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안락사와 존엄사, 어떻게 볼 것인가

NCCK 제공 / 박일준 (Ph.D. 감신대 & 이화여대)

∎ NCCK 생명∙윤리정책협의회
 
“안락사와 존엄사, 어떻게 볼 것인가?:
 모래 위에 금긋기”
 박일준 (Ph.D. ; 감신대 & 이화여대)

1. 서론: 죽음과 삶 사이를 엮어내는 욕망

어떤 이들은 죽음을 삶의 연속으로 보려고 하기도 한다. 장자의 아내가 죽었을 때 장자는 장례에서 웃고 있었다고 한다. 친구들이 찾아와 어찌 사람으로서 그럴 수가 있는냐고 책망하니, 아내는 삶의 근원으로 돌아가 평온해 졌는데, 무엇 때문에 슬퍼하느냐고 반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Graham, 65); 또한 김균진, 488 참조.  어떤 이는 죽음을 삶과 전적인 불연속 속에 놓고, 죽음을 이겨내는 삶, 즉 부활의 삶을 기독교적 본연의 태도로 보기도 한다 (본고 각주2 참조). 그 속에 우리의 삶을 향한 얽매임은 도리어 보다 근원적인 우리의 죽음에 대한 얽매임을 은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라깡이 말하는 상징적 거세가 힘을 발휘하는 것은 ‘거세당했다는 상징적 사실’ 때문이 아니라, ‘거세 당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과 ‘거세 당했다는 사실을 남들이 모를 것’이라는 욕망의 작용에 놓여 있듯, 우리는 삶을 통해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너무도 뻔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조금 더 살리려는 노력’ 혹은 ‘삶을 무조건 긍정하고 살아야 한다는 도덕적 명령’을 고이 간직하려는 것은 아닌지…
얼마 전에 국내에 개봉된 영환 <벤자민 버튼의 거꾸로 가는 시간>은 죽음과 삶의 관계성을 거꾸로 가는 시간을 가상적으로 삽입함으로써 그려주고 있다.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전사한 아들을 그리워하며, 그가 다시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만든 거꾸로 가는 시계. 이 시계는 단순히 시계공의 바람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근원적으로 욕망하는 그 무엇인지도 모른다. 더욱 더 젊어지고 싶은 욕망은 단순히 중년과 노년의 욕망일 뿐만 아니라, 보다 더 오래 살고 싶은 우리 모두의 욕망인지도 모른다.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살아가면, 그곳엔 영원한 생명만이 있을 것이라는 환상은 우리의 삶의 과정이 죽음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다는 두려움과 공포에 기반하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그러한 우리의 두려움과 욕망을 상상력을 사용하여 극한까지 확장한다. 그는 날마다 젊어간다. 시간을 거슬러 살아가는 삶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거센 풍랑에 삶을 빼앗기고만 영혼들이 살아 돌아오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된다면? 그곳에도 결국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과정으로 도래한다. 노년으로 태어나 중년을 거쳐 청년기 그리고 유년기 그리고 유아기… 그 다음은… 결국 거기엔 다시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의 욕망을 극한까지 실현한 거꾸로 사는 삶도 결국 제한된 시간 속에서만 사랑을 실현할 수 있었을 뿐이고, 그 꿈 같은 삶도 제한되고 허락된 시간 동안만 사랑할 수 있었을 뿐이다. 삶은 결국 죽음과 부둥켜 안고 있는지도 모른다. 삶이 죽음을 부둥켜 안고 있는 것은 죽음이 삶과 연속하거나 어떤 본질을 공유하기 때문이 아니라, 전혀 불연속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스카 쿨만과 알랭 바디우는 기독교의 본래적 차이를 ‘부활’ 신앙에서 찾는다. 그것은 이전의 삶을 다시 살려 놓는 것이 아니라, 부활 이전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것, 그래서 부활은 반드시 죽음을 전제한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쿨만과 바디우는 ‘삶과 죽음’을 기독교는 불연속적으로 보았다고 이해하였다 (바디우, 127-144; 쿨만, 23-31).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 사이의 절대적 차이를 전제하는 기독교 신앙이 연속성보다는 불연속성을 사유의 틀로 삼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 삶은 공허와 공백을 경험하고, 그 공백을 메우려는 욕망은 또 부질없이 죽음을 재촉하는 것들을 그 공허한 공간 속에 쌓아두고…. 우리에게 죽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역설적으로 더 살기 원하는 우리의 욕망에 기인하는 듯하다. 살아 있기에 삶을 향한 욕망을 내장한 우리는 삶을 연장하기 위해, 죽음을 지연시켜왔다. 우리가 죽음을 지연시킬 수 있는 기술과 수단을 확보한 이후, 우리는 생명을 더 살리고 연장하는 일보다는 죽음을 지연하면 생명이 연장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생명의 연장과 죽음의 지연은 다르다. 이러한 죽음 지연의 문화가 역설적으로 우리의 풍요로운 삶에 대한 희구로부터 배태되었다는 것은 역설이다. 영화에서처럼 우리가 삶을 더 부둥켜 안으려 하면 할수록, 죽음은 더 가까이 오는 듯 하다. 발달한 물질문명으로 인해 그의 도래를 지연시킬 수 있는 기술들은 발달해 왔지만, 그럴수록 아직 다가오지 않은 그 죽음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으로 우리 속에 ‘부재하는 가운데 현존한다.’ 냉동인간 현재 냉동인간은 실현 중이다. 미국 보스턴 레드 삭스의 전설적인 4할 타자 테드 윌리엄스는 “미국 애리조나 주 알코어 생명연장재단의 6번 탱크에 보관되어,” 다시 살아날 날을 기다리고 있다(바벵,30). 그 재단에는 약 50명의 사람들의 시신이 냉동창고에 보관되어 있는데, 몸 전체를 보관하는 데는 12만불, 뇌만 보관하는 데는 5만불을 지불하면 된다. 자신의 육체를 냉동인간으로 보관하는 것은 언젠가 그 ‘자신’이 그 몸으로 되살아날 것을 욕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삶에 대한 이해는 죽음을 부인하고자 한다. 그 죽음을 부인하는 몸짓이 역설적으로 죽음의 임재를 우리 삶 한 복판에 보존하게 만든다는 것이 역설 아닌가? 을 만들어 보관하는 우리의 모습이 그러한 우리 삶의 역설, 즉 살기 위하여 부재하는 죽음을 우리 삶의 한 가운데 불러들이는 역설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그러한 죽음의 현존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은폐하고 가리워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생산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 길을 손 꼭 잡고, 보내기 보다는 삶을 향한 다시 한번의 몸부림을 위해 응급실 커튼 뒤로 보낸다. 거기서 살고자 하는 욕망은 침상에 실려가는 환자의 바램보다는 죽음을 앞에 두고 죽음을 부정함으로 이겨보려는 우리의 살려는 욕망이 꿈틀거리는 듯 하다. 죽음을 응급실에서 맞이하게 되는 것, 그래서 역설적으로 삶의 가장 소중한 순간-즉 사랑하는 이를 보내는 순간-이 우리로부터 박탈된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바램과 욕망 때문인 듯 하다. 죽음을 지연할 수 있는 의료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욕망이 그토록 집요하게 발동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참고, 김균진, 『죽음의 신학』, 451-463). 
이제 우리는 절대적으로 외면하고 싶어했던 그 절대 타자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때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죽음을 삶의 연속으로 부둥켜 안거나,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새로운 생명의 도래로 소망함으로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의 생명을 연장시키고픈 우리의 욕망을 죽음의 지연으로 표현함으로서 말이다. 그 욕망이 죽음을 우리들에게 더 이상 자연스런 사건이 아니라, 의학적인 결정의 산물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우리가 마주하는 죽음은 우리의 욕망의 투사로 가득 차 있는 우리의 초상이 되었다.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죽음의 사건을 맞이하는 것은 우리 안에서 존재의 부르심을 듣는 것인지도 모른다 (Heidegger, 248). 우리가 이해할 수도, 그리고 길들일 수도 없는 그 절대타자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그 죽음의 소리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생명의 과정이 무엇인지를 지시하는 것 같다. 우리가 전통적 삶의 구조에서 그어 놓았던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너져 내리는 작금의 상황은 우리의 개념 자체가 바닷가 모래 위에 금을 긋는 것과 같은 일임을 알려준다. 파도가 와서 그 금을 다 지워버릴지라도, 또 그 모래 위에 금을 그어야 한다. 이해할 수 없는 절대 타자의 응시(gaze)를 통해서 말이다. 그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넘어, 다시 금을 그을 용기가 있는 것인가?

