 말 그대로 명불허전이다. 출연 배우들 모두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를 잘 알고, 마치 그 캐릭터로 빙의한 듯한 연기를 보여준다. 특히 이은하의 추억의 가요 ‘봄비'를 흥얼거리며 작업에 들어가는 이병헌의 모습에서는 소름끼치는 공포감이 몰려온다.
이강희 주필로 분한 백윤식의 연기는 그 중에서도 백미다. 개인적으로는 2005년 작 <그때 그 사람들>에서 대통령을 암살하는 중앙정보부장역 이후 최고의 연기로 꼽고 싶다. 그의 연기는 검찰 취조실 장면에서 탁월하게 드러난다.
우 검사는 오 회장의 비자금이 장 의원에게 흘러들어갔고, 이 주필도 비자금 흐름에 개입한 정황을 잡고 취조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 주필은 표정하나 변함없다. 오히려 이 주필은 요리조리 말을 비틀어 가며 우 검사의 심문을 피해간다. 이 장면에서 보여주는 백윤식의 연기는 보는 이의 머리를 쭈뼛 서게 만들 정도로 강렬하다.
영화의 묘미는 또 있다. 바로 등장인물들끼리의 치열한 수 싸움이다. 안상구는 오 회장의 비자금 담당이던 문일석에게 비자금 리스트를 빼돌려 이 주필에게 건넨다. 이 주필은 이를 오 회장 쪽에 알리고 안상구에게 보복을 가한다. 한편 우 검사는 대검으로 가고자 장 의원을 정조준한다. 이들은 때론 협력하고, 때론 대척점에 서서 상대의 의표를 찌른다. 무엇보다 우 검사와 안상구가 쳐놓은 덫에 이 주필과 오 회장, 장 의원이 걸려드는 장면은 짜릿하다.
앞서 적었듯 이 영화의 이야기는 현실의 복사판이다. 정의? 그런 따위는 없다. 그저 필요에 따라 상대를 이용하다 버리면 그뿐이다. 현실은 훨씬 더 야비하고 추악하다. 그러다보니 영화를 보고, 다시 봐도 웃어야할지, 울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단, 영화의 결말에서 한 가닥 희망을 걸어본다. 결말은 전형적인 권선징악이다. 무엇보다 연출자가 상황을 정리하는 주인공으로 검사를 선택한 점은 무척 시사적이다. 우 검사가 모든 진실을 폭로한 후 검찰 조직을 떠나지만 말이다.
요사이 검찰은 체면을 구길대로 구긴 신세다. 전·현직 검사장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구속됐고, 현직 부장검사 역시 스폰서 의혹으로 곤욕을 치르는 중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다른 데 있지 않다. 무소불위의 권한을 갖고 있는데, 그걸 제 잇속 차리는데 사용해서다.
제 아무리 정치인이고 재벌이고 허세를 부려도 검찰의 칼날 앞에선 추풍낙엽이다. 만약 검찰이 권력형 비리에 거침없이 칼날을 들이댔다면 국민적 신망을 한 몸에 받았을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엄정한 법집행을 위해 불철주야 발로 뛰는 검사들이 있다고 믿고 싶다. <내부자들>의 결말은 이런 희망을 말하는 것 같다. 제발 희망고문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