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분노, 용서, 치유라는 세 오누이 이야기

치유란 인간의 정신, 영, 육체, 대인관계, 사회구조, 자연환경, 전반에 걸쳐서 새로운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에 어떤 사람에게 치유가 일어나면 넓게는 사회구조와 자연환경까지는 물론이고 그의 영, 정신, 신체 및 대인관계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그러면 이러한 치유는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가? 이 글에서는 함께 손을 잡고 가는 관계인 분노·용서·치유의 역동적 만남을 통해 치유가 꽃피우고 열매 맺는 과정을 이야기하려 한다.

1. 분노와 용서의 관계
연구원의 여러 치유 프로그램에서 일어나는 사례를 보면 용서와 치유는 뗄 수 없는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실감한다. 영성수련에 참여했던 소멸하는 빛과 같았던, 인간 종합병원이란 별명을 가졌던 한 여인은 이런 고백을 한다.

“결혼 초부터 이유없이 남편을 미워했습니다. 처음에는 저를 관대하게 받아주던 남편도 지쳐서 요즈음에는 심한 다툼으로 이어졌습니다. 이곳에 참여해서 나는 한도 끝도 없는 남편에 대한 불신이 아버지로부터 기인되었음을, 내가 남편과 사는 것이 아니라 내 맘속의 용서하지 못한 아버지와 살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한없이 무능했고 난폭했던 아버지를 바라보며 세상 모든 남자에 대한 불만이 어려서부터 자리했던 것입니다. 이제 나는 내 속에서 증오하던 아버지를 떠나보냅니다. 나에게 한없는 상처를 받았던 남편이 떠올랐습니다. 그저 미안합니다. 어서 남편에게 달려가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이같이 미움의 응어리를 캐내어 놓은 뒤의 생동감 있는 모습으로의 변화는 참으로 치유의 놀라운 힘을 새삼 확인시켜주는가 하면, 외도하는 아빠를 원망하다가 눈이 멀어버린 딸이 치유과정에서 아빠를 용서하는 순간, 눈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한 일은 현대판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물론 이들에게 용서가 일어나기까지는 주님과의 뜨거운 만남과 치유과정에서 만난 동료들의 정성어린 사랑이 크게 작용했다.

그런데 어떻게 용서가 이루어지면 이런 변화가 나타날까?

용서란 오랜 시간 또는 세월에 걸쳐 가슴에 맺힌 부정적인 응어리가 풀리는 것을 의미하고 그 자리에 용서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정서와 인격이 자리 잡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용서를 이야기하려면 용서 이전의 감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고 그 감정이 당사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었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용서할 수 없을 때 우리 마음을 지배하는 감정은 어떤 것일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한마디로 분노의 감정이다. 분노의 감정이 약한 것을 섭섭함으로 표현한다면, 분노가 강할 때는 증오 또는 가슴에 원한이 맺혔다고 말한다.

우리는 불완전한 세상 속에 살고 있는 불안전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분노의 감정에 자주 부딪히는 것은 당연하다. 분노는 타인으로부터 거부당하거나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로 취급당할 때 폭발하는데 인간의 욕구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고 중요한 것은, 사랑받으려는 욕구이다. 우리는 남으로부터 사랑 받고 있음을 느낄 때, 정서는 안정을 보인다. 그러나 사랑이 결핍되었을 때 거절당한 느낌을 갖게 되고, 이를 분노로써 반응한다.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존중받지 못한 느낌이 분노의 가장 주요 원인이기도 하지만 또한 누군가에게, 혹은 어떠한 상황에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지배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도 일어난다. 지배받는 환경에서 생기는 구속감, 누군가의 강압으로 무력해질 때 분노는 생긴다. 이외에도 고독, 두려움, 자만, 열등감 등은 분노를 일으키는 감정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노의 표출을 화를 벌컥내는 상황을 떠올린다. 문을 꽝 닫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하는 과격한 정서적 표현을 생각한다. 그러나 분노의 표출은 고정적인 형태가 아니며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낸다. 좌절로 인한 자포자기, 초조, 화냄, 조바심 등이 분노와 연관된 감정 표출로 어떤 사람은 분노의 감정을 거의 감추지 못하고 창문이 덜컹거릴 정도로 소란스럽게 문을 닫음으로, 혹은 물건을 집어던지며 소리를 지르는 과격한 행동으로 분노를 폭발시키나, 어떤 이는 분노를 발할 때, 문을 꽝 닫거나 욕설을 퍼붓지 않는다. 대신 자기 연민이나 자기 비난을 하며 안으로 움츠러 들면서 자신의 분노에 직면하고 있다. 좌절의 방식으로 표출되는 분노는, 당시에는 큰 갈등이 없는 것 같으나 휴화산처럼 언젠가는 그 안의 응어리를 드러내기에 위험한 것이다.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이 이렇게 다양하더라도 이를 적절한 방식으로 처리하지 않으면 분노는 우리의 마음을 치고 우리의 몸을 병들게 한다.

