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개인적으로 아는 미국의 1.5세대 한인 청년으로부터 최근 '크리스천 코스프레'라는 단어를 들었다. '코스프레'는 일본식 영어로서 '분장놀이,' '의상연기'(costume play) 정도로 번역될 수 있다. 봄, 가을이 되면 특히 공휴일에 서울 시내 일각에서 만화 캐릭터 분장을 하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걸어다니는 무리들을 심심찮게 보게 되는데, 그들이 코스플레이어들이다. 그러니까 크리스천 코스프레라는 말은 크리스천 분장을 하고 크리스천 연기를 한다는 뜻이다. 그가 그 단어를 사용한 연유는 우연히 그가 미국에서 성공한 기업가로 자신을 소개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의 인상이 그러했다는 것이다. 그 기업가는 모 기독교재단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말끝마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언급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청년은 그 기업가에게 적어도 말과 행동의 일치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부모님도 독실한 기독교인이고 스스로도 기독교인임을 자랑스러워했으며 성경에 대한 지식도 해박하고 사회사업 분야에 열의를 갖고 기여를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그가 크리스천 연기를 하는 것처럼 비쳤을까?
오랜 기간 동안 알고 지내도 상대방을 잘 알지 못하는데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그런 평가를 내리는 것은 성급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기독교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청년 앞에서 말과 행동의 불일치가 발각될 정도의 신심(?)을 가진 신앙인이라면 심각하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코스프레 자체가 불일치의 일치를 표방하는 것이니까 그 청년의 판단은 그 사람의 본 모습을 통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만화 캐릭터를 모방하는 코스프레에는 그 캐릭터가 지닌 이상적 특질과 동일시하고자 하는 코스플레이어의 욕망이 투사되기 마련이다. 이상과 현실의 격차를 동일시의 작위를 통해 줄여보려는 욕망이 개입하는 것이다. 그 기업가의 크리스천 코스프레에는 크리스천과 세속적 성공을 동일시하고자 하는 욕망이 반영되어 있다. 이는 자신이 이룬 성공의 세속성을 종교성으로 중화하려는 욕망과 다르지 않다. 사실상 '크리스천'과 '코스프레'는 이상과 현실처럼 서로 일치하기가 어려운 요소들이다.
그러고 보니, 크리스천 코스프레는 비단 그 기업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단어는 오늘날 한국교회 교인들의 총체적인 모습을 대변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의 의상을 입고서도 자신의 실생활을 그 의상과 일치시키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사랑을 표방하면서도 실생활에서는 혐오와 배제를 구사한다. 정의를 외치면서도 자신의 몫은 선점해둔 상태이다. 정직하다고 홍보하면서도 저울눈을 속이고 약자들을 교묘하게 착취한다. 희생하고 인내하라는 성경말씀은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에서 형성해온 성공주의와 근대성의 이미지에 기여할 때만 강조된다. 이외에도 교회세습, 재정비리, 성적 타락 등 언론을 통해 적발된 불일치는 여럿이다. 그래서 일반시민들은 크리스천 코스프레를 일상적으로 목격한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세속적 욕망을 종교를 이용하여 포장하고 있음을 이미 통찰하고 있다.
그런데, 코스프레를 하려면 해당 캐릭터를 면밀하게 분석하여 실감 나는 분장을 준비해야 하는데, 크리스천 코스플레이어들은 성경말씀 혹은 신앙에 대해 그런 작업을 한 것일까? 놀랍게도, 오늘날 넘쳐나는 설교 동영상들과 각종 성경 세미나들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면밀히 분석하여 실감난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생활의 과정에 통조림처럼 정리된 정보를 손쉽게 비축할 수 있다. 그들은 그 통조림을 한 번도 실생활에서 사용해본 적이 없는 상태로 지낸다. 정작 실생활에서 요리를 해야 할 때 그냥 통조림 채 식탁에 내어놓는 정도이다. 예를 들면, 화가 날 때 교인들은 그냥 분노를 터뜨린다. 그리고 눈앞에 이익이 보이면 우선 취하고 본다. 이런 일들이 꺼림칙하면 회개라는 통조림을 하나 사용해서 죄책감을 지워버린다. 그들은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면서도 그 말씀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교인들은 스스로 성경말씀을 면밀하게 분석하여 실감나게 실천하지 않으니 코스프레를 코스프레하는 지점에 있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고 교인들로 하여금 말씀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도록 독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앙은 생활로 증명되지 않으면 물건처럼 이용당하게 된다. 그리고 물건처럼 부패해버린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은 떠나고 만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상황은 엘리 제사장의 행태와 매우 흡사하다. 그는 비둔한 몸으로 권력과 명예를 양손에 움켜쥐고서 거들먹거렸고 자기 자식들이 종교권력가로 행세하며 방자한 짓을 저지를 때에도 금지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하나님의 사람이 그에게 직접 경고하였고 사무엘도 하나님의 경고를 전달하였음에도 그는 그 경고를 무시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사무엘상2:29)는 질책을 받고도 마음을 찢는 회개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는 그저 '하나님께서 옳게 여기시는 대로 행하실 것이다'(사무엘상3:18)고만 말할 뿐이었다. 이처럼 영적으로 아무런 위기의식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법궤를 이용하고자 했을 때 그것이 하나님을 수단화, 대상화하는 행위라고 지적하지 않았다. 결국 법궤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뺏겼고 그와 두 아들은 비극적인 죽음을 맞고 말았다. 이 충격으로 조산을 한 며느리는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 짓고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나버렸다고 한탄했다. 크리스천 코스프레를 그만 두라는 지적이 먼 나라에서부터 들릴 지경이 되도록 영적으로 둔감해진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