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세계와 기독교 변혁 연구소 정강길 연구실장이 한국조직신학대회 분과별 모임에서 발표한 논문이다.
● <새로운 대안 기독교>가 결코 잊어서는 안될 2가지 대원칙
1) 오류와 비극 앞에서는 언제나 겸허한 기독교
2) 솔직하고 건강한 합리성에 기반하려는 기독교
새로운 기독교의 입장에선 그 어떤 막강 파워의 정통(orthodox)이든 전통(tradition)이든 간에 오류(error)와 비극(tragedy)에는 결코 선행할 수는 없다고 본다. 오류와 비극 앞에서는 적어도 철저히 겸허해지고자 하는 기독교이다. 만일 새롭게 제안된 이러한 기독교 역시 오류와 비극을 낳을 경우 언제든지 수정 또는 보다 더 나은 기독교를 향해 해체 가능하다. 화이트헤드의 언급처럼 “오류를 놓고 두려워하는 것은 진보의 종말이며, 진리란 오류를 보호하는 것이다. 오류는 진보를 위해 치르는 댓가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합리성은 근대 합리성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이것은 오류 앞에서는 수정 가능한 최선의 합리성일 따름이다. 이러한 합리성이 필요한 가장 큰 이유로는 세계 안의 다양한 타자들과의 소통 때문이다. 우리는 더 이상 오늘날의 현대인들에게 무조건 믿어야만 한다고 외치는 그러한 기독교인이 될 순 없다. 신앙은 고백과 기술(description)의 차원이겠지만 신학은 그것이 왜 그러한지에 대해 해석해주는 설명(explanation)의 차원에 가깝다. 따라서 신학에서도 결국은 합리적으로 조정된 언어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이때 솔직함은 신앙 성장의 출발이자 눈높이로서의 시작점에 해당한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에게 솔직하게 나갈 수 있어야 하며, 예수에게 솔직하게 나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솔직함이 없다면 성장도 없다.
그리고 이 2가지 대원칙 외에 굳이 하나를 더 두고자 한다면, 3) 약자를 우선적으로 사랑하는 기독교를 넣을 수 있겠다. 하지만 나로선 1)과 2)의 두 가지 원칙만 가지고도 충분히 3)을 도출해낼 수 있다고 본다. 알고 보면, 3)은 진리에 대한 예증의 영역이기도 하다. 이렇게 해서 내가 말하고 싶은 새로운 대안 기독교는 저 2가지 대원칙을 지니면서 다음과 같은 12가지 패러다임 대전환을 의도하고 있다.
이러한 기독교를 나는 <꿈의 기독교>라고 부르고 싶다. 이것은 이천 년 전 예수의 역사적 삶을 오늘날 최신의 철학사상으로 다시금 <재보편화>하는 작업을 통해 축조되는 새로운 기독교인 것이다. 소위 말하는 16세기 종교개혁이라는 것도 그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지 일종의 대안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이전의 니케아 신조나 칼케돈 신조 및 어거스틴 신학의 주요 테제들은 여전히 이어받고 있다는 점에서 신학적 지평에서의 재보편화의 작업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고 보며, 바로 그런 점에서 그 역시 한계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당시에는 워낙 가톨릭이 타락해 있었기에 그에 대한 반동으로서의 일정 정도의 종교갱신 운동은 있었을지언정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종교개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종교분파> 사건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고 본다. 언젠가는 먼 훗날 새로운 기독교의 관점에서 지금까지의 기독교교회사가 다시 쓰여질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내가 보는 기독교의 역사는 예수사건 이후로는 점점 더 간격이 벌어진 시행착오의 기독교사상사이자 교회사였다고 본다.