2. 생명의 신성성 원리를 넘어서

윤리학자 피터 싱어는 우리가 삶과 죽음의 문제에 적용하였던 전통적 윤리 원리인 ‘생명의 신성성(the sanctity of life) 원리가 도처에서 문제시 되고 있음을 증언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제 우리의 삶을 정의해 주던 경계선이 "그 가장자리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다." 싱어, 109-230; 싱어(Peter Singer)는 여기서 우리의 발달한 의료기술로 인해 생명의 시작과 마지막을 정의하는 게 너무 어려워졌다고 말한다. 우리의 전통적인 죽음 이해는 명확히 죽은 것을 죽은 것이라고 하는데 반해서, 우리가 직면한 상황은 무엇이 살아있는 것인지를 정의하기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싱어는 전통적 윤리 기준, 즉 ‘생명의 신성성 원리’를 전면적으로 재고하거나 새로운 원리에 입각해 삶과 죽음의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네덜란드의 한 연구에 따르면, 급작스럽지 않은 사망의 38%가 의학적 결정들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이 결정들은 예를 들면 생명연장 치료를 중단하거나, 잠재적으로는 생명을 단축시키더라도 당면한 고통을 경감시키는 치료를 시행하거나 안락사나 의사조력 자살 등과 같은 것을 포함한다 (Thomasma and Kushner, 248). 이렇게 놓고 본다면, "우리 시대가 당면한 물음은 의사들이 죽음을 돕도록 허락해야 하느냐가 아니라 오히려 언제 그리고 왜 그리고 어떤 상황 하에서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 이다" 라는 쿠시의 말은 더 실감 있게 와 닿는다 (Thomasma and Kushner, 248).
조나단 글로버(Jonathan Glover)도 오늘날 "생명의 신성성 원리"(the doctrine of the sanctity of life)를 우리가 다루어야 할 생명 윤리 분야의 판단 기준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전적 원리에는 우리가 담지 해야 할 그 무엇이 여전히 있다고 말한다 (Kuhse and Singer 194). 그것은 곧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여기는 곳에서, 그의 생명을 취하거나 죽이는 것은 직접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여길 "충분한 이유"(good reason)가 있다’는 것이다 (Kushe and Singer, 199). 이처럼 생명의 신성성 원리를 우리 시대가 직면한 상황에 맞는 구조로 변환을 시도하는 가운데, 글로버는 "살 가치가 있는 삶"(life worth living) 개념을 전통적으로 신성시되어온 생명 개념을 대치하는 개념으로 제시한다 (Kushe and Singer, 199). 살 가치가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는 한 신성시되어야 할 삶에 귀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에 따라 "삶만한 가치가 있는 삶"을 정의할 수 있는 기준은 환자가 삶을 의식하고 있을 수 있는가 이다. 일례로, 쇼펜하우어는 말하기를, “…주체에게, 죽음 자체는 단지 의식이 소멸하는 순간에 존재한다. 왜냐하면 두뇌의 활동이 멈추기 때문이다. 이를 따라서 진행되는 유기체 모든 다른 부분의 멈춤들은 사실상 이미 죽음 이후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주체적 관점에서, 죽음은 단지 의식에만 관련된다”(A. Schopenhauer, sec.54 재인용 Kushe and Singer, 196). 이렇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정의한다면, 문제가 되는 경우는 바로 혼수상태로 들어간 환자(comatose)의 경우들일 것이다. 더 이상 의식을 회복할 가능성이 없는 혼수상태의 환자를 보존하는 것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바로 우리가 결정해야 할 물음이 될 것이다 (Glover, 195 in Kushe and Singer).
의식이란 우리에게 그렇게 명확한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의식이란 우리가 살아있음을 정의할 때 말하고 욕구하는 상태이고, 이는 곧 두뇌의 전기적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반대로 의식의 상실은 두뇌의 전기적 활동의 상실을 의미할 터인데, 문제는, 인간의 의식적 경험을 살펴볼 때, 두뇌의 전기적 활동의 상실이 곧 의식의 상실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두뇌의 전기적 활동은 멈추었으나, 여전히 의식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예를 임사 체험(Near Death Experience), 즉 NDE에서 볼 수 있다. 임사체험자들이 겪은 경험을 어떻게 판단하든지 간에, 그들은 두뇌의 뇌파 활동이 멈춘 이후에 얼마간 의식적 경험을 하였고, 그것을 간직한 채 삶으로 되돌아 왔다. 최준식, 95-102; 무디 주니어, 25; 베커, 44-48; 펜윅, 31.  이렇게 놓고 본다면 의식의 상실을 어떻게 판별할 수 있을 것인지가 매우 모호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싱어는 뇌사 문제를 언급하면서, 우리가 정의하는 그 어떤 뇌사에 대한 기준도 인위적일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문제는 그 인위적 기준을 정하여 결정해야 하는 때라는 것이다 (싱어, 37-57). 안락사와 존엄사를 논하는 모든 논의도 뇌사를 다루는 싱어의 이 냉소를 피할 길은 없는 듯 하다. 그 어떤 정의로 안락사와 존엄사를 구분하여 합법화의 선을 긋는다 해도 근원적으로는 우리의 인위적 구분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로 조울증 환자의 자살 충동이 있다. 조울증(manic-depressive disorder)과 우울증(depression)의 차이는 조울증 환자가 우울증 환자보다 훨씬 더 강하게 자살 충동을 느낀다는 것이다 (Corrington, 2-5). 왜냐하면 광휘(manic)와 우울(depressive)의 두 무드 사이에서 요동하기 때문에 동일하게 우울한 상태라 하더라도, 우울증 환자보다 더 극심한 추락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환자의 죽고 싶은 의지 표현이 환자의 이러한 무드 변화 때문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상의 경우, 환자의 "무드" 변화가 그 환자로 하여금 자살 충동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지, 그 환자가 온전히 죽을 의지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우울증(depression) 상태를 벗어나면, 자살충동은 거의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즉 환자의 살거나 죽고 싶은 욕구는 그가 살만한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의 결정적인 지표가 되지 않는다(Glover in Kushe and Pinger, 199). 그렇다면 "살만한 가치가 있는 삶"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문제를 보다 어렵게 하는 것은 우리가 존엄한 생명을 정의하는(외적인) 기준들은, 우리가 인간인 이상, 우리 인간의 상대적 편견과 선입견들을 피할 길은 없어 보인다. 인종 차별주의(racism)나 종 차별주의(specisism)의 (비)윤리가 우리들에게 가르쳐주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의식이 진화의 단계들을 따라 상대적인 정도의 문제라면, 의식을 기준으로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말할 근거도 또한 없어진다 (Glover, 197). 고등동물의 의식을 인간 의식과 구별하는 기준은 매우 상대적이고 임의적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식을 다른 동물들의 것보다 더 존엄하다고 말하는 입장을 ‘종 차별주의’(specisism)이라 한다. 적어도 삶과 죽음의 경계에 관하여 우리가 원하는 기준은 외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경계는 주체의 관점에서 바로 그 삶이 살만한 가치가 있느냐를 기준으로 정해질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삶은 언제나 ‘나의 삶’이기 때문이다 (Heidegger, 49). 결국 ‘살만한 가치가 있는 존엄한 삶’을 정의할 객관적이고 외적인 기준을 세워나가는 일은 불가능해 보이며, 가능할 경우는, 싱어가 지적하듯이, 우리가 임의적인 경계를 세워나갈 때뿐이다.