2. 분노의 감정이 미치는 영향

분노의 감정이 우리에게 가져오는 병적 증상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첫째로 분노는 영적성숙을 파괴시키는 결정적 요인이다. 마음 속에 분노를 품고 있는 동안 인간의 영은 힘을 잃으며 오래지 않아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우울증으로 발전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의사였던 융(Jung)은 자기를 찾아 오는 신경증 환자들 모두가 영적으로 병들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신경증을 앓고 있는 환자들은 대부분 우울증 환자였는데 이들 모두 마음 속에 깊은 분노가 자리잡고 있었다 한다.

이렇게 분노가 용서와 사랑으로 전환되지 않고 그대로 일정기간 남아 있으면 분노의 감정은 정신과 육체를 동시에, 아니면 영이 병들면 육체가 아파오듯이 순차적으로 병들게 한다. 분노가 잘 처리되지 못할 때 정신적으로 나타나는 병적 증상에는 몇 가지가 있는데 먼저 병적 불안증상이 나타난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데도 마음에 무엇인가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떨 때가 종종 있다. 이런 사람은 반드시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대신 마음 속에 분노의 감정이 깊게 도사리고 있음을 본다. 한 예로 K부인은 심한 불안 신경증을 앓고 있었다. 자신에게 하나님의 큰 벌이 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심하게 엄습하는가 하면 남편과 열심히 하고 있는 의류도매업이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밀려와 심장이 뛰기도 하며 여러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치유과정에서 드러난 원인으로는 남편에 대한 깊은 분노의 감정이었다. 길가의 노점상으로 시작한 이 부부는 순조롭게 사업이 풀려가면서 큰 시장에서 상당한 자리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외도를 목격하게 된다. 먹고 살만하니 남편이 다른 곳에 눈을 돌린 것이다. 너무나 남편을 믿었던 K부인은 미칠 듯이 날뛰었고, 남편은 외도를 정리하고 아내에게 용서를 빌었다. 아내는 그런 남편을 신앙으로 용서했다. 그리고 함께 사업에 열중했다. 그런데 K부인은 매월 한 두 번씩 히스테리적인 발작을 일으켰다. 용서한 줄 알았고 다 덮어둔 줄 알았는데, 남편이 배신했다는 것이 용납이 안 되었던 것이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점점 심해지는 분노의 발작은 불안으로 전환되었고 내면은 황폐해져 갔다. 그러다 치유과정 중 다른 수많은 부부들의 아픔을 직면하면서, 자신의 사연만이 아픈 것이 아님을, 자신만의 상처의 우물에서 벗어나 남편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더욱이 남편이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통곡하면서 미안하다고 말할 때, K부인은 그렇게 꼴도 보기 싫었던 남편도 참 불쌍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피해자인 줄만 알고 살아왔는데 상황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에게 잘 대해주지 못한 것이 안스러워지면서 남편을 끌어안고는 오히려 자신이 용서를 비는 자리까지 내려왔다. 그 뒤로 K부인은 불안증에서 벗어났다.

이같은 강박적인 불안에 이어 분노는 불면증을 야기한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의 마음 속에는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 치유상담 연구원의 학생인 50대 중반 P씨는 분노 때문에 불면증을 앓고 있었다. 자신의 전 재산을 형의 은행담보로 다 날려버린 후 그는 7년 세월을 분노로 떨었다. 무엇보다도 분한 것은 형이 자기를 속였다는 것이다. 형을 죽이고 자기도 죽겠다는 생각을 수 없이 했다. 그 마음을 품은 4년째부터는 심한 불면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원인은 형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었다.

또한 분노는 음식을 과다하게 먹게 하거나 아니면 식욕을 상실하게 한다. 몸은 비만으로 치닫는데도 먹는 것을 자제 못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체질적으로 또는 서구화된 식습관의 영향도 있지만, 상당수가 마음 속에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분노는 인간의 식욕을 조절하는 호르몬 분비기능을 파괴시키는 기능도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용서는 식욕조절기능 홀몬인 카텍콜라민을 적당히 분비시키도록 도와 비만, 혹은 식욕부진에서 벗어나게 한다. 15년 전 L씨의 아내는 크게 사업을 벌였으나 실패 후 엄청난 빚을 졌다. 그 빚은 대학교수인 L씨의 봉급에서 갚도록 법원에서 판결을 받았다. L씨는 15년 동안 대학에서 강의는 하지만 급료는 전혀 받을 수 없었다. 그렇게 되자 아내에 대한 분노가 시간이 갈수록 곪아 갔다. 결국 분노로 L씨는 과식증을 나타냈고 이것은 비만을 불러왔다. 16년째 되는 해, L씨는 과식과 비만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세상을 떴다. L씨는 죽음 직전까지도 아내를 용서하지 못했다.