5. 새로운 기독교의 도래
어떤 점에서 본인이 제안하고 있는 새로운 기독교 모습은 이천 년 동안 아직 단 한 번도 시행해보지도 않았었고 아직 제안된 적도 없었던 기독교다. 왜냐하면 서구철학사가 지배해왔던 낡은 형이상학의 껍질을 20세기 들어서야 겨우 탈바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새로운 기독교 시대의 도래는 이제 막 싹을 틔우려는 새로운 전환기에 와 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전환의 시대는 내가 보기에 니체와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하여 그동안 플라톤적 사유에 대한 반동과 노예해방 및 여권신장으로서의 민주주의 운동에 대한 자각 및 다윈 진화론의 대두를 비롯한 자연과학의 발달 등등 새로운 발견과 가치관들이 여기저기 움트기 시작했던 19세기 때부터 서서히 진행되어 왔었으며, 20세기 초반의 과학혁명과 실증주의의 부흥 그리고 20세기 중 후반의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를 겪으면서 지구 행성은 이제 다원화된 지구촌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어제의 경로를 밟고 있는 오늘의 21세기 초반 역시 여전히 그 전환기에 놓여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전환기에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장담하건대, 현재의 기독교가 근원적인 패러다임을 겪지 않는다면 나는 필연적으로 결국 추락하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추락하는 것은 결코 반성하지 않는다고도 생각되어지지만, 어쨌든 존 쉘비 스퐁(J. S. Spong)이라는 신학자의 말대로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 민족이 회개하지 않을 경우 예루살렘 멸망을 외쳤던 구약시대의 예언자들과 복음서 예수의 외침을 떠올리게 하는 절박한 심정의 예언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기독교 흐름을 볼 때 현대의 자연과학 진영과 소통하지 못하는 기독교는 결국엔 퇴행할 것으로 본다. 또한 니케아 신조 같은 정통교리가 이해되지 않더라도 무조건 믿어야만 한다고 말하는 기독교 역시 결국엔 퇴행될 것으로 본다. 보상과 처벌의 전지전능한 절대자로서의 신 관념을 믿는 초월신론의 기독교 역시 결국엔 퇴행될 것으로 본다. 세계 안의 부조리한 현실과 첨예한 계급적 문제를 외면하고 있는 내세 천국 지향의 기독교 역시 결국엔 퇴행될 것으로 본다. 교회 안에서 자신의 생각을 소신껏 나누지 못하는 솔직하지 못한 기독교나 오직 하나님만 안다는 식으로 대답하기 곤란한 것들이 점점 늘어나는 기독교 역시 결국엔 퇴행될 것으로 본다. 이러한 기독교들은 결국 ‘묻지마’의 마스크를 씌우고 있는 것이기에 세계 안에서 소통이 아닌 <불통스런 기독교>가 될 뿐이다. 결국엔 그들만의 리그가 되는 것이기에 점점 게토화될 수밖에 없다.
물론 현재 기독교의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까지는 기존 기독교가 워낙 큰 건물과 땅과 재산도 보유하고 있기에 아마도 기독교가 망하는 데는 다소 긴 시일이 걸리겠지만, 기존의 보수 기독교가 제대로 변하지 않는 한 기존 기독교의 폐해에 대한 공감들은 점점 더 확산되고 있는 추세인 것만은 분명하다. 현재도 세계 안에는 무신론과 종교의 해로움에 대해 많은 공감들을 얻어내고 있는 지경이다. 이를 테면 영국의 무신론 세력들은 이전에 비해 더욱 적극적인 전도를 펴고 있으며 대학가에도 침투되고 있을 정도다. 이러한 흐름에 서 있을 경우 10년 뒤, 30년 뒤, 50년 뒤 그리고 100년 뒤의 기독교 모습은 어떠할까? 반면에 적어도 새로운 기독교 운동은 이제야 겨우 싹을 틔우고 있는 입장일 뿐이다.
나는 서구의 유럽 사회가 기존의 낡은 기독교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고 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꼭 퇴보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한편으로 무신론 이후에도 가능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유신론적 기독교를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기회의 시대의 도래라고도 평가된다. 지구화 시대의 일상적 삶을 건강하고도 아름답게 가꾸고자 하는 몸(Mom)수행적 기독교 그리고 궁극적인 상생과 대동 세상의 하나님나라 운동의 새로운 기독교는 현재의 서구 유럽 사회에도 충분히 통할 것이라고 나 자신은 분명하게 확신하는 바이다.
6. 지구화 시대 일상적 삶의 변혁으로서의 하나님나라 운동
관계적 지평에서 모든 존재들은 유기적으로 서로 엮여 있다. 그럴 경우 나를 포함한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차원의 통합적인 관계망을 떠올려 볼 수 있겠다. 이는 곧 신(God)과 나(I)와 타자(Others)가 이미 존재론적 차원에서부터 함께 얽혀 있는 통합적 관계망에 해당하며, 나는 이러한 통합적 관계망을
내 몸의 단면도는 <단위 행태>unit attitude를 분석하는 가운데 나온 화이트헤드 사상에 대한 응용 개념이기도 하다. 내가 보는 <몸>Mom은 물리적 신체로서의 Body와는 구별되며 오히려 신체 경계까지 넘어서 우주 전체에까지 연장되어 있다. 몸은 나 자신이 전체 우주와 맺고 있는 관계 그 자체로서, 내 몸이 있고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관계 자체가 이미 나의 몸을 매순간마다 형성하고 있다는 얘기다.
