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본지 자문위원인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지난해 9월 [수유너머R]에서 진행한 요한복음 강해 원고입니다. 본 글은 김경재 교수의 숨밭 아카이브에 실린 글입니다.- 편집자주
제1강: 로고스의 화육: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A) 들어가는 예비적 고찰: 제4복음서 라고 칭하는 <요한복음>의 성격과 특징
1. 신약성경 안에는 4개의 복음서가 있다(마태, 마가,루가 요한). 앞의 세 개복음서를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Synoptical Gospels)라 부른다. 3개 복음서는 "관점에 공통점 있다"는 뜻이다. 그 점에 비하여 요한복음서는 아주 독특한 관점을 지닌 복음서이다. 복음서의 기본적 전승자료(傳承資料), 집필동기와 목적, 수신되고 회람된 신앙공동체의 삶의자리(Sitz im Leben), 등이 독특한 차이를 지니기 때문이다.
2. 신약성경은 불교나 유교경전과 비교할 때 그 경전의 성격이 <신앙고백적, 증언적 성격의 경전>이라는 점이다. 세가지 큰 흐름이 있다: 공관복음서 신학, 요한신학, 바울신학 그 세가지 흐름이다. 그 중에서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의 근본적 대비는 다음과 같다.
공관복음서(마태, 마가,루가)/요한복음서(i): <역사적 인간예수>의 삶과 교훈에 집중/ (i) <신앙적 초월자그리스도> 증언함에 집중(ii) 비유를 많이쓰고 <하나님의 나라>가 중심주제/ (ii) 강화(講話)형식으로 '영생'이 주제(iii) 갈릴리지방이 활동주무대, 예루살렘은 결전장/ (iii) 예루살렘이 중심무대(iv) 씌여진 시대는 AD. 70-80년/ (iv) 편집시기는 AD. 90-100 어간.
3. 요한복음의 절충주의(Eclecticism)와 혼합주의(syncretism) 성격:
① 한때는 요하복음을 "헬라사람들을 위하여, 영지주의적 신비사상가에 의하여, 헬레니즘계 사람들의 복음서"이기 때문에 '예수의 본래적 복음운동'과 관련없는 제4복음서라고 평가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제1세기 지중해 문화권은 절충주의 문화의 번영시기 였다.
② 보다 심도깊은 연구결과, 요한복음이 <히브리적 사유>(이스라엘적, 유대교적 사유, 현실세계와 몸 긍정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플라톤과 스토아철학, 영지적 신비주의, 현세와 육체 가치폄하 사유)와의 융합통전을 나타낸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종교철학서도 아니고 영지주의(Gnosticism) 신비종교도 아니다. 요한복음은 "나사렛 예수의 역사적 삶과 생명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 계시되었다"고 증언하는 초대그리스도교 신앙공동체(요한공동체)의 '복된소식을 전하려는 책'이다.
③ 플라톤철학 유산: 요한 복음서 안에서 발견되는 플라톤- 신플라톤 전통의 유산은 본질적 예지계(이데아계)가 현실적 현상계보다 존재론적으로 상위에 있다는 사상(위/ 아래 도식), 인간적 삶의 내적목적(telos)은 신적 삶을 닮고 신과 '하나'(union, unity)되는데 있다는 '상향적 수직초월 의식'이 히브리적(유대적) 사유와 절묘하게 결합되고 있다.
④ 스토아철학의 로고스 사상의 유산: 요한복음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신학적체계는 스토아학파가 강조하는 로고스(Logos)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 스토아 사상에서 로고스는 다음같은 개념의 복합적 성격을 갖는다: 첫째는 실재의 합리적 구조(ratio) 혹은 자연법칙을 의미한다. 노장철학 용어에서 '道'와 같다. 둘째는 도덕적 법칙으로서의 로고스 개념이다. 현대적 칸트철학용어로 말하자면 '실천이성'이다. 유교적 인성론으로 말하면 사람의 '本然之性'이다. 셋째는 현실적 실재계를 인식하는 인간의 인식능력(이론이성)이다. 넷째는 사물의 합리적적 구조와 인간정신의 합리적 구조를 연결하고, 매개하고, 새롭게 창조하는 언어성 곧 말(Word)을 의미한다. 불교적 용어로서 '다르마'(Dharma,法)에 가깝다.