3. 용서와 치유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는 것은, 자신에게 독을 품고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용서의 작업은 상대방을 위한 용납의 행위이기도 하지만 일차적으로는 자신을 위한 행위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했을 때 가장 도움을 받는 것은 자신이다. 그러나 용서가 쉬운 일이라면 왜 사람들은 가슴에 독을 품고 사는 일을 자청하는 것일까?

마태 18:21-22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묻는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실수도 많았지만 예수님께 입바른 소리를 잘해 칭찬을 간혹 들었던 베드로는 일곱이라는 완성의 숫자를 제시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에 일흔 번까지 용서의 완성은 끝이 없는 계속적인 행위임을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죄의 종류에 대해서 언급이 없다. 쉽게 용서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용서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쉽게 보상이 될 수 있는 상처에 대해서만, 결혼 기념일을 잊어버린 남편을 용서하는 것은 좀 쉬울 줄 모르겠다. 그러나 음주 운전자에게 교통사고가 나 평생을 불구로 살아가는 자녀를 둔 부모나 사기로 전 재산을 날리고 길거리에 나 앉게 된 가족에게는, 혹은 성폭행 당한 사람에게도, 배우자의 외도로 수치를 당하는 아내나 남편에게도, 용서하라는 부르심은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서도 포함된다.

예수님은 분명 우리가 해야 되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할 수 있기에 이같은 명령을 하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용서할 수 있는 근원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무슨 선한 것이 있기에 가능한 것인가?

성경은 우리는 자신을 일곱 번 용서 받을 자로 여기며, 다른 이들은 일흔에 일곱 번 용서받아야 하는 자로 여기고 있지만, 바로 내 자신이 일흔에 일곱 번 용서를 받은 자임을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끝없는 용서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하신 일이 바로 우리의 선함에 근거를 둔 용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에 근거를 둔 용서를 행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종들과 회계하려던 임금이 빚 진 종을 놓아주었던 단 하나의 이유는 “불쌍히 여겨”였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다시 잡아 들인 이유 또한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용서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 없이는 가능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용서는 긍휼의 다른 얼굴이며 긍휼의 마음은 은혜와 맞닿아 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질문에 이어 일만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자(마태 18:21-35)의 비유를 들려준다. 일만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이라는 적은 돈을 빚진 동료 하인을 만난다. 그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받았듯이 자신도 은혜를 베푸는 대신, 동료를 옥에 가둔다. 탕감해준 임금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매우 노하여 그가 베풀었던 자비로운 결정을 철회한다. 이제 그 사람은 다시 옥에 갇히게 되었다.

예수님은 우리가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 각 사람에게도 이와 동일하게 행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날카롭게 상징하는 바는 이 감옥이 내면의 감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남을 용서하지 않는 사람의 삶이란 결국은 감옥에 갇히는 삶, 자기 스스로가 만든 내면의 감옥 속에서 사는 삶이라는 것이다. 종이 두 번째로 감옥에 갇히는 것은 결코 갚지 못한 빚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받은 그 엄청난 은혜는 잊어버리고 형제로 향한 불쌍히 여김이 없는, 용서치 못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풀어주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은 자신 또한 그 얽매임의 감옥 속에서 사는 삶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용서는 무엇보다 나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용서에 대한 말씀은 무조건적이며 전폭적이기까지 하다. 때로 용서의 요구는 하도 무거워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는 가능해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용서의 과제는 은혜를 맛보지 못한 인간의지의 역량으로는 너무나 역부족이다. 나보다 큰 출처이신 하나님을 바라봄만이 인생의 얼룩지고 찢긴 상처를 감싸안을 힘을 준다. 이런 한계점의 순간에 우리가 갈 곳은 오직 하나, 십자가의 예수님이다. 그곳에서 참혹하게 피 흘리며 홀로 죽어가는 예수님. 무자비하고 잔혹하게 조롱하던 자들에게도 그 순간 용서를 선포하시던 그 분. 처절한 버림받음의 외로운 언덕에서도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치유로 인도한다.

