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와 동시에 역사 왜곡 논란을 불러온 영화 <군함도>의 흥행이 완전히 동력을 잃은 모양새다. 영화진흥위원회(아래 영진위) 집계에 따르면 18일 기준 <군함도>는 누적 관객 653만여 명을 모으는데 그쳤다. 반면 지난 2일 개봉한 <택시운전사>는 20일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올여름 극장가의 흥행 대결에서 <군함도>는 <택시운전사>에게 완패한 셈이다.
흥행성적이나 논란과 별개로 <군함도>는 일정 수준 긍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본다. 바로 사실을 극화할 때 상상력이 어느 수준까지 허용되는가 하는 문제 제기가 이뤄졌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는 <택시운전사>도 마찬가지다.
군함도에서 실제 3년 10개월 동안 사실상의 포로 생활을 했던 최장섭 할아버지는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조선 징용자들이 탈출을 감행하는 대목에 대해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했다. 최 할아버지는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 사람은 그들이 한 일대로, 한국 사람은 또 그들이 한 그대로 영화에 담았으면 했다. 영화 내용은 각본에 달린 만큼 상상과 실제가 무엇인지 잘 생각해보면 좋겠다." (군함도 강제노역 피해자 최장섭 할아버지 인터뷰 발췌)
최 할아버지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몇몇 리뷰 기사들을 보면 <군함도>가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 별다른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군함도와 관련해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느냐'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사실을 극화한 영화라도 얼마든지 허구적 요소가 들어갈 수는 있다. 또 사실과 허구가 적절히 뒤섞인 이야기 전개를 통해 미처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적 사실을 일깨울 수는 있다. 문제는 허구적 요소가 아니라 주제에 접근하는 태도다.
군함도의 아픈 역사는 문학이든, 음악이든, 영화든 예술적 영감을 자극하는 주제다. 그러나 이 아픔이 우리 민족의 아픔이기에 주제를 다루는 데 있어 최대한 신중을 기해야 했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택시운전사>는 <군함도>보다 한 발자국 앞서 나간다. <택시운전사>에서도 사실이 아닌 대목은 분명 있다. 광주 택시기사 황태술(유해진)과 그 일행이 김만섭(송강호)과 힌츠페터(토마스 크레취만)의 탈출을 돕기 위해 정보요원들의 차량을 가로막는 장면이 그렇다. 이 대목은 분명 허구다. 꼭 이 장면이 필요했을까 하는 의구심은 아직도 지울 수 없다.
사실은 이렇다. 신군부는 광주의 질서를 다잡는데 골몰한 나머지 힌츠페터마저 감시할 여력이 없었고, 힌츠페터는 바로 이 점을 파고들어 갔다. 이런 이유로 소셜 미디어상에서는 택시 추격장면이 필요했을까를 두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이 대목은 <군함도>만큼 문제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실제 광주 택시기사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신군부에 맞섰다는 사실을 떠올려 볼 때, 이 정도의 허구는 허용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택시운전사>는 시종 광주, 그리고 운임 10만 원에 이끌려 광주에 들어간 김만섭에게 연민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반면 <군함도>의 경우 징용자들의 아픔은 어디서도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는 징용자의 아픔에 대해선 별반 자세한 묘사 없이 곧장 대탈주극으로 건너뛴다.
할리우드가 유대인 학살을 다룬 방식
할리우드의 사례를 살펴보자. 조선인이 일제 강점기 강제노역을 당했다면 유대인은 나치 치하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할리우드는 유대인의 아픔을 다양한 서사구조를 통해 재조명했다. 사실 어느 면에서 당연한 귀결이다. 유대인 학살이 인류의 양심을 건드리는 주제이기도 하지만 할리우드가 사실상 유대 자본으로 움직이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할리우드가 유대인 학살을 다룬 방식은 분명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무엇보다 유대인 수용소의 참상을 <군함도> 식으로 풀어낸 영화는 없었다. 말하자면 유대계인 미국 OSS 요원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잠입해 나치와 손 붙잡은 배신자를 처단하고 유대인을 탈출시키는 식의 영화는 없었다는 말이다.
할리우드가 <군함도>보다 훨씬 더 엄청난 물량 공세를 퍼부을 역량이 없어서 그랬을까? 단언컨대, 아니다. <죠스> < E.T. > <인디아나 존스> 등 블록버스터에 남다른 소질을 보인 유대인 스티븐 스필버그조차 1994년 작 <쉰들러 리스트>에서 동족의 아픔을 그리는 데 장중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1998년 작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는 오프닝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끼워 넣는다. 스필버그는 이를 통해 라이언 일병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게 나치의 손아귀에서 인류를 구하는 일과 동등한 가치를 가진 일임을 각인시킨다. 여기서 핵심은 자신이 다루고자 하는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연민이다. 사실 여부를 영화화했느니 마느니 하는 갑론을박은 본질이 아니란 말이다.
예술엔 그 어떤 제한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영화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다분히 흥행을 의식한 요소를 끼워 넣어도 좋을 주제가 있고 아닌 게 있다. 류승완 감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오류를 범했다고 생각한다.
신나치주의자 데이비드 어빙의 역사 왜곡에 맞서 법정 공방을 벌인 유대인 학자 데보라 린스타트의 투쟁을 그린 영화 <나는 부정한다>에서 주인공 린스타트와 그의 변호사는 사실 확보차 아우슈비츠를 찾는다. 린스타트는 그곳에서 "이곳은 경의를 표해야 하는 장소"라며 함께 한 일행에게 행동에 조심해줄 것을 당부한다.
류승완 감독에게도 똑같은 당부를 전해주고 싶다. 비단 류 감독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아픈 역사를 다루려는 모든 창작자에게도 동일하게 해주고 싶은 당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