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나니 참 훈훈하다.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는 눈물이 핑 돈다. 옆 좌석에 앉아 있던 한 남학생은 영화 상영시간 내내 눈시울을 붉혔다. 어떤 영화냐면 바로 나문희, 이제훈 주연의 <아이 캔 스피크>다.
영화의 이야기는 무척 단순하다. 일제 강점기 위안부로 끌려갔던 나옥분 할머니(나문희)가 명진구청 공무원 박민재(이제훈)의 도움으로 영어를 배워, 자신의 피해사실을 미 의회 청문회에 증언한다는 내용이다. 영화 후반부에 옥분 할머니가 청문회에 출석해 증언하는 어느 면에서는 전형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도 영화는 보는 이들의 눈물샘을 촉촉하게 만든다.
우선 영화를 보면서 지난 2008년 3월 KBS 1TV에서 방송된 <긴급리포트, 티베트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편이 떠올랐다. 당시 KBS는 티벳 분리독립 사태를 취재했고, 이를 위해 티벳 수도 라싸와 인도 다람살라에 있는 티벳 망명정부를 차례로 찾았다. 취재진은 망명정부가 운영하는 학교를 찾았는데, 이 학교에서는 영어가 필수과목이었다.
사실 영어가 필수과목인 건 새삼스럽지 않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많은 나라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티벳 망명정부가 아이들에게 영어 공부를 시키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티벳은 1950년 중국 인민해방군에 점령 당한 이후 중국 정부로부터 탄압을 당해왔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서는 티벳의 정체성을 파괴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이에 티벳 망명정부는 티벳의 슬픈 역사와 함께, 중국의 교묘한 탄압을 국제사회에 고발하고자 아이들에게 영어교육에 공을 들인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 나옥분 할머니가 영어를 배우려는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 왜 영어를 배우려는지 묻는 민재에게 나옥분 할머니는 자신이 당한 일을 털어 놓는다. 영어를 할 줄 몰라 통역에게 의지했다가 통역이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왜곡한 것이다. 옥분 할머니는 이 대목에서 울분을 터뜨린다. 민재도 진심을 알고 옥분을 돕기로 마음먹는다. 늦은 나이에 영어를 배우려는 옥분의 노력과, 열과 성을 다해 영어를 가르치는 민재의 모습은 실로 감동적이다. 또 왜 영어를 배워야 하는지 돌아보게도 해준다. 옥분 역의 나문희와 민재로 분한 이제훈의 찰떡궁합은 영화의 또 다른 묘미다.
일본의 막강한 로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옥분 할머니는 마침내 미국으로 건너가 청문회에 증언하려 한다. 옥분 할머니로선 그간 갈고 닦은 영어실력을 발휘할 기회였다. 그런데 결정적 순간에 예기치 못한 장벽에 부딪힌다. 일본이 로비력을 총동원해 할머니의 증언을 막으려한 것이다. 이를 위해 일본은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미국 의원들을 전면에 내세운다.
일본에 우호적인 미국 의원들은 일본측이 내놓은 자료를 근거로 할머니의 증언에 문제를 제기한다. 일본은 더 노골적이다. 옥분 할머니에게 대놓고 "얼마만큼의 돈을 원해? 당신 실수하는거야!"라며 호통을 친다.
이 지점에서 또 한 번 개인적인 기억을 떠올려야겠다. 난 현지시간으로 지난 4월5일 워싱턴 D.C.를 방문했었다. 마침 이날 워싱턴 D.C.엔 고고도미사일 배치에 반대 목소리를 내고자 시민사회에서 보낸 대표단이 도착해 있었다. 현지 교민들의 활동 단체인 미주시민희망연대(아래 희망연대)가 대표단의 현지 일정수행을 도왔다. 이때 희망연대의 한 관계자는 내게 이런 말을 건네줬다.
"한국에서 이렇게 대표단이 왔지만, 미국 정계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장담을 못하겠다. 워싱턴에는 한국의 목소리를 대변해 줄 창구가 많지 않다. 일본은 정반대다. 이곳 싱크탱크들은 대부분 일본에게 우호적이다. 일본도 로비에 남다른 공을 들인다."
실제로 워싱턴 정계에 한국의 입장을 대변할 이들은 많지 않다. 헤리티지 재단이나 CSIS, 카네기 국제평화연구소, 브루킹스 등 워싱턴 D.C.의 저명한 싱크탱크들도 대부분 일본의 시선으로 동아시아 문제를 조명한다. 한편 일본은 위안부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를 때 마다 외교 창구를 총동원해 쟁점화를 막아 왔다.
나옥분 할머니의 의회 증언 장면은 무척이나 극적이다. 특히 옥분 할머니가 일본 대표단을 향해 사과하라고, 당신들에게 용서 받을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사자후를 토해내는 장면에서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 장면은 오로지 '영화적'으로 봤을 땐,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려는 전형적인 장치다. 그러나 일본이 워싱턴 정계에 행사하는 로비력을 생각해 보면, 그저 '전형적이다'라고만 치부할 수 만은 없다.
공무원은 '나대선' 안 된다?
영화는 이야기 초반에 공무원 사회의 단면을 살짝 끼워 넣는다. 나옥분 할머니는 구청엔 '민원왕'으로 직원들 사이엔 요주의 대상이다. 명진구청으로 발령 받은 민재는 할머니를 보자 공무원 특유의 무뚝뚝한 어조로 원리원칙대로 하겠다고 내뱉는다. 다른 선배 공무원들은 이 모습을 보고 불안했는지, 공무원 수칙을 들먹이며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한다. 이들이 들먹인 공무원 수칙이란 이랬다.
1. 복지부동
2. 면피
3. 나대지 말라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위치에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묵묵히 헌신하는 공무원들이 분명 있다고 믿는다. 이런 분들에겐 영화에 비친 공무원 사회가 모욕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국민들이 피부로 체감하는 공무원들의 모습은 대게 이렇다. 비단 말단 공무원만 이런 게 아니다. 고위직일수록 정치권력 앞에 아예 엎드린다. 그런데 관료들의 복지부동은 때론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대통령이 개혁정책을 추진해도 관료조직이 굼뜨면 개혁자체가 어려워지니 말이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가 공무원 사회의 복지부동을 드러낸 건 신의 한 수라고 생각한다. 앞서 일본은 위안부 문제의 쟁점화를 막기 위해 로비력을 총동원한다고 적었다. 일본의 로비를 이기기 위해선 한국 정부, 특히 외교관들이 더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외교부와 소위 난다긴다(?) 하는 주미 외교관들이 위안부 같은 민감한 의제를 두고 워싱턴 정계에 위안부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전달하려 했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복지부동과 출세주의에 젖어 자리를 지키는데 걸림돌이 될지 모를 쟁점 현안을 외면해 왔다는 게 사실에 더 가깝다.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을 적시한 12.28한일 위안부 합의는 이 같은 관료주의의 정점이다. <아이 캔 스피크>에서 살짝 드러난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이 결국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 셈이다.
영화 속에서 나옥분 할머니는 일본을 향해 간절히 외친다.
"제발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말해 달라. 그 말이 그토록 어렵나?"
나옥분 할머니의 실제 모델인 이용수 할머니가 미 의회 청문회에 증언한 시점은 2007년이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옛말에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건만, 일본 정부는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엘튼 존이 부른 발라드곡 제목이 떠오른다.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
(미안하다는 말이 가장 어려운 말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