3. 모래 위에 금 긋기: 존엄사와 안락사의 구분

그렇다면, 이제 모래 위에 우리의 임의적인 선을 어떻게 그려 넣을 것인지를 토론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인터넷 다음백과사전은 “안락사”라는 항목을 설명하면서, 영어로 euthanasia라고 표기하고, 바로 ‘존엄사’라는 설명적 정의를 덧붙여 놓았다. 이는 우리가 안고 있는 용어 정의의 문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지표이기도 하다. 안락사는 euthanasia로, 존엄사는 ‘dying with dignity’로 구분하는 것은 안락사 논쟁을 우회하여, 존엄사를 합법화 하고픈 의도가 간여되어있을 것이며, 존엄사와 안락사를 같은 범주로 묶는 것은 존엄사처럼 안락사를 사회적으로 수용 가능한 개념으로 만들고 싶은 의도의 간여일 것이다. 예를 들어, 차미영은 정의하기를, 안락사란 “불치의 질병에 걸려 죽음의 단계에 들어선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그 환자를 죽게 하는 것”으로 정의된다(차미영, 96).  그리고 또한 존엄사를 구분하면서, “환자의 고통이 그다지 문제되지 않으며 환자 자신이 의식불명으로 인하여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점”을 존엄사의 정의로 기술하였다 (차미영, 114). 그의 말을 다시 한번 빌리자면, “단지 생명유지 장치에 의하여 인공적으로 연명할 뿐 다시 소생할 가능성이 없는 혼수상태나 뇌사상태의 환자가 품위 있게 죽을 수 있도록 생명유지 장치를 제거하여 생명을 단축시키는 행위”를 존엄사로 구별한다 (차미영, 114). 하지만 이런 식의 정의는 소극적 의미의 안락사와 존엄사를 명확히 구분해 주지 않고 있다. 최준식에 따르면, 존엄사란 표현은 일본에서 유래하는 표현으로서,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키면서 죽는 가장 이상적인 죽음"을 말한다 (69). 그에 따르면, 소극적 안락사와 존엄사는 엄연히 다른데, 소극적 안락사는 모든 "연명치료 중단"을 포함하는 용어인 반면, 존엄사는 환자가 의학적으로 "회복 불가능한 중증 질환의 말기라는 의사의 진단"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사전의료 지시서나 법적 대리인 위임장"을 통한 "환자 본인의 의사가 반드시 기록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한다 (71). 간단히 말하면, 환자 본인의 의사표시가 확인되면 존엄사이고,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면 ‘소극적 안락사’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최준식의 이러한 용어 정의는 당장 차미영의 정의와 충돌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환자 자신이 의식불명으로 인하여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으로 존엄사를 정의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용어 혼동은 당장 연세 의료원 사건이 존엄사에 해당하는 것인지 혹은 소극적 안락사에 해당하는 것인지를 매우 불투명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토마스마(D.C. Thomasma)와 쿠쉬너(T. Kushner)는 ‘생명/죽음의 연장’ 항목을 ‘안락사와 의사조력 자살’ 항목과 구별하여 배치한다. 무의미하게 죽음을 지연시키는 일을 ‘안락사’와는 다른 항목에 배치한 것이다. 여기서 눈에 띄는 점은 ‘존엄사’(death with dignity)란 표현 대신, "무의미한 의학적 치료를 중단하는 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존엄사란 표현을 둘러싼 뉘앙스는 각자의 미묘한 입장을 반영한다.
그래도 논의를 진척시키기 위해, 대략적인 가설적 정의(working definition)을 세워보자.  생명을 죽이는 것은 어떤 경우도 "절대로" 용납될 수 없지만, 사실 이 ‘절대’ 혹은 ‘어떤 경우도’라는 말이 늘 속임수다. 실재로 ‘어떤 경우도’에 해당되는 사항이라면, 이미 이 문구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미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그 절대적 ‘금지’에 언제나 그리고 이미 ‘예외’가 삽입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 삶의 복잡성과 중층성은 ‘죽음을 선하게 맞이하고, 준비해야 할’ 경우들을 포함한다. 그런 경우들 중 특별히 죽음을 맞이해야 하지만, 긴 과정을 예감하는 경우, 자신의 의지로 혹은 대리인의 도움을 받아 무의미한 삶의 말기 과정을 조기에 종결시키는 행위를 안락사라 한다. 안락사는, 희랍어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eu (good) + thanatos (death) = Eu-thanasia (good death)란 의미를 어원적으로 담고 있다. 하지만 그 종류들은 겉보기보다 다양해서, 먼저 ‘직접적’(direct) 안락사와 ‘간접적’(passive) 안락사가 있다. 즉 제공된 원인이 직접적으로 작용하여 사망에 이른 경우를 말하는 것이며, 간접적이란 행위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부차적으로 죽음이 초래된 경우를 말한다.
직접적 안락사는 다시 ‘적극적’(active) 안락사와 ‘소극적’(passive) 안락사로 구별되는데, 적극적 안락사는 죽음을 초래하기 위해 능동적인 즉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면, 의사가 약물을 투여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의 개입 말이다. 1962년 12월 22일 나고야 고등법원의 판결은 적극적 안락사를 인정하면서, 다음의 조건들을 전제로 달았다: 1) 치료 불능에 대한 의사의 판단이 있을 것 2) 환자의 극심한 고통이 있을 것 3) 본인의 진지한 촉탁이나 승낙이 있을 것 4) 의사가 윤리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 (차미영, 102). 소극적 안락사는 적극적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예를 들어 인공생명장치를 제거함으로써, 죽음이 도래토록 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보다 더 간단하게 말하면, 적극적 안락사는 "환자를 죽이는 것"(to kill)이고, 소극적 안락사는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to let it die)이라고 볼 수 있다 (김진, 73). 이 외에 의사조력 자살(physician-assisted suicide)이란 범주가 있는데, 불치 환자가 죽음을 소망하는 경우, 의사가 자살가능 방법을 알려주지만, 행위에는 직접 개입하지 않는 경우를 가리키며, 현재 국내 형법으로는 자살교사, 방조행위로서 위법으로 간주된다고 한다 (차미영, 106).
또한 환자의 의사표명 여부에 따라, 안락사를 구분하기도 하는데, 자의적(volunatry) 안락사, 반자의적(involuntary) 안락사, 비자의적(non-voluntary) 안락사로 구별하기도 한다 (김진, 74). 먼저, "환자가 구두 또는 서면으로 의사의 도움을 받아 죽게 해 달라고 요청"한 경우, 1) 의사가 조치를 제공하고, 환자가실행하면 이 경우 의사원조자살로 분류하고 2) 의사가 직접 시술하면, 직접적 안락사가 되며 3) 생명유지 수단을 제공하지 않으면, 수동적(간접적) 안락사에 해당한다. 물론 전제는 언제든지 환자는 자신의 의사를 번복할 권리와 자신의 병의 상태에 대하여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반자의적 안락사가 있는데, 환자는 살기 원하지만, 타인(들)의 의지에 의하여 강제적으로 죽게 되는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 이 경우는 안락사가 아니라, 살인의 범주에 속하며, 나치의 인종청소가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김진, 75). 세 번째로 이번 연세의료원 사건에 해당하는 경우인데, 비자의적 안락사가 있다. 이는 의사표명이 불가능한 환자의 경우, 환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판단한 권리를 지닌 법정 대리인이 안락사 여부를 결정하는 경우를 말하는데, 환자가 직접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환자의 권리는 언제나 보호자의 권리로 둔갑할 가능성이 상존하며, 이 경우 환자의 권리를 보호자의 이익관계로부터 어떻게 구별하여 우선 순위를 둘 것인가의 문제가 논의의 초점이다 (김진, 75-76).
