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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낯을 피하여

2017년 11월 19일 청파감리교회 주일예배 설교자 김기석 목사

욘1:4-10
(2017/11/19, 창조절 제12주)

[주님께서 바다 위로 큰 바람을 보내시니, 바다에 태풍이 일어나서, 배가 거의 부서지게 되었다. 뱃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저마다 저희 신들에게 부르짖고, 저희들이 탄 배를 가볍게 하려고, 배 안에 실은 짐을 바다에 내던졌다. 요나는 벌써부터 배 밑창으로 내려가 누워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마침 선장이 그에게 와서, 그를 보고 소리를 쳤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소? 잠을 자고 있다니! 일어나서 당신의 신에게 부르짖으시오. 행여라도 그 신이 우리를 생각하여 준다면, 우리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소?" 뱃사람들이 서로 말하였다. "우리가 어서 제비를 뽑아서, 누구 때문에 이런 재앙이 우리에게 내리는지 알아봅시다." 그들이 제비를 뽑으니, 그 제비가 요나에게 떨어졌다. 그들이 요나에게 물었다. "우리에게 말하시오. 누구 때문에 이런 재앙이 우리에게 내렸소? 당신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어디서 오는 길이오? 어느 나라 사람이오? 어떤 백성이오?" 그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오. 하늘에 계신 주 하나님,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그분을 섬기는 사람이오." 요나가 그들에게, 자기가 주님의 낯을 피하여 달아나고 있다고 말하니,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겁에 질려서 그에게 소리쳤다. "어쩌자고 당신은 이런 일을 하였소?"]

* 터전이 흔들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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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기를 빕니다. 포항을 진원지로 한 지진으로 말미암아 깊은 충격을 받은 이들과도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수능 시험이 미뤄져서 혼란을 겪고 있는 수험생과 가족들도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지진으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이들이 많건만 여전히 헛소리를 주절거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지진은 문재인 정부의 독선에 대한 하늘의 경고라고 말하는 정치인이 있는가 하면, 종교인 과세에 대한 하늘의 심판이라고 말하는 목사도 있습니다. 한동대가 큰 피해를 입은 것은 한동대에서 열릴 예정이던 퀴어 세미나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누군가에 대한 증오와 혐오에서 비롯된 이런 망언들이 지금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큰 아픔을 주고 있습니다.

지진의 공포가 어찌나 컸던지 대피소에서 지내는 분들은 마이크 진동음에도 화들짝 놀란다고 합니다. 과학적 지식이 부족했던 옛 사람들의 공포는 더 컸을 겁니다. 한 시편 시인은 "주님께서 크게 노하시니, 땅이 꿈틀거리고, 흔들리며, 산의 뿌리가 떨면서 뒤틀렸다"(시18:7)고 노래합니다. 언제까지나 든든하리라고 믿었던 토대가 흔들릴 때, 그것은 우리 존재 전체를 뒤흔들어 놓습니다. 저명한 신학자인 폴 틸리히의 설교집 가운데 <흔들리는 터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독일 출신의 미국 신학자인 그는 1,2차 세계 대전을 겪었습니다. 19세기부터 팽배했던 인간에 대한 낙관론은 그 전쟁을 통해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못할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 속에 있는 악의 충동을 조절하지 못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인류는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인간의 죄성에 대한 통찰이 깊어지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유럽을 지탱해왔던 가치관들이 무너지면서 사람들이 딛고 있던 삶의 토대 또한 속절없이 흔들렸습니다. 틸리히는 바로 그런 상황을 빗대 '흔들리는 터전'이라 명명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확실하다고 믿고 또 생각해왔던 것들이 불확실한 것으로 판명나고, 안다 생각하던 것이 실은 무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사람들은 혼돈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틸리히는 우리 삶의 영원한 토대이신 하나님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비종교적인 방식으로 새롭게 표현했습니다. '존재의 터전'(ground of being)이 그것입니다. 아주 거칠게 요약하자면 하나님은 모든 생명 질서의 맨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모든 피조물과 세계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터전이라는 말입니다. 삶은 유한하고, 불안감이 점차 증대되고 있지만, 존재의 터전이신 하나님의 마음에 뿌리 내리고 있는 한 우리는 거뜬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시편 시인들의 일관된 고백이기도 합니다. "땅이 진동하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흔들리고 비틀거릴 때에, 땅의 기둥을 견고하게 붙드는 자는 바로 나다"(시75:3). 이런 하나님을 확고하게 믿을 때 심연의 공포는 사라집니다. "땅이 흔들리고 산이 무너져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시46:2)

* 딜레마

살다보면 마치 벼랑 끝에 선 것 같은, 혹은 지진을 만난 것 같은 아찔함이 우리를 엄습할 때가 있습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느낄 때 말입니다. 칼 야스퍼스는 질병, 죽음, 유한함의 자각, 죄책처럼 우리가 임의로 처리할 수 없는 것들을 일러 한계상황이라 했습니다. 한계상황은 분명히 고통스러운 상황이지만, 실존적인 도약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전쟁의 공포 또한 유사한 것일 겁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세력을 키운 앗시리아가 대군을 몰아 약소국가들을 유린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느낀 공포가 얼마나 컸을까요? 요나서는 바로 그런 경험을 배경음처럼 깔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요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 성읍에 대고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내 앞에까지 이르렀다."(욘1:2)

