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미안하다, 교인들에게. 교회가, 나에게는, 늘 신학교실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나는 목사 안수를 받았지만, 목사의 역할이 뭔지 잘 모른다. 중학교 시절부터 교회를 쉼 없이 다니긴 했지만, 목사의 역할을 눈여겨 본 적 별로 없다. 내 어렸을 적, 목사는 “(서)양무당” 정도였다. 무당을 비하하자는 게 아니라, 집안에 무슨 우환이 생기면, 비로소 찾아가, 요긴하고도 특별한 도움을 얻긴 하나, 그 집안과 지속적 교류를 할 필요도 가능성도 고려하지 없는 사람, 업의 경우를 말한다. 다른 게 하나 있다면, 교회는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 주기적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장치(안식일)를 유대교(?)에서 빌어다 잘 쓰고 있다는 점이다(요즘, 불교도 이걸 아주 잘 이용하고 있다 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교회가 늘 배움의 집이었다. 예수께서는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어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그런 “종교”가 싫다. 그저 학교가 좋다.
서울에서도 교회를 하나 개척하였고, L.A.에서도 교회를 하나 개척하였는데, 그건 내가 종교, 교회를 좋아했거나, 교회라는 기관에 특별한 뜻을 두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들과 정기적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눌 공간, 제도적 장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중에 계속 받게 되는 중요한 도전이 있었기에, 서울에서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당신 하는 말, 그럴듯하긴 한데, 당신이 목회해 봐. 되나?” 정말? 안돼? 안되면 되게 하자는 구호도 듣긴 했지만, 비현실적인 말장난을 늘어놓고도 교수라는 직위를 이용, 생계를 꾸려나간다면, 그건 제도적 사기가 아니고 뭘까? 결국 교회라는 이름의 신학 실험장은 20여년 전에 세워졌고, 그 교회는 아직 문 닫지 않고 연명하고 있다. L.A에다 교회를 세우게 된 것도 마찬가지 사연이다.
80년대 말 서울에서, “통일”을 위한 신학자들의 모임이 처음으로 열렸을 때 일이다. “기독교 신학자들도 민족적 과제인 통일을 위하여 힘을 모아야 한다.” 이 취지에 반대할 사람, 누가 있으랴! 그러나 나는 못내 불만이었다. “우리의 통일 논의 수위, 색깔이, 다른 집단의 그것과 차별화되지 않는다면, 왜 우리가 기독교 신학자라는 이름으로 모이는가?” 그 후 나는 혼자, 통일을 생각하면서, 신학 연습을 계속하였다. 통일? 기독교 신학밖에 모르는 내가, 통일이라는 민족사적 과제 앞에 무엇을 기여할 수 있을까? 나는 본회퍼의 화두가 생각났다. “신 없이, 신 앞에,” 그리고 “복음의 비종교적 해석,” 그래, 그거야. 그는 옥중에서, 이 싯귀를 중얼거리다 죽고말았지만, 내가 그 작업을 완성하리라. 그리고 그 작업은 분명 통일에 기여할 몫이 있을 것이다, 나는 생각하였다.
당시 나의 무지한 소견으로는, 통일이 현실로 다가오는 건 시간문제이지만, 통일 이후에 남을 기독교 선교적 과제는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철저히 무신론적 세계관으로 훈련받은 북한 청년 대중에게, 예수 복음을 증거한다면, 우리가 그들의 무신론적 사유를 배우고, 그 언어를 사용하여, 우리의 복음을 증거할 힘을 길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을 거부하는 북한 젊은이들에게, 우리가 (어떤 식이든) 공갈, 폭력으로 “예수, 천당”을 믿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외에 어떤 다른 선교의 길을 우리가 알고 있는가? 나는 그때부터 내 나름의 신학 실험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통하는 예수 이야기. 그것을 찾기 시작하였다.
결국 원치 않는 방식으로 이민생활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새 언어 찾기를 시작한 셈이다. 목사직 파문, 교수직 해임 후, 3달 간, 서초동에서 법조인들과 함께 사도신경 공부를 한 적이 있다. 그때 경험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김영삼 장로 당시 대통령 교회의 집사 검사님도 함께 한 공부였다. 불과 몇 달만에 그들은 기독교 언어와 속세의 언의의 교류 가능성을 조금씩 터득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놀라운 가능성을 보았다. 하여 미국에 당도하자마자, 또 다시 신학공부 교실을 열었다.