이상에 덧붙여, 윤리적 관점에 따라 안락사의 유형을 구분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자비적 안락사, 존엄사, 선택적 안락사가 그것들이다 (김진, 75-77). 자비적 안락사란 더 이상 생존가능성이 없을 때, 극한의 고통으로부터 환자를 벗어나도록 해주기 위한 안락사로서, 서서히 죽도록 방치하는 방식보단 직접 죽이는 방식을 채택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현행 법 체계상 논란의 여지가 많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존엄사(euthanasia with diginity)는 “환자의 고통이 그리 문제되지 않으며, 환자 자신이 의식불명으로 인하여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생명유지 장치에 의한 인공적 생명연장상황의 혼수상태나 뇌사상태 환자가 품위 있게 죽을 수 있도록 보조장치를 제거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가리킨다 (차미영, 114). 환자 본인이 불필요한 죽음지연 치료를 거부한다는 의사를, 즉 존엄한 죽음을 맞을 의사를 미리 밝혀 두었을 경우, 대부분 합법적으로 시행된다. 적극적 혹은 소극적 안락사와는 별개로 말기에 진입한 환자는 ‘심폐소생술거부’(‘Do Not Resuscitate’ Order)를 할 수 있다. 환자와 가족의 동의를 전제로 의사가 DNR 처방을 내리면, 환자가 심폐정지상태로 들어가면, 그를 소생시키기 위한 의학적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이다.
* 또한 사전의료지시서(advance directive)은 환자가 아직 의식이 뚜렷하고 판단력이 서 있을 때, 미리 자신이 의학적 결정들을 내리기 어려운 때 받을 치료의 류를 정해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임종 직전에 중환자실을 갈지, 인공호흡기를 달지, 심폐소생술을 시행할지, 진통제를 투여할지 등등의 치료들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환자가 자신이 받을 의학적 치료에 대하여 미리 정해 놓을 수 있다. 이 경우, 의사나 가족이 내리기 어려운 여러 가지 논쟁적인 의학적 결정들을 환자 본인의 앞선 의지(living will)에 따라 내릴 수 있어서, 불필요한 논쟁과 죄책감을 없앨 수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널리 시행되지 않고 있다.
* 또 다른 한편으로 안락사에 대한 대안으로 호스피스 케어가 제시되기도 했다 (Robert J. Miller, “Hospice Care as an Alternative to Euthanasia” Law, Medicine and Health Care, vol.20, no.1-2 (Spring-Summer 1992, 127-132).  마지막으로 선택적 안락사(selective euthanasia)라는 류가 있는데, “사회 공동체의 존재에 부담이 되는 구성원들을 제거한다는 차원에서” 부적절한 구성원들을 선택적으로 도태시키는 행위로서 현행법 상 살인행위에 해당한다 (김진, 77). 현재 가장 논의가 많이 되고 있는 유형의 안락사는 ‘의사-조력 자살’과 "자발적인 적극적 안락사"(voluntary active euthanasia)와 "자발적인 소극적 안락사"(voluntary passive euthanasia) 혹은 존엄사이다 (Bernat, 2723).
이러한 작업가설적 구분을 전제로, 안락사와 관련된 논의를 대략적으로 정리해 보자. 안락사 합법화를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를, 김진의 글을 빌려, 요약하면, 1) 환자의 자율성과 존엄성이 존중되어야 하며 2) 이미 삶의 영위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고통을 감수하면서 인위적 수단을 통해 죽음을 연기하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비인도적임을 인정해야 하며 3) 다른 가족과 사회에 삶의 짐이 되는 것이 비윤리적임을 수긍하자는 것이다 (김진, 81-82).
그와는 반대로, 안락사를 반대 근거들을, 김진의 글을 빌려, 요약하자면, 1) 안락사는 “근본적으로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이다 2) 안락사의 합법화는 가족관계의 훼손을 가져올 수도 있다. 환자의 치료에 대한 정부차원의 대책이 부실한 우리나라의 경우, 환자 가족이 떠 안을 재정적 부담이 안락사를 유도하는 압박요인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3) 안락사는 유사한 사회문제에 확대 적용될 소지가 농후하다. 즉 신체나 정신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나 노인들이나 빈곤층에게 안락사가 선택으로 제시된다는 것은 곧 그 소외계층들에겐 "죽어야 할 의무"로 변질될 소지가 농후하다는 것이다 (김진, 84); 넷째, 안락사 허용은 의사와 환자 사이 관계를 파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 안락사의 시행여부를 가능케 하는 것은 환자가 이미 회복불능의 죽음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의료진의 판단이 언제나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의사는 생명을 살리는 이로부터 죽음을 판정하는 이로 기능과 역할이 바뀌게 된다. 이 전이가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변질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김진,82-84).
반대 논거의 핵심은 생명의 존엄성 원리(the principle of the sanctity of life)를 근거로 볼때, 어떤 형식의 안락사도 허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발달한 죽음지연 기술로 인해 죽음의 시점을 임의적으로 정해야 할 시대에 돌입해 있다. 죽음을 지연시키는 것(deferring death)은 생명을 연장하는 것과 다르다. 죽음을 맞이할 수 없다면, 생명도 도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지연시키는 행위를 생명을 연장하는 기술로 미화하고 포장하고 있다. 남용의 가능성 때문에 죽음의 문화를 조장하거나 악용될 소지를 우려해서 반대해야 한다는 견해들도 있다. 그러나 남용과 악용의 가능성은 이미 부담스런 의료행위의 중단에 이미 내포되어있다. 그래서 김상득은 안락사 논의를 위한 세 가지 전제를 제안한다: 1. "의사에 대한 신뢰"—소극적 의미의 안락사를 인정한다 해도, 결정적인 것은 소생가능성이 없다는 의료진의 판단이다. 이에 대한 신뢰가 형성되지 못한다면, 안락사 논의는 진행될 수 없다 2. 환자가 경제적 조건과 부담에 강요됨 없이, 자율적으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도록 "건강보혐제도"의 개선이 수반되어야 한다. 국내에서도 임종 말기 환자의 치료비가 전체 진료비의 30%에 육박하며, 그에 대한 경제적 부담은 환자 본인이나 환자 가족이 고스란히 떠안게 되어있다. 이 경우, 존엄한 죽음은 선택한 것인가, 아니면 강요된 것인가?; 3. 환자 보호자가 아니라 환자 본인의 의사를 존중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적극적으로 마련되어야 한다. 환자보호자가 환자를 대신해서 의사를 행사할 경우, 환자의 권리가 언제든지 보호자의 권리로 둔갑할 가능성을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자 본인의 의사를 담은 유언(living will)과 같은 사전의사결정(advanced directives) 조치에 대한 적극적인 홍보가 필요하다 (김상득, 2005.4.13).

