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빼앗긴 설움 속에서도 민족의 자긍심을 잃지 않고, 청년 노인을 자처하며 항상 청년들에게 꿈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월남 이상재 선생. 27일 월남 이상재 선생의 82주기 추모회가 그의 동상이 세워진 서울 종묘공원에서 열렸다.
▲ 월남 이상재 선생의 현손 이상구 선생이 인사말을 전하고 있다 ⓒ김진한 기자 |
추모회에서 월남의 후손을 대표해 인사말을 전한 이상구 선생은 “요즘 젊은이들은 나라를 빼앗긴 경험을 못해서 그런지 애국애족 정신이 너무 결여됐다”며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조국을 내 몸처럼 여기며 조국에 헌신한 월남의 정신을 이어 받아 애국정신을 회복했으면 한다”고 전했다.
앞서 추모사를 전한 조기홍 이사장(서울 YMCA)은 “월남 선생이야말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며 “정치, 사회, 언론 등 각 분야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며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분”이라고 회고했다. 또 YMCA의 초대 총무로 활동하는 등 YMCA의 기둥이었음을 재차 확인했다.
추모사에 이어 헌화식이 진행됐다. 참석자들은 하나 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월남의 동상 밑자락에 위치한 식장으로 이동해 헌화를 했다. 월남의 동상을 한번씩 바라보며 헌화를 한 이들은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그의 동상에게서 나라를 강탈당했던 시절 그의 결연한 독립운동정신을 엿볼 수 있었다.
월남은 1902년 소위 개혁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던 중 기독교에 귀의한다. 그래서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종교부 총무직을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벌인다.
그는 특히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된 직후에는 청년들을 저녁마다 강당에 모이게 하고 “십자가 군병들아…주 위해 싸워라”라는 찬송가를 늘 부르면서 인도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월남은 한국 YMCA를 일본 YMCA에 예속시키기 위한 일제의 획책을 막고 “일본청년회 동맹은 한국 기독교 청년회 일을 간섭하지 못한다”는 조항을 삽입해 YMCA의 연합 조역을 체결했다.
1924년엔 중앙기독교 청년회의 고문이 된 월남은 더 적극적으로 YMCA 사업에 관여하게 되고, 소년척후단, 조선총 연맹 총재, 조선일보 사장, 조선 기독교 창문사 사장, 신간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