나의 신학공부 교실의 불변하는 기반은 이것이다: 새 언어를 찾아야 한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실천해 낼 수 있는 새 언어로, 예수 체험을 이야기할 줄 알아야 한다.
예수, 그는 성전 소속 인물이 아니지 않는가? 제사장 가문 출신도 아니지 않는가? 도마복음이 정경에는 들지는 못하였지만, 그 복음서의 예수는 기도, 금식, 자선 등 전통적 종교적 요소 일체를 거부했다고 증거하고 있지 않는가? 나는 이민 목회라는 이름의 직업을 통하여, 나의 필생의 숙제, 속세에서도 통할 수 있는 예수 복음 이야기를 실험하고 찾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얻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게 무엇인가 하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을 자주 되묻는다. 예수는 당신 주변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병 고침? 그건 병원이 하고 있지 않은가? 기도하는 법? 요한복음이나 마가복음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기도의 기술을 가르쳤다는 것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지 않는가? 아니, 예수께서 기도 하는 법을 가르쳐 준 일이 주요 업무였다고 한들, 나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지 않은가? 스퐁 감독의 고백처럼, “통곡하는 무수한 사람들의 한을 무시한 채 기도하는 몇몇 사람들의 불치병만 고쳐주신다? 하느님이? 그럴 수가!” (기도를 부정하는 게 결코 아님, 바른 기도는 따로 있음) 아니면, 예수는 영생에 대한 희망을 사람들에게 주는 게 업이었는가? 아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나는 관심도 없고 믿지도 않는다. “하느님 나라” 선포가 그의 주요 업(일)이었는가? 제국, 나라, 그런 말은 시골출신 나, 이.민.자.인 나에게는 너무 고상한 말들이다. 제국, 나라, 그런 건 내가 감히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나의 삶 세계 안에는 그런 단어가 없다. 나의 삶 세계 안에 스포츠, 경제 영역이 없듯이, 제국, 나라, 그런 단어도 없다. 나는 늘, 평생, “그들의 제국” 한쪽 모퉁이에서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다 갈 것이다. 누군가가 와서, 새 나라로 이민가자 하면, “NO THANK YOU!”
그러나 나의 예수는 “이렇게 사는 법도 있다”고 가르쳐 주었고, 그것이 철원 지역의 할머니들에게도 서초동의 율사들에게도 L.A.의 한인들에게도 삶을 새로이 설계하는 지혜, 힘을 주었고, 또 주고 있다. 내가 목회 아닌 목회를 하면서 자꾸만 재확인하는 게 바로 그 힘이다. 그리고 마가복음서의 깊은 통찰을 자꾸만 재확인하게 되어 서글프다. 마가복음서에서, 목회하는 신학자 내가 발견하는 것은, 이것이다: 예수에게 나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어제도 오늘도 “높은 자리”를 탐낸다고 하는 점이다. 그 자리에 오를 실력 연마는 않고 ... “오직 믿음과 기도만으로” 그 자리에 오르려 하니 ... “사탄아, 물렀거라!”해야 하지만, 나는 아직 못한다. 먹고살기 위하여? 혹은 상처를 줄까봐 .... 그 대안으로 뱀같은 지혜를 나는 오늘도 연습 중이다. 유혹자! 화이트헤드는 바로 신을 유혹자로 상징하지 않았던가?(유혹자의 반대는 폭군!)
이것이 옳은 길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여기에 있습니다. 이웃,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하는 식의 옛 화법을 나는 싫어한다. 죄책만 더해 줄 뿐이다. 하여, 이렇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걸 얻습니다. 저렇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저 걸 얻습니다. 이걸 얻으려면 이걸 준비-실천해야 합니다. 저걸 얻으려면, 저걸 준비-실천해야 합니다. 당신 앞에 선택이 열려 있습니다. 당신이 당신 자신의 미래를 선택하십시오. 뱀처럼 은근히 유혹하는 법!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습니까? 실력을 쌓으십시오(그러나 운도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높은 자리에 오르지 않고도, 그 높은 자리에 오른 자가 누리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이 가능하다면, 당신은 그걸 외면하실 것입니까? 예수가 그 길입니다. 나는 체험했습니다. 아멘.
(LA 한아름 교회 홍정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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