주지하다시피 화이트헤드 사상의 구도에서 보는 하나님은 이미 과정신학에서도 얘기되듯이 매순간마다 세계 안에 끓임 없이 설득적인 사랑으로서 내재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러한 신의 사랑에도 불순종하는 현실 세계의 영향을 받기에 세계와 함께 가는 동반자적인 존재요, 세계와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고난의 동반자>로서의 하나님’God as the companion who shares our suffering with us이며, 부조리한 현실 세계를 보다 더 나은 자신의 비전으로 인도하고 있는 인내어린 시인이다. 그리고 이 세계는 나의 몸을 구성하는 기반이며 그러한 가운데 신과 세계는 서로 상호관계적인 지평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때 내가 보기에 오늘날 우리 삶의 행태에 있어 가장 우세한 경향을 목적적 태도를 꼽으라면 그 자신의 행복 추구일 것인데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것은 단연 <자본 축적>의 삶으로서 드러나고 있다. 대다수의 삶은 거의 예외 없이 바로 여기에 집중된다. 이러한 삶의 태도들은 현실 세계를 다시금 재편시키는 뚜렷한 사회상의 목적 혹은 거대 이념으로 전일됨으로서 <자본주의>라는 세계 체제는 더욱 고착화되며, 이것은 또다시 세계 안의 무수한 몸의 태도들을 압도시킴으로써 자본주의 체제는 계속적으로도 우리들의 몸 안에 내면화되어지고 있는 셈이다. 알고 보면 <맘몬>의 문제는 사실상 내 몸의 문제이기도 하다.
모든 변혁에 있어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내 삶의 궁극적 목적에 대한 자각>에 다름 아니다. 우리 삶의 궁극적 목적을 신의 본성에 맞추지 않을 경우 우리의 몸은 맘몬이 의도하고 있는 계급 상승적 욕망에만 사로잡히게 된다. 그럴 경우 나와 타자는 영원한 헤매임 혹은 질곡의 고통을 계속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다고 여겨진다. 이때 하나님이 현실 세계에 대해 의도하는 바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물리적 실현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내 삶의 유일무이한 기준으로서 상정하고 거기에 맞춰 매순간의 삶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나라>란 것은 <하나님-나-타자>(GIO)를 포함한 존재의 모든 목적들이 조화롭게 소통되고 있는 차원의 나라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것은 서로의 자율적 목적들이 조화됨으로써 더 큰 자아실현의 확장들을 경험하는 차원이다. 이러한 차원의 자아실현은 곧 <자타실현>이기도 하다. 그러한 차원에 이르면 <하나님-나-타자>(GIO)는 서로의 소통에 아무런 제약이 없게 되는 것인데, 나는 이를
나 자신은 새로운 민중신학을 다른 표현으로 살림살이 신학 곧 살림신학이라도 부르는데, 내 몸의 단면도에서도 보듯이 이 지점에서 나는 신체와 세계 사회의 경계 영역에 해당하는 <생활반경>이라는 영역을 매우 중요시 여기고 싶다. 이러한 생활반경의 대표적인 사례는 두말할 것도 없이 내 삶의 가장 가까운 <보금자리>와 <일터>를 들 수 있겠다. 생활반경은 시공간적인 친숙성이 있는 내 몸의 직접적 활동영역이다.
이때 생활 속의 이 흐름이 일정한 패턴의 구조를 반복적으로 형성할 때 우리는 이를 일컬어 흔히 <생활방식> 혹은 <라이프스타일>이라고 말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 자신의 기독교 신학이 의도하는 최상의 기독교 신앙이란 예수의 라이프스타일을 내 몸으로 체득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기독교 영성훈련의 문제는 예수의 라이프스타일을 내 몸에 체득하는 훈련의 문제이기도 하다. 기독교 신앙은 결국 예수의 삶의 일상을 오늘 우리네 일상의 삶으로서 전환해내는 그것 아니겠는가! 따라서 자신의 일상적 삶을 가꿔나가는 생활방식이란 것은 참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볼 수 있겠다. 그것은 생활반경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나는 바로 이 <일상>이라는 영역을 매우 중요하게 보는데, 실은 이 일상적 삶의 변혁이야말로 진정한 세계의 변혁을 낳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안의 모든 위대함들은 바로 성실한 일상적 소박함과도 깊은 연관을 지닌다.