⑤ 영지주의(Gnosticism)적 밀의종교(密儀宗敎,mystery religion)영향과 대결:
원시 그리스도교가 출현하던 시대의 종교적 특성으로서 신비주의 종교들의 '신들림상태경험'(enthusiasm)과 비교적 합일(秘敎的 合一 , esoteric unity-mysticism)을 추구하는 특징이 보편적이었다. 영지주의는 그 대표적이고 일반적 경향성이었다. 요한복음서는 당시의 이러한 종교적 상황속에서 절충적 지혜를 가지고서 대결하였다.
(B) 요한복음서 본문 강해(요한1:1-18): 요한복음서의 서언(prologue)
① 요 1:1-3 :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말씀이 하나님 이셨다. 모든 것이 말씀(로고스)를 통하여 생겨났다. 로고스를 통하지 않고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 He was in the beginng with God; all things were made through him, and without him was not anything made that was made.
- 요한복음서 저자는 1장 1절 첫문장을 쓸때, 창세기 제1장 첫구절을 연상하고 의도적으로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라고 선언한다. 이것은 신앙적 선언이지 과학적 서술문장이 아니다. 로고스(말씀)는 다른 만유사물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그 무엇이다. 로고스는 만물생성(창조)의 원리, 창조능력, 창조 매체이다. 로고스를 통하지(through) 않고서는 존재자 현실태는 불가능하다. 신유학 개념으로 설명하면 로고스는 태극의 본질적 이법으로서 리(理)이면서 단순한 원리만이 아니라 창발하는 능력으로서 지기(至氣)이기도 하다.
- 하나님 그 자체(Godhead, Gottheit)와 로고스와의 관계가 신묘한 관계로 표현되었다. 로고스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일했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과 불가분리적 존재이다. 그래서 "로고스(말씀)는 곧 하나님이시다"라고 고백한다. 그렇나, 어떤의미에서인가?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지만 이성이 사람의 모든 것이 아니듯, 하나님자신과 로고스관계는 '불일불이'(不一 不二)관계다. 하나님 그 자신은 로고스를 '만드신 이'가 아니고 '항상 로고스를 낳는이'라고 교부들은 <출생과 부자관계>은유로서 하나님과 로고스관계를 표현했다.
② 요 1:4-5 : "그(로고스)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혹은 이기지 못하더라)." In him was life, and the life the light of men. The light shines in the darkness, and the darkness has not overcome it.
- 요한복음서가 제1세기 지중해 문명권을 풍미하던 스토아사상이 '로고스개념'을 기독교변증 목적으로 차용했지만, 스토아사상에서 말하는 로고스 개념과 요한복음(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로고스 개념사이에 결정적 차이가 드러난다. 로고스는 단순히 중성적 리법(理法), 원리(原理), 원질료(原質料)에 머물지 않고, 활동적이고 능산적인데 그 자체 안에 '생명'(Life, 헬라어 Zoe)과 '밝음의 빛'(Light, 헬라어 Pos)이 있다는 것이다. <생명과 빛>은 요한복음의 키워드 이다.
- 로고스가 만유 밖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기 보다는 만유안에 합리성, 당위성, 자기초월성, 신의 종자씨, 영성으로서 존재한다면, 한국인 조상들이 말하고 경험했던 '허령불매'(虛靈不昧/ 권근), '성자신해'(性自神解 / 원효), '공적영지'(空寂靈智/지눌), '환희 뚫려비취는 깨달음'(함석헌) 표현들을 이해 할수 있다.