4. 생명존중과 인권, 그 모호한 불협화음

카톨릭교회는 1980년 안락사 선언문(Declaration on Euthanasia)에서 그 어떤 종류의 안락사에도 반대한다고 재확언했지만, 그러나 ‘잠재적으로 생명을 단축할 수 있지만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치료’나 ‘부담스런 처방의 중단’에 대해서는 허락했다(Kuhse and Singer, 203-207; Thomasma and Kushner 1996, 248). 카톨릭교회의 “Declaration on Euthanasis”에 따르면,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계획(God’s plan)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고, “의도적으로 자기 자신의 죽음을 야기”하는 것은 바로 그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거절로서 “살인만큼” 잘못된 일이다(Kushe and Singer, 203-204). 여기서 죽음을 야기하는 행위와 죽음이 찾아오도록 하는 행위 간의 구별이 있다. 죽음도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가 될수 있다. 하나님이 약속한 영생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태를 기만적이게 만드는 것은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 사이에 인위적인 경계를 설정하는 일이다. 이 카톨릭교회의 선언문을 살펴보면, “존엄사”(dying with dignity)라는 표현은 “불확실하고, 부담스러운 생명연장” 치료에 대한 거절이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Kushe and Singer, 205-206).  대략적으로 이 카톨릭교회의 관점은 우리가 ‘관습적’이라 할 수 있을 범위의 관점을 대변한다 (Thomasma and Kushner 1996, 248). 그 경계는 안락사란 한 행위의 결과로 ‘한 생명을 죽였다’(killing)는 것이고, 그로부터 존엄사, 즉 고통경감 치료나 부담스런 치료행위의 중단을 경계 짓는 것은 ‘죽도록 내버려두었다’(letting die)는 것이다.
하지만 말기 암환자에게 약물을 투여해서 고통의 시간을 줄여줌으로써, 죽음을 초래했다는 것과 단순히 인공호흡기의 스위치를 끄는 행위 간의 차이가 과연 윤리적으로 허용할만한 행위를 구분하는 의미 있는 경계가 될 것인가? (Thomasma and Kushner, 249-251). 죽음의 고통이 엄습해오는 순간, 그 고통을 줄여줄 수 있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 모두 ‘사망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비윤리적으로 비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안락사를 본인의 의지로 요청하는 경우, 본인이 자신에게 닥칠 죽음을 예감하기 때문이다. 본인의 요청이 없는 경우 혹은 본인이 의지표명을 할 상태나 상황이 아니어서, 환자 가족이나 친지가 안락사를 요청할 경우, 이미 죽음의 과정에 진입했다는 의료진의 동의가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안락사는 살인행위와는 전혀 다른 행위라고 보아야 한다. 쿠시(Helga Kuhse)는 ‘죽음을 초래하는 것’과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의 차이에 근거하여 안락사와 무의미한 치료중단을 구분하기를 멈추고, 환자 본인의 최선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환자가 ‘존엄한 죽음’(a dignified death)을 맞이하는가를 기준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Thomasma and Kushner 1996, 254). 우리 사회의 다양한 윤리적/도덕적 다양성을 놓고 볼 때, 어느 한 집단의 윤리적 가치기준을 사태에 일방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사회에 위화감을 도리어 더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존엄한 죽음에 대한 가치기준을 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가치기준은 바로 "개인의 자율성 혹은 자유"(personal autonomy or liberty)라는 것이다 (Thomasma and Kushner, 255).
같은 맥락에서 레이철스(James Rachels)도, 환자의 인권과 이익을 최대로 고려할 경우,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는 의미 있는 차이가 아니라고 본다(Kushe and Singer, 227-230). 먼저, 소극적 안락사를 적극적 안락사와 다르게 보는 입장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의사가 환자의 죽음을 위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레이철스는 주장하기를 그 의사는 분명히 중요한 무엇인가를 시행했다, 즉 그는 "환자가 죽도록 하였다" (Kushe and Singer, 230). 그의 가는 길에 더 이상의 고통이 함께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의사와 가족들은 죽음을 지연시키지 않기로 하였고, 그래서 행위 하지 않기로 행동을 취하였다(non-active action). 그리고 이 행동하지 않기로 한 행위는 환자를 약물을 투여해 죽인 행위와 수단의 차이만 있을 뿐 그 의도와 목적에서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환자의 입장에서 고려할 경우, 그 목적-죽음의 도래-이 같다면, 그 효과가 빠르고 확실한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뒤집어 이야기하자면,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를 구분하는 것은 의사나 가족의 윤리적 죄책감을 덜어주는 데에는 큰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환자 자신의 입장으로 보면, 결과는 이미 결심하였으므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다지 의미 있는 차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Kushe and Singer, 230). 요점은 죽이는 것과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언제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보다 ‘죽도록 조치를 취해주는 것’이 나을 수도 있는 형편들이 실제한다는 것이다 (Kuhse and Singer, 236). 소극적 안락사도 이미 ‘소극적인 방법으로’ 안락사를 시행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쿠시(H. Kushe)는 주장한다 (Kushe and Singer, 238). 그렇다면, 만일 소극적 안락사의 방식을 통해 환자가 이롭게 될 수 있다면, 동일한 상황에서 적극적 안락사의 방법으로도 환자는 동일하게 이로움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Kushe and Singer, 238). 적어도 환자의 관점과 이로움만을 고려할 경우 말이다.
언급한바,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 간의 차이를 느끼는 것은 환자 자신이 아니라, 그 환자의 가족과 그를 담당한 의사, 즉 그가 속한 사회일 가능성이 크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우리 자신의 윤리적 죄책감 때문에 그토록 친절하고 섬세한 구분을 우리는 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안락사는 환자 자신의 자기-결정권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그의 치료를 담당한 의사와 그를 돌보아야 할 가족 등의 관계로 설정되어 있고, 그렇다면 삶의 마지막 과정을 결정할 기준은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아니라, 그 모든 관계성이 속한 공동체일 것 같다. 그래서 칼라한(Daniel Callahan)은 삶에 대한 권리는 그 사람이 속한 공동체에 의해 조건 지워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 공동체는 자기-지향적인 개인들의 단순한 집합체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Kushe and Singer, 327). 그에 더하여, 안락사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의사진에게 부여되는 힘이 부적절하게 과도하다고 지적한다. 그들이 환자 주체의 입장에서 생명과 죽음에 대한 주장들을 평가하고 판단할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Kushe and Singer, 331). 안락사란 주변 사람들, 즉 의료진과 가족들의 동의를 구하여 결정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하드윅(John Hardwig)은 우리를 한데 엮은 가족의 삶이 자신과 관련한 결정들을 독자적으로만 내릴 수 없도록 한다고 말한다 (Kushe and Singer, 340). 많은 말기 환자들은 인생 남은 목표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Kushe and Singer, 341; 김상득). 그래서 안락사에 관한 결정을 내릴 때, 그 사랑하는 가족들과 더불어 같이 이야기 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래서 결정은 환자 자신의 자기-결정권이 아니라 "가족 결정권"(family decision)이어야 한다고 하드윅은 말한다 (Kushe and Singer, 344). 우리의 삶의 연관성은 우리의 삶의 의미를 채워가지만, 동시에 그 연관성이 우리의 죽음에도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Kushe and Singer, 347).
이상의 의미에서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를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Bernat, 2724). 도덕적 죄책감도 남겨진 사람의 몫이고, 그것을 시행할 수 있는 법적 경계를 만드는 것도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환자가 합리적 판단력을 가지고 치료를 거부할 때 이는 존중되어야 한다. 이러한 환자의 치료거부가 환자의 청원과 혼동되면, 윤리적 혼동이 일어난다. 청원(request)는 숙고해보고 거절할 수 있는 문제의 경우이지만, 환자가 합리적 판단에 근거해 거절했을 경우는 의사가 그 거절 의사에 반하여 치료행위를 수행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Bernat, 2724). 아울러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를 의사의 행위와 행위의 생략 혹은 태만으로 간주할 때, 그 양자 간의 구별을 희석시키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안락사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건은 바로 "환자 자신의 치료 거절"이기 때문에 소극적 안락사의 경우, 살인(killing)이 아니라 "죽도록함"(letting die)가 되는 것이다 (Bernat, 2724). 안락사 논쟁에서 소극적 안락사를 존엄사라 칭하면서 수용할만한 것으로 만들 때 일반적으로 중시하는 근거는 치료를 중단했기 자연적인 질병으로 사망한 것이지, 죽음을 의도적으로 초래한 것은 아니라는 심리적 효과이다. 하지만 급식 튜브를 제거하거나 호흡기를 제거했을 때 환자들은 탈수나 영양부족으로 사망하는 것이지 결코 자연적 질병과정으로 인해 사망하는 것이 아니다. 즉 존엄사는 ‘살인’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합법화하려는 우리의 논의는 핵심을 의도적으로 가리고 있다. 그것은 곧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안락사를 시행하는 근거는 환자 자신의 판단 역량(competence)과 합리적 결정이지 결코 자연적 죽음과정이기 때문이 아니다 (Bernat, 2725).
그렇다면, 만일 우리가 환자 자신의 판단 역량에 근거하여 안락사를 허용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의사조력자살과 적극적 안락사 그리고 소극적 안락사 사이에, 환자 자신이 판단을 내리는 방향과 목적에 근거해 볼 때, 정말 의미있는 차이가 있는 것인가? 왜냐하면 적어도 앞의 두 경우, 선택은 전적으로 환자 자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Brock, 10). 즉 환자 자신의 목적과 의도를 고려할 경우, 의사조력자살이든 적극적 안락사든 소극적 안락사든 큰 차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차이는 오히려 살아남을 남겨진 사람들에게 두드러지는 것이다.