그리고 이 생활반경의 에너지는 다시 일반 사회로부터 나오고 일반 사회로 다시금 결국 흘러들어갈 것이다. 내 몸의 단면도에서도 보듯이 의식중추→신체(직접)→생활반경(간접)→세계(간접)로 갈수록 느낌의 직접성은 점점 더 멀어진다. 이때 나 자신이 일상이라는 생활반경이 중요하다고 보는 이유에는 그것이 신체와 세계의 가장 적당한 접점 역할로서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들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정도의 지점이기 때문이다. 내 삶이 변화된다는 것, 내 삶이 뭔가가 상향적으로 업그레이드 된다는 이 느낌은 바로 이 일상의 변화 체험과 깊숙이 관련한다.
생각건대 종교만큼 자신의 내적 신념의 체계를 뒤흔들어 놓는 것도 없으리라 본다. 그럼으로써 종교는 그 사람의 삶을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간에― 변화시키도록 만든다. 이때 우리는 그러한 신념의 체계가 적용되고 열매 맺는 그 효과들을 적절하게 체험적으로 느낄 수 있는 일상의 변화를 통해서 우리가 믿는 종교의 위력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종교는 삶의 직접적 체험에 대한 간증을 통해 그 힘을 세계 안에 알려준다. 나 자신이 일상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결국 우리네 기독교가 제대로 된 종교라면 바로 이 부분이 확고하게 그리고 제대로 열매 맺어서 나타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예수사건을 통해 나와 관련되고 있는 생활반경 즉, 일상적 삶의 건강한 변혁을 위한 모임이 될 필요가 있다. 사실상 자기변혁과 사회변혁의 효과도 결국은 자신의 일상적 삶에서 피부로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생활반경이라는 공간은 바로 그러한 부조리나 변혁의 효과들을 직접적으로 체험해 볼 수 있는 영역이라고 본다. 예컨대, 나 자신의 변혁에는 게으름이나 귀차니즘의 극복 같은 것 역시 중요하다. 동시에 또한 사회체제 변혁에 있어선 자본과 제국의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투쟁 역시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자기 안에서 직접적 현실로서 발견되고 드러나는 자리는 결국 자신의 <일상적 삶>이라는 사실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게으름이나 귀차니즘의 경우엔 개선의 필요성에 대한 직접적 느낌을 가질 수 있겠지만, 신자유주의나 제국주의의 폐해를 개선하고자 하는 필요성에 대해선 의식적 느낌을 곧잘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내 신체에서는 보다 멀어져 있는 일반적 세계 사회 영역에 그 같은 문제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의식적으로는 너무나 많이 우리의 일상들과 신체들마저 일그러뜨리며 침투되고 있다는 점 또한 분명하게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선 기존의 3세대 민중신학자인 김진호 글의 매우 탁월한 점을 들라고 한다면, 그는 우리가 흔히 간과하기 쉬운 우리네 일상 속에 은폐된 폭력과 고통의 메커니즘들을 예리하게 잘 포착하여 지적해낸다는 점에 있겠다. 만일 우리가 신자유주의나 미제국주의의 폐해들마저도 뚜렷이 지적하고자 한다면 바로 이것들이 나의 일상적 삶의 영역에 끊임없이 침투되고 있는 그 지점들을 직시할 때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더 큰 공감과 설득력을 얻어낼 수 있을 걸로 본다. 이런 쪽으로 영성수련 곧 <공부>(工夫, Kung-Fu)가 고도로 발달한 사람은 바로 그 지점을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예리하게 짚어내어 보여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보통 일반인들에겐 평택 대추리 문제나 우리나라의 FTA 문제가 어쩌면 저 먼 나라의 얘기로도 들릴 수 있다. 하지만 눈을 뜬 사람들이라면 그것은 이미 우리 삶의 일상들을 일그러뜨리는 생활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잘 인지할 것이라는 얘기다. 이때 평택 대추리에 사는 주민들의 경우, 그들은 이미 그들의 삶의 일상에서부터 미제국주의의 폐해들을 직접적으로 겪음으로서 생존의 절박성을 그 자신의 삶의 일상에서부터 너무나 크고도 깊게 느끼고 있다고 하겠다. 공부가 발달한 고도의 영성인은 세계 전체의 사건의 흐름들을 마치 자신의 일상처럼 피부로 느끼듯 이를 몸으로 느끼고 볼 줄 아는 자라고 생각된다. 영성이 발달할수록 자신의 몸과 자아는 점점 더 전체 세계를 파악하며 품어나가게 된다.