- 요한은 비록 현실세계의 어두움(어리석음, 불의, 악의 세력)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어둠속에 하나의 촛불만 켜있어도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듯이, 비진리와 악이 진리와 선을 이기지못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는 세상의 권력자와 현실적 구조악 앞에서는 미미하고 패배자처럼 보이지만, 그 분 안에 나타난 '생명과 진리의 빛'을 세상이 결코 이기지 못하며 극복하지 못한다는 멧시지를 선언한다. 그리고 예수 생명과 연합한자를 세상이 결코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둠이 깨닫지 못하다'라는 어구에서 "깨닫지못하다'(헬라어,katalambanein)는 어휘에는 <이기다, 잡다, 마음으로 파악하다, 이해하다>뜻을 가진 단어이다. '어둠'은 이 세상성을 나타내는 상징어이다. 우리 속에 있는 로고스 빛이 그만큼 어둠에 휩싸여 있거나 아예 빛이 꺼져버렸거나 그런 상태라고 보는 것이다.
③ 요1:14 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And the Word became flesh and dwelt among us, full of grace and truth; we have beheld his glory, glory as of the only Son from the Father.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했다"( ho Logos sark egeneto kai eskenosen en hyumin). "말씀이(Logos) 육신이(Flesh,살, Body, 몸) 되었다"라는 요한복음서의 이 구절은 기독교가 지닌 역설적 진리주장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생명체가 지닌 역설을 표현하는 대한 가장 간결하고 항구적인 표현일 것이다. 그것은 상식과 이성을 가진 사람들을 당혹하게 만드는 '스칸달론'이다.
- 위 구절은 기독교의 '성육신 교리' (成肉身敎理, the doctrine of incarnation)의 기초를 이룬다. 그러나 성육신 교리의 기초가되는 위 성경구절을 바르게 해석하지 않으면 '역설적 진리를 나타내려는 요한복음의 진의'는 왜곡되어 단군신화에서 보이는 고대구원론적 신화의 한형태로 전락하고 만다. 천계에 살던 환인(桓因) 의 아들 환웅(桓雄)이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고 땅에 내려가 다스리게 했다. 태백산정에 강림해서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웅녀(熊女)와 결혼하여 단군(檀君)을 낳고 단군이 단군조선을 세웠다. 단군은 1500년을 다스린후 아사달에 돌아와 산신(山神)이 되었다.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했다"(요1:14)는 요한복음의 증언을 제1세기 지중해 연안 헬레니즘 문화권에 흔하던 <천계의 신적 존재가 인간이 되어, 지상에서 구원사역을 하다가, 다시 천상으로 돌아간다>는 신화의 한 형태를 반복하려는 것인가?
그 문장은 고도의 상징적 표현으로서 예수 인격생명체 안에 나타난 진리, 생명, 빛을 증언하되 <로고스의 육화(肉化) 그 자체>라고 강조하려는 증언으로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말씀(Logos, Word)이 육신(Flesh)이 되었다>( the Word became flesh / ho Logos sark egneto)고 했지, 예수의 육체적 몸 안에 거주했다는 표현이 아니다. 불행하게도 초대교회 교부들이 그리스도론을 정립할 때 <영혼이 육체 몸안에 거주한다>는 영육이원론적 헬라철학적 사유체계에 갇혀서 부질없는 기독론 논쟁을 많이 벌렸다.
- 로고스는 특정 시공에 갇히거나 제한될 수 있는 물질적 실재가 아니다. 역사적 예수를 직접적으로 신격화하려는 일체의 시도는 반히브리적 사유체계이며, 예수 자신이 평생 가장 철저하게 경고하고 경계하던 바였다. 예수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라고 말씀했을 때, 자기자신의 생명체가 그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친근한 하나님과 '뜻의 일치, 의지의 일치"라는 의미에서 <하나>이지 헬라철학적 의미에서의 '존재론적 본질의 일치'(homoousia)를 의미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은 '은혜와 진리'가 추상적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예수의 삶, 생명, 활동 안에 '실재로서' 충만했다는 증언이다.
④ 요1:18절 : "본래 하나님을 본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No one has ever seen God; the only Son, who is in the bossom of the Father, he has made him known.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함께 일했던 로고스(the only Son, 獨生子)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존재자 안에서 존재자체이신 하나님이 누구이며 어떤 분인가를 나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