일반적으로 내면의 치유는 원한, 분노, 적개심, 증오에서의 급작스런 해방이나 즉각적인 자유로 찾아오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혀 그 죽음으로 평화를 이루신 주님과 하나 되어 가는 성화의 과정일 때가 많다. 그 일은 상당히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상처는 여전히 쓰리고 아프고 때로는 아문 자국이 보기 흉해 견디기 어려울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유를 통한 성화는 반드시 이루어진다.
난 22살의 아름다운 청춘에, 만취한 운전자의 교통사고로 전신화상을 입고 수차례의 수술을 받고 겨우 살아난 이지선 양을 기억한다. 사고 후의 그녀의 삶의 자리는 얼마나 송두리째 바뀐 삶인가? 더욱이 한창 예쁜 외모에 관심이 많을 나이에 그녀를 보고 수군덕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에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졌을까? 도저히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막막한 심정… 그 아픈 마음을 안고 교회에 가서 기도할 때 주님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내가 너의 아픔을 안다… 내가 너희 마음을 안다… 나 또한 너처럼 외면당했고 멸시당했고, 버림받었단다… 아이야.”

그녀는 그때 말할 수 없는 감사와 사랑을 경험했을 것이었다. 그리고 치료과정 동안 처음에는 자신의 인생을 이토록 짓밟아놓고도 얼굴 한번도 내밀지도 않는 운전자에 대한 분노가, 하나님의 세밀한 은혜를 경험하는 동안 도대체 사는 것이 얼마나 팍팍했으면 그 이른 시간에 만취가 되어 술을 먹고 운전했을까 싶은 마음으로 바뀌었다는 고백을 들었다.

그렇다. 나를 사랑해서 그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나의 삶의 수치를 뛰어 넘으시고, 나의 삶의 어떠한 절망이라도 뛰어 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요 부활하여 실재하는 힘이다. 그분의 은혜로 족하지 않은 삶의 어떠한 자리는 없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 삶을 변화시키시고 능력을 주셔서 원수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게 하신다.

이처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어느 정도 용서할 수 있느냐는, 우리의 삶을 예수님의 사랑 앞에 어느 정도 열어 놓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는 자만이 진정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다. 용서는 상대방이 일정한 조건을 충족시켰을 때에만 용납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값없이 하는 것이다. 용서하는 자 역시 매일 끊임없이 용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때 다른 사람을 용서해 줄 수 있다. 용서는 완전히 변상하겠다던가 잘못을 고친다는 약속 없이도 상대방을 받아들이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적인 통찰력이 있을 때, 사람은 치유를 경험한다. 하나님의 임재는 치유와 깊은 연관이 있다. 하나님의 손길이 영혼을 만지는 가운데 사람은 자신이 겪은 분노의 상황, 상처의 상황을 이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다. 상처를 준 사건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재평가할 때, 상황은 다르게 보인다. 상황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것이다. 시각을 바로 잡는 일이야말로 분노의 치유에 핵심적인 작업이다. 그리고 상황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눈은 하나님과의 만남에 있다. 성령의 계시는 사람에게 새로운 영적 통찰력을 주고 그때 사람들은 상황이 초래한 상처만을 바라보던 눈을 들어 아픔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믿음에 눈을 뜨게 된다. 이것이 구원이며 동시에 해방의 사건이고, 이때 치유는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용서란 헬라어의 해방이란 말과 그 어원을 같이 하는 것으로 용서는 해방, 곧 자유케 됨을 의미하며, 분노와 용서와 치유의 관계는 ‘긍휼의 마음으로 같이 손을 잡고 가는 다정한 오누이’라 할 수 있다.

4. 마치면서

그러면 이러한 용서의 사건이 일어날 때 용서 이전과 이후의 정신과 신체에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가?
양자 물리학으로부터 파생한 운동역학이론이나 비선형동역학에 근거하면 인간신체의 에너지는 어떤 의식을 하느냐에 따라 약화될 수도, 강화될 수도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수치심이나 죄의식, 분노를 느끼면 몸에서 에너지가 계속 약화되어가고 감사와 사랑을 느끼면 에너지가 강화된다. 용서이전의 상태를 무기력, 두려움, 분노라 본다면 용서를 못한 사람은 절망과 자포자기에 사로잡히던가 아니면 질투나 편집증 및 신경증에 시달린다. 이런 상태가 더 계속되면 분노는 증오로 전환되고 개인의 삶 전체를 부식시킬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신체에서 매순간 생명에너지는 빠져나가면서 결국엔 생명위협에까지 이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감정이 용서와 사랑으로 바뀌는 순간 사물의 본질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증대하며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이 강화되면서 사람이나 사물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개발된다.

사랑과 용서의 감정은 뇌에서 엔돌핀을 분비하게 한다. 용서와 사랑은 ‘나와 너’가 함께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주며 자아에 대한 인식을 확장시켜준다. 사랑과 용서는 삶의 어려운 부분들을 전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그 요인을 녹여 버리는 힘으로 작용한다. 그렇기에 사랑과 용서가 한 인간을 사로잡을 때 비로소 그는 행복의 의미를 체험한다. 여기서 행복은 치유이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삶의 건강인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우리들이 마땅히 누려야만 되는 분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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