5. 무너진 경계를 다시 세우기 위해

이제 살아갈 자들을 위한 이야기가 핵심인 듯이 여겨진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하이데거는 말한 적이 있다. 삶과 죽음이라는 사건 계기들은 원초적으로 언어적인 상황이 전혀 아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도래하는 것은 그 계기들이 언어를 통하여 우리 삶에 상처와 흔적을 남기고 사라져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리는 그의 ‘도래함’ 속에서가 아니라, 그의 ‘사라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다. 삶과 죽음의 진리를 담지한 채 사라져 가는 사건들을 다시 모은다는 것은 결국 우리 현재 세대의 몫이다. 언어 너머의 사건들을 언어라는 부정확한 집게로 모아 우리 존재의 집을 다시 세워야 오늘 밤 평온한 밤을 허락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흔적들을 따라가 보자.

진리 사건 1): 작년(2008) 11월28일 식물인간 상태인 75세 김모씨 연명치료가 무의미하다며 자녀들이 병원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법원이 김모씨로부터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특별히 "환자의 회복가능성이 없어 치료가 의학적으로 무의미하고 환자의 치료중단의사가 추정되는 경우 의사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기한 인공호흡기 제거 요구에 응할 의무가 있다"고 판결하였다 (서울=연합뉴스 11월28일).
현재 연세의료원은 고등법원의 판결에 불복하여 대법원에 상고하는 절차를 밟았다. 우선 고등법원은 1월 10일 판결에서 연명치료 중단의 네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1) 회생가능성 없는 비가역적인 사망과정에 진입, 2) 환자의 진지하고 합리적인 치료중단의사, 3) 중단을 구하는 치료행위의 내용, 그리고 4) 의사에 의한 치료중단의 시행" (Online: http://healthlog.kr/836, 2009년 2월26일). 연세의료원이 대법원에 상고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알려진다. 우선 환자가 비가역적인 죽음의 과정에 이미 진입해 있다고 해도, 환자의 의사를 물어야 하는 두 번째 조건이 모호한 판결이라고 보고 있다. 이미 비가역적인 사망과정에 접어들어 자기 의사를 표현하기 어려운 환자의 의사를 묻는다는 조건은 그다지 의미 있는 조건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경우, 보호자와 병원이 치료중단결정을 내릴 수 없다면, 고등법원의 판결은 그저 문구로만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다른 신체기능에는 그다지 큰 장애가 없지만, 단지 호흡기만 제거하면 생명에 지장이 있을 경우를 "비가역적 사망과정에 진입한 것"으로 봐야 하는지를 가려달라는 것이다 (Online: http://healthlog.kr/836, 2009년 2월26일).