나 자신이 추구하는 교회신앙과 신학이란 바로 이러한 삶의 일상이 새롭고 건강하게 변혁되는 체험과 효과를 맛볼 수 있는 교회신앙이 되어야 할 것이며, 그러한 삶의 간증이 있는 기독교 신학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일상의 삶을 가꿔나가는 활동, 즉 <살림살이>라고 말하는 바로 그 <살림>Salrim이 내게는 매우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본인의 <새로운 민중신학>에 대한 이름붙이기를 굳이 한다면 <살림신학>Salrim Theology이 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나의 새로운 민중신학, 곧 살림신학은 일상적 삶의 변혁과 그 활동에 중점을 두고자 하는 <생활신학>이기도 하다.
그리고 알다시피 그 ‘살림’이란 말뜻에는 생명을 살리는 살림이란 말뜻도 포함된다. 죽임이 아닌 살림 말이다. 뉴욕유니온신학교의 현경 교수는 자신을 <살림이스트>라고도 소개한다. 따라서 나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살림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살림살이의 살림>과 <죽임의 반대인 살림>을 의미한다. 아마 이 두 가지 의미도 본래는 하나였을 듯 싶은데, 사실 이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얘기를 나 자신이 새삼스럽게 떠든 것일 수도 있겠다. 기존의 주류 보수신학이 지배이데올로기와 친화적인 제국의 신학이자 <죽임의 신학>이라고 한다면, 나 자신이 추구하는 신학은 그러한 기존 기독교를 대체하려는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로서의 <살림의 신학>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새로운 민중신학에서 말하는 그 자각인은 곧 살림이스트이자 생명살림꾼인 것이다.
나의 <살림신학>은 기존 민중신학의 포커스와 달리 자기 자신의 의식주 생활의 습관과 패턴의 문제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뿐만 아니라 <가정>과 <일터>라는 삶의 기초현장을 보다 근원적으로 여기고 이를 신학적으로 성찰하고자 한다. 당연히 이러한 가정과 일터라는 생활반경도 전체 세계의 흐름과 함께 맞물려 있음은 말할 나위 없겠다. 따라서 살림신학은 알고 보면 지극히 지역적이면서도 동시에 지극히 지구적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성찰이 가능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에는 나 자신의 기독교 신학이 결국 화이트헤드의 종합화 작업에 기인한다는 점에도 있다(뒤의 ‘지구적 민중신학’ 도표 참조).
그리고 살림신학은 자신의 삶의 일상을 가꾸는 <살림살이의 신학>이기에 다분히 <여성성>을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서 지닐 수밖에 없다. 소소한 삶의 일상의 그림들과 나눔들 그리고 새로운 발견들은 섬세한 여성적 감각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아기자기한 여성적인 일들에 해당되고 있다. 여성은 자기 자신의 신체와 일상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가꿀 줄 안다. 기본적으로 여성에게는 일상생활의 중요성과 가꾸기(살림)가 매우 친숙하고 자연스럽다. 앞으로의 교회신앙도 이 같은 일상성을 깊이 성찰할 때 여성성을 더욱 풍부하게 보여줄 수 있을 걸로 본다.
우리가 자기 일상의 영역에서의 상향적 변화라는 건강한 체험과 그 효과들을 기독교 신앙을 통해서 느낄 때 그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으리라 본다. 이른바 더욱 <살맛>나는 삶이 된다는 것이다. 생명의 약동과 기운을 일상에서 체험하는 건강한 신앙, 나는 그러한 기독신앙을 명시적으로 추구하고자 한다. 세상을 <살맛>나게 산다는 그 느낌, 그 <살맛>이 바로 활력이요 생명살림의 에너지다. 살맛나는 체험의 간증이 없는 신앙은 무기력하기 십상인 거다. 그리고 그 살맛나는 삶에 깃든 성령의 기운을 일컬어 흔히 말하는 <신바람>이 아닐는지. 이것은 삶의 실제적 변화들도 없이 그저 내면적 안위로만 그치는 아편적 보수 신앙도 아니요, 어설프게 정치 경제 사회 체제의 변혁으로 곧장 날아가서 사회 제도 시스템의 문제만 따져 묻는 데모꾼의 신앙도 아니다. 이 모두를 내 삶의 일상적 생활영역과 관계시켜 고찰함으로서 이를 건강하게 담아내고자 하는 <전인적 삶>으로서의 통전적 신앙이 바로 오늘날에도 가장 효과적일 수 있는 기독교 신앙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바이다.
나 자신이 추구하는 새로운 기독교 신학으로서의 <살림신학>은 기존의 주류 보수신학을 대체하는 새로운 대안 기독교 신학으로서 그 출발은 기존의 민중신학에서 진화해 온 <새로운 민중신학>이자 제3밀레니움의 삶의 일상들을 언제나 GIO만족에 비추어 새롭게 가꾸고자 하는 <건강한 기독교 신학>이 되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