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가 일어난지 2년 5개월이 지났다.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참사 직후부터 꾸준히 제기돼 왔다. 이런 목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정부·여당은 진상규명 목소리에 귀를 막고 있다. 여기에 더해 진상규명 작업까지 방해하고자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까지 강제 종료시킬 기세다. 이 같은 방해공작에도 여전히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의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고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픔 당한 유가족을 돕고, 세월호 참사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지 않도록 애쓰는 이들에 힘입은 결과다.
충남 세종특별자치시에 사는 서영석 씨도 그중 하나다. ‘서영석'이라는 이름은 얼핏 낯설다. 그러나 세월호를 기억하고, 특히 페이스북에서 ‘노란 우산 프로젝트' 사진을 본 적이 있는 이들이라면 단박에 알아보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주인공이 바로 서 씨다. 사실 이 프로젝트는 오로지 개인으로서 진행하는 일이다.
지난 7일 세종시 해수부 청사에서 그를 만났다. 마침 이날은 ‘리멤버0416' 세종팀이 해수부 앞 시위를 벌인지 꼭 210회를 맞는 날이었다. 가장 먼저 어떻게 이런 일을 시작했는지, 그리고 왜 개인 자격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지를 물었다.
"세월호 참사 직후, 세종과 인근의 천안, 대전 등지에 사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리멤버 0416세종팀'을 꾸리고 매주 수요일 오전 세종시 해양수산부 청사 앞에서 시위를 한다. 올해 4월27일로 기억한다. 그날 비가 왔는데, 시위하신 분들과 식사하면서 노란 우산을 공동구매해 보는게 어떻겠냐는 제안이 나왔다. 그래서 인터넷을 검색해 판매처를 알아봤는데, 그쪽에서 기본 100개를 주문해야 한다고 했다. 20개 정도는 팀원들이 소화할 수 있겠는데 나머지 80개는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그때 난 주저 없이 주문양식을 작성해 인터넷에 올렸다. 앞뒤 재는 성격이 아니라 바로 실행했다. 그런데 다음 날 일어나보니 주문이 1,000개가 들어와 있었다."
"주문 물량을 어떻게 처리할까 팀원들과 회의를 했다. 그 와중에 그날 저녁엔 2,000개, 다음 날 아침 3,000개로 주문은 자꾸 늘어만 갔다. 한 곳에서 대량 주문한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한 두 개 주문한게 이만큼 쌓인 것이다. 팀원들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수익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위 때 노란 우산을 쓰고 해보자는 취지였기 때문이다. 팀원들이 이 일에 매달리면 애초 취지가 퇴색하고, 자칫 역효과가 우려됐기에 내가 개인자격으로 나서기로 했다."
그는 자비를 털어 우산을 사들였다. 그리고 이 우산을 일일이 포장해 주문자들에게 배송했다. 그의 원래 직업은 사진사다. 세종시에서 자신의 큰 아들 이름을 딴 사진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생계를 꾸려 나간다. 지금 그의 작업실은 우산으로 가득하다. 포장과 배송만 해도 엄청난 일이기에 생업은 손놓다시피 했다. 그럼에도 그는 포장·배송을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우산 주문을 받아봐야 큰 수익은 없다. 배송비 부담도 만만치 않다. 첫 배송은 5월 아이들을 데려와 작업실에서 했는데, 1500개 포장에 꼬빡 하루가 걸렸다. 이 프로젝트를 하려면 생업은 놓고 포장만 해야 한다. 고민이 많았지만, 계속해서 포장해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결심했다. 함께 하는 팀원들과는 우산 주문이 일주일 동안 한 건도 들어오지 않으면 그만두자고 했다. 그런데 매일 한 두 건씩 꾸준히 들어온다."
"노란 우산으로 세월호를 기억하게 하자"
그의 프로젝트는 단순히 우산을 판매해서 약간의 수익을 모금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이 세월호를 기억해주기를 원했고, 그래서 일을 꾸몄다. ‘노란 우산 프로젝트'가 한 단계 진화하는 순간이었다.
"팀원들과 노란 우산 배송 작업을 하던 도중 모금 말고 사람들이 세월호를 기억할 수 있도록 매월 날짜를 정해 우산 가지고 의미 있는 일을 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그래서 제주도, 안산, 광화문 이렇게 세 곳에서 304개의 노란 우산을 펼쳐보기로 하고 이를 페이스북에 올렸다. 첫 예정지는 광화문이었다. 그러나 우연찮게 제주도에서 독서모임을 하는 시민들과 활동가들이 연락을 해왔다. 그래서 제주도로 내려갔다."
프로젝트는 첫 출발부터 순탄치 않았다. 갖가지 제약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럼에도 그는 참사 희생자들을 떠올리며 추진해 나갔다.
"제주 쪽과 협의해 6월18일 오후 2시에 우산을 304명이 모여 우산을 펼치기로 약속하고 제주도에 내려갔다. 그런데 돌연 제주 쪽에서 못하겠다는 입장을 알려왔다. 제주도에서는 304명의 인원을 모으는 게 쉽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예정지인 성산 일출봉이 제주 시내에서 약 1시간 30분 가량 떨어져 있다는 것도 이유였다. 그러나 난 혼자라도 하겠다고 했다."
"1박2일 동안 7번을 왕복하며 제주도내 학교장과 교육감,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제주도 세월호 대책위 등을 만났다. 제주도로 가기 이틀전에는 우산을 들고 국회의원 회관을 찾아가 야당 국회의원들의 사인을 받았다. 반나절 정도면 충분하겠다 생각했는데 꼬박 이틀해도 다 받지 못했다. 야당 국회의원들의 사인이 적힌 우산 70개를 들고 제주도로 내려갔다. 프로젝트 당일까지 신청인원은 많지 않았다. 잘 안되나 보다 싶었다. 그러나 문득 희생학생들을 기억하면 반드시 도와줄 거란 마음이 들었다. 실제 이날 230명이 참여했다."
노란 우산 프로젝트는 6월18일 제주도를 시작으로 이달 10일까지 총 21회 진행됐다. 프로젝트 장소도 제주 강정, 경주, 원주, 양평, 대전 등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뿐만 아니다. 11월까지 8차례의 프로젝트를 더 소화해야 한다. 이렇게 된 데에는 방송의 힘이 컸다.
"처음 제주에서 프로젝트를 했을 때 제주 MBC에서 이를 상세히 보도했다. 원래 본사는 편파보도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데 지역 MBC는 달랐다. 그런데 이때 해프닝이 벌어졌다. 보도하는 기자가 전국에서 이 프로젝트가 진행될꺼라 한 것이다. 인천, 광주, 안산 등 각지에서 방송을 본 이들이 연락을 해왔다. 원래 광화문, 제주, 안산에서만 하려 했는데, 전국으로 확대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평일, 일요일 없이 어디든 가서 프로젝트를 했다."
※ 2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