진리 사건 2): 연세의료원의 상고는 지난 1997년 보라매 병원에서 일어났던 사례를 생각해 볼 때, 적절한 것으로 여겨진다. 1997년 12월4일 김모씨(58세)는 술취한 상태에서 집에서 넘어져 쓰러져, 집주인의 신고로 보라매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신경외과 수술팀은 외상에 의한 뇌출혈로 판정, 당일 오후7시부터 익일 새벽2시까지 응급수술을 시행하였고, 수술 도중 출혈이 심하여 38병을 수혈해야 했다고 한다. 수술 후 환자는 의식불명상태로 인공호흡기로 호흡을 연명하던 중, 다음날 즉 12월5일 환자의 부인이 의료비 감당이 불가능하다며, 퇴원을 요구하였고,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부인의 강경한 태도로 인해, 담당의는 퇴원요구/부인의 각서를 받고 퇴원조치 시켰다고 한다. 당시까지 병원비는 약 700만원 정도가 청구되어 있었고, 그 중 환자 본인부담액은 250만원였다고 한다 (김진, 52). 퇴원절차 후, 구급차로 환자를 자택으로 이송한 후, 간이 인공호흡기를 제거하였고, 그후 얼마 있다 환자는 사망하였다.
98년 1월10일 남부지청 이중희 검사는 ‘2-3일 후 회복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요청만으로 퇴원 조치는 의사들의 의학적 판단에 따라 관리 되어야 하는 중환자를 방치한 살인행위로 판단, 의사3명과 부인을 살인 혐의로 기소하였다. 그리고 98, 5, 15 남부지원 선고공판은 담당 전문의와 전공의에게 징역2년6개월과 집행유예3년, 부인에게 징역3년 집행유예4년을 선고, 집으로 이송을 담당한 인턴에게는 무죄 선고하였다. (김진, 53).
우리의 가치와 윤리 기준으로 당시 선고는 적절한 듯 보인다. 생명은 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환자 가족은 부인이 전처 소생의 두 자녀와 단칸 방에서 어렵게 살림을 유지하고 있었다. IMF 후 하루하루의 생계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김진, 54), 그리고 국가가 환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 주지 않는 상황에서, 환자의 치료비나 생활을 고려치 않고, 환자를 돌볼 책임을 가족이나 의사들의 직접 당사자들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이었는가? 하는 물음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이 경우, 법은 무엇을 기준으로 ‘삶’과 ‘생명’을 정의한 것이었을까? 본인의 의지로 죽음지연 치료를 거부하는 경우와 경제적 이유로 더 이상의 치료를 포기하는 경우를 동일한 잣대로 구분해야 하는가? 만일 경제적 이유로 치료를 할 수 없는 상태를 치료받게 하려면, 그를 뒷받침할만한 국가의료보험 체계나 제도가 준비되어 있는가? 만일 준비가 안되었다면, 경제적인 책임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환자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진리 사건 3) 사실 소극적 안락사나 존엄사를 고려할 때 우리의 뇌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건이 있다. 이른바 퀸란 사건인데, 75년 당시 뉴저지에 거주하던 21세 퀸란 양은 친구 집 파티에서 진토닉에 농약(혹은 신경안정제)을 섞어 마신 뒤 쓰러졌다. 검사 결과 회복 불가능한 대뇌 손상을 입었음이 밝혀졌고, 소위식물인간 상태로 들어가 인공호흡장치와 인공영양장치에 의존하는 신세가 되었다. 사건 발생 3개월 후, 식물인간 상태인 딸의 생명연장이 의미 없다고 판단한 아버지 조셉 퀸란은 인공장치의 제거를 법원에 청원, 1심에서는 기각 당했으나 대법원에서 다음의 조건들을 전제로 허락받았다: 1) 후견인의 선택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인정되어야 한다 2) 대다수 사회 구성원이 납득할 수 있는 선택이어야 한다 3) 책임 있는 의료진이 환자의 회복불가능성에 대하여 책임 있는 판단을 내리고 병원 윤리위원회에서 인공장치 제거의 승인이 있을 시에만 허락한다. 이 사건은 뉴저지 주 대법원이 식물인간상태의 인공적 연장거부를 “헌법에 보장된 프라이버시의 권리”에 속한다고 판결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불필요한 의료행위에 대한 거부권이 privacy에 속한 권리로 인정된 것이다.
필자를 고민하게 만든 것은 퀸란 양 사건이 존엄사의 법적인 기준을 만들었다는 역사적 중요성에 있지 않다. 오히려 장치 제거 후 퀸란 양이 9년을 더 살아 남았다는 사실이다. 인공호흡장치 제거 후 9년을 더 살다가, 1985년 6월 폐렴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이는 우리가 갖고 있는 소극적 안락사나 존엄사를 확고부동한 기준으로 처리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려주는 예가 된다고 여겨진다.

진리사건 4) 아내를 총으로 쏘아서 안락사 시켰던 로버슨씨 사건--2006년 4월25일 당시83세의 제임스 로버슨씨는 집에서 아내를 권총으로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을 기도하다 미수에 그쳐 체포되었다. 1930년대 달라스 애덤슨 고등학교에서 아내 메리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1946년 결혼 후 줄곧 삶을 같이 했던 이 부부는 1991년 메리가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불행의 그림자를 떠안게 된다. 딸로부터 요리하는 법과 간호하는 법을 배워 정성으로 아내를 돌보던 제임스는 아내가 두번째 중풍으로 몸을 전혀 가누지 못하는 상황에 빠지고, 자신도 뇌까지 전이된 말기 암 상태에 들어가면서, 벼랑끝으로 내몰린다. 몸을 가누지 못할 아내를 요양원에 보내고 자신 홀로 죽을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제임스는 무의미한 죽음 지연의 방법들에 의존하기 보다는 ‘존엄한 죽음’을 선택하기로 하고, 아내를 권총으로 먼저 보내고, 자신도 같이 가려다 불발탄이 되는 바람에 체포되었다 (오마이뉴스 기사, 2006년5월1일).

진리 사건 5) 테리 시아보(Terry Shiavo) 사례는 그녀의 남편 마이클 시아보가 이미 7년 전에 식물인간상태로 진단받은 아내 테리의 생명유지 장치를 끄려는 7년간에 걸친 법적 시도를 말한다. 1993년초 테리의 보호자로서 심폐소생술거부명령을 제출하였으나, 병원 의료진들에게 거절당하였고, 1998년 플로리다 법(Section 765.401)에 근거하여 급식 튜브를 제거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원을 법원에 제출하였지만, 테리의 친부모, 로버트 쉰들러와 메리 쉰들러가 반대하였다. 2005년 5월31일 병원에서 탈수로 사망하기까지 테리는 15년간 식물인간상태로 있었으며, 이를 둘러싼 우리의 복잡한 심경이 적나라하게 반영된 사례이다.

이상의 사건들은 '인간' (human betweenness)이라는 현상의 '사이성'(betweenness)를 가정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동시에 우리가 통념적으로 알고 있는 '인간'에 대한 근대적 이해, 즉 인간을 하나의 개체로 놓고, 개인에다 무한한 권리와 권력을 부여한 근대의 인간 이해가 얼마나 터무니 없는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철학계와 문학계에서 소위 근대 이후(post-modernism)를 외친지가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인간 이해는 그 근대의 이해를 여전히 답습하고 있다. 인간 개념을 놓고 보면, 탈근대는 근대를 탈피한게 아니라, 근대 서구 문화(modern European culture)로부터 시작된 단편적이고, 개체적이고, 기계적인 인간 이해를 오히려 완성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근대 시대 이전 인간은 '관계론적’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인간은 관계 속에 존재하며, 그 관계의 망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동시에 인간의 삶에 한계를 그어준다. 이와 같은 관계론적 인간 이해는 그 인간 관계의 망이 갖는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권력 구조와 맞물려 Status quo를 공고히 해준다는 점에서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근대의 개체 중심의 인간 이해는 바로 이와 같은 문제점에 대처하는 과정을 통하여 숙성되어온 사고인 셈이다. 전체를 위하여 희생을 강요당하는 무고한 개인들에 대한 관심, 개인들 각각에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부여한다는 이상 등등은 그 상황 속에서 무척이나 의미 있는 반발이었다.
하지만 근대 문화가 남겨놓은 많은 사유와 방식들의 한계와 폭력성을 인식하게 되면서, 탈근대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도래하였다. 해체(de/construction)를 외치는 부류의 탈근대주의자들이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근대 인본주의(modernhumanism)가 주창하는 '인간'의 범주가 근대 서구인들의 차별적인 인간 이해를 그대로 담지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데리다는 헤겔, 훗설, 하이데거 등 근대 철학의 거장들 속에 담지된 '인간' 개념이 사실은 서구 유럽인들만을 인간으로 취급하고 있으며, 그 외 아시아인들이나 아프리카 사람들은 인간의 범주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Derrida, 111-136). 인간과 인권, 평등, 평화 등의 이상들을 내걸은 근대 인본주의는 근본에서부터 '차별적 인식 구조'를 뿌리내리고 있던 셈이며, 그들이 말하는 평등과 평화와 인권은 기실 근대 서구인들의 무한한 인권만을 주장하는 위선이었던 셈이다. 데리다의 '차연과 타자'란 바로 그와 같은 위선적 구조를 넘어서 진정한 의미의 인권을 실현할 수 있는 기초를 찾아보자는 데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데리다의 해체는 근대적 지적 유산이 안고 있던 전근대적 유산을 해체할 뿐, 근대 자체에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데리다의 인간 이해에는 결국 '개체로서의 인간과 인권에 대한 무한한강조점이 담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권(human right)은 정말 가능한 것인가? 이상의 사태들을 통해 기억을 더듬어 보려 한 것은 그러한 사건들의 진행 과정 중에서 환자에게 "삶을 결정하고 존중할 권리가 주어진 경우는 없다"는 사실을 주지하고 싶기 때문이다. 얼마 전 연세 의료원의 김모씨 사건도 환자의 가족들이 환자의 의사를 대신하여 소송을 제기하였다. 보라매 병원 사건은 환자의 부인이 의사를 행사하였다. 퀸란 사건은 아버지가 환자의 의사를 대행하였다. 로버슨씨 경우는 아내의 의사를 자신이 대리로 행사하였다. 그 사건들 속에서 환자들은 철저하게 본인의 의사를 행사하기 어려운 상태에 놓여 있었다. 환자의 인권을 말할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안락사나 존엄사를 거절해야 한다고 보는 것은 너무 사태를 순진하고 안이하게 보는 것이다.
테리 시아보의 경우, 테리에게 삶과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정말 주어지고 있는 것인가? 테리는 말이 없다. 년이 넘게 식물인간으로 급식튜브를 통해 영양분을 공급받고 있는 상태의 삶으로 진정 '삶'이란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의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죽음을 지연시키는 의학 기술들이 많이 개발되었다. 아주 중요한 순간, 우리의 삶을 지켜주는 기술들이지만, 10년을 식물인간 상태로 살아가도록 만드는 의학 기술은 정말 의미가 있는 기술인가? 삶이란 그렇게 동물적인 '몸'만을 기계적으로 살아남게 만드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는 것인가?
인간의 인공기술은 늘 이러한 부자연스러움을 창출해 내기만 한다. 의학적으로 식물인간 상태가 일정 기간이 넘어가면, 뇌는 더 이상 활동하지 않는다. 물론 이는 정확한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심장이라든지 각종 신체 기관들을 작용케 하는 뇌 부위는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식물인간으로 있는 상태에서 정말 반응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사람들을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지는 아직 정확히 모른다. 다만, 인공보조장치를 제거하면 생명을 유지하지 못할 수준이라면, 삶은 더 이상 삶은 아닐 것이다.
여기서 '인권'의 이름으로 회자되는 살 권리(right to live)는 테리 자신의 권리가 이미 아니라, 남편과 부모 간의 권리 확보 싸움으로 이전되었다. 테리의 삶의 의미란 이미 테리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남편의 삶과 그 부모의 삶에만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이다. 본인은 이미 ‘의미’를 말하는 것이 무의미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역설적으로, 테리는 타인들을 통해서만 의미를 부여 받는 셈인 것이다. 자신스스로 의사를 표시하고 결정할 수 없는 단계에서 '살 권리'라는 것이 의미가 진정 있는 것인가? 년 넘게 아내를 병원에 식물인간으로 남겨놓은 채 삶을 영위해 가야 하는 남편에게 권리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딸의 죽음을 차마 인정하지 못한 채 기적만을 기다리며 끝없이 죽음을 지연시키고자 하는 부모에게 '삶의 권리'가 주어지는 것인가?
여기서 근대적 인간 이해에 기반한 '인권' 개념은 완전히 모순된 모습을 보인다. 애초부터 '인권' 즉 살 권리라는 개념 자체는 사유하고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개인'(individual)에게 주어져 있었다. 정치 권력의 전체주의적 구조로부터, 그리고 전통적 대가족 구조가 가져다 주는 억압적이고 위계적인 구조로부터 만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기 위해 근대는 개인의 가치와 권리를 가장 중요한 인간 개념으로 삼았다. 그 근대의 가장 위대한 업적인 의학 기술의 정점에서 '인권'을 개인이 아니라 가족 간의 권리 다툼을 드러내고 있는 이 아이러니.서로 '테리의 살 권리'를 위임 받았다고 주장하는 남편과 부모 측 간의 대립. 이것이 지금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현실이 아닌가?
인간은 애초부터 독립적으로 개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늘 사이(between)에 있고, 그 사이됨은 관계로 발전해 나갈 무한한 다양성을 담지하고 있다. 내 앞에 서있는 타인은 나의 적이 될 수도, 동지가 될 수도, 친구가 될 수도, 애인이 될 수도, 부모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관계는 처음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human betweenness)을 통해 계발되어가는 것이다. 하나님도 태초에 인간(human betweenness)을 통하여 창조자-피조물의 관계를 맺지 않았던가? 인간은 그 관계 이전의 '사이'(betweenness)—그 시원적 사이 계기를 담지 하고있다. 사이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인간을 다시금 정초해 나아가야 할 필요성을 테리의 사례는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6. 결론: 죽음은 보편적 사건이다

죽음은 보편적 사건이다. 그 보편적 사건은 진리를 담지하고 있지 않다. 보편이란 진리 사건을 연산만 하기 때문이다. 그 연산식에 주어지는 조건 값들은 각 개별 사건의 상황적 조건들로부터 주어진다. 그렇다면 죽음은 ‘누구의 죽음’이라는 내용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다루어 가야만 하는 연산식에 관한 것이다.
전통적인 생명존중 윤리는 각 개인의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한데서는 옳았지만, 각 개인의 사건을 보편적 연산식으로 다룬 것은 사태의 혼동을 가중시켰다. 죽음이 너무도 명확한 사건으로 다가오는 시절에 죽음을 성찰하기 위한 연산식은 필요없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경계가 갈수록 모호해지는 요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죽음을

좋아할 만한 기사
최신 기사
베리타스
신학아카이브
지성과 영성의 만남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본회퍼의 성찰적 신앙은 '사회성 신학'으로부터"

독일 나치 정권에 저항하며 행동하는 신앙의 전형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본회퍼의 삶을 다룬 영화가 상영 중인 가운데 신학계에서 본회퍼에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의롭다 함을 얻은 백성은 이웃사랑에 인색해서는 안돼"

한국신학아카데미 2025년 봄학기 '혜암 이장식 교수 기념 학술세미나'가 11일 오후 서울 안암동 소재 세미나실에서 '구약 율법과 신약 복음의 ... ...

Warning: addcslashes() expects exactly 2 parameters, 1 given in /home/hosting_users/veritasnews/www/views/main/inner2023/archive.php on line 16

"16세기 칼뱅은 충분히 진화론적 사유를 하고 있었다"

이오갑 강서대 명예교수(조직신학)가 「신학논단」 제117집(2024 가을호)에 '칼뱅의 창조론과 진화론'이란 제목의 연구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