'그들의 죄악이 내 앞에까지 이르렀다'는 말은 그들에 대한 심판이 임박했다는 말입니다. 앗시리아의 수도인 니느웨를 수식하는 '큰 성읍'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곳은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욕망을 품고 몰려드는 곳이었습니다. 과포화상태의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합니다. '큰 성읍'이라는 말 속에는 억압과 착취, 폭력과 음모가 판을 치는 곳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큰 것'에 그렇게 큰 호감을 표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17장은 "큰 바다 물 위에 앉은 큰 창녀가 받을 심판을 보여 주겠다"(1)는 말로 시작됩니다. '큰 바다', '큰 창녀'라는 단어가 눈에 띕니다. 빨간 짐승을 타고 앉아 있는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 짐승의 몸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로 가득하고, 머리 일곱과 뿔 열 개가 달려 있었습니다. 여인은 온갖 화려한 옷과 장신구로 꾸미고 있었지만 속에는 가증한 것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마에는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 큰 바빌론'이라는 비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여기에도 '큰 바빌론'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요한은 "그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하여 있는 것을 보았"(2-6)다고 말합니다. 크다는 것이 꼭 복은 아닙니다. 제가 큰 교회를 굳이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이 그런 생각을 품는 것까지 말릴 생각은 없습니다. 크기에 집착하는 순간, 진리는 슬그머니 포기되기 쉽습니다.

요나는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라는 소명 앞에서 망설였습니다. 생각이 복잡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이 회개라도 하면 앗시리아에 대한 심판이 시행되지 않을 것이고, 그것은 고스란히 자기들에게 재앙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예언자는 참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선포한 일이 현실 속에서 일어나면 예언이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실패입니다.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보내시는 까닭은 사람들이 죄에서 돌이켜 멸망에서 구원받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기에 예언의 성공은 예언자가 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 예언자는 조롱거리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언자는 자기 불화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요나는 약소국가들이 앗시리아에게 억압받는 현실을 생각할 때 그 나라가 자기 죄의 무게에 짓눌려 무너지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가 스페인으로 도망하려 한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요나서는 그의 선택을 "주님의 낯을 피하여"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이 3절에만도 두 번이나 반복됩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합니다.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과의 분리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 위기에 처한 배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피할 수 있나요? 시편 기자는 다른 의미에서 하나님의 편재하심을 노래합니다.

"내가 주님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주님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주님께서는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주님은 거기에도 계십니다. 내가 저 동녘 너머로 날아가거나,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거기에 머무를지라도, 거기에서도 주님의 손이 나를 인도하여 주시고, 주님의 오른손이 나를 힘있게 붙들어 주십니다."(시139:7-10)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달아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은 큰 바람을 보내 요나의 앞길을 막으십니다. 태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부서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뱃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각자가 믿는 신에게 부르짖었습니다. 그들은 태풍을 신의 노여움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를 항해하는 인간은 근원적인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김기림은 '나비와 바다'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무도 그에게/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철부지 흰 나비가 아닌 바에야 누가 바다가 두렵지 않겠습니까? 바다의 공포가 얼마나 컸길래 요한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유리 바다를 보았겠습니까?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 바다 말입니다.

풍랑이 일어 아비규환의 상황이 되었는데 요나는 어떻게 하고 있었습니까? 배 밑창으로 내려가 누워서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를 참 태평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의 잠은 사실은 현실 도피일 뿐입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깊이 잠들었던 예수님의 잠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여호와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잠을 주신다(시127:2)는 고백과도 무관합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달아나는 요나의 마음이 평안했을 리 없습니다. 그는 그런 현실을 잊고 싶었기에 잠을 청했을 것입니다. 선장은 배 밑창에서 잠들어 있던 요나를 깨우며 말합니다. "일어나서 당신의 신에게 부르짖으시오. 행여라도 그 신이 우리를 생각해 준다면, 우리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소?"(6b)

아무리 빌어도 풍랑이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들은 뭔가 희생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신이 노여워하여 벌어진 일이라면 신을 달래기 위해 희생을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용돌이치는 인당수에 심청이를 던졌던 뱃사람들을 떠올려 보면 되겠습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 희생자를 가리기로 했습니다. 그 제비가 요나에게 떨어졌습니다.

* 당신은 누구요?

사람들은 마침내 풍랑의 이유를 알았다는 듯이 요나에게 질문을 쏟아냅니다. 둘러선 사람들의 표정이 험상궂었을 것입니다. 당장이라도 때려죽일 듯 죄어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말하시오. 누구 때문에 이런 재앙이 우리에게 내렸소? 당신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어디서 오는 길이오? 어느 나라 사람이오? 어떤 백성이오?"(8)

쏟아지듯 퍼붓는 뱃사람들의 질문을 통해 요나는 자기 정체성과 소명을 재확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명함을 주고받으며 건네는 통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오. 하늘에 계신 주 하나님,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그분을 섬기는 사람이오."(9)

아이러니합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는 그의 입에서 자기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 땅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는 이들을 찾아가셨고, 그들을 자유의 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주저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히브리 사람의 주 하나님'(출3:18)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히브리 사람은 특정한 인종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고대 근동 세계를 떠돌던 날품팔이 노동자들과 강제 노역에 시달리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문명의 중심에서 밀려나 소모품처럼 취급되고 있던 이들을 보호하고, 그들이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도우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스러웠던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다른 이들을 보살피고 돌보라는 소명까지 주셨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특정한 지역만 다스리는 지역신이 아닙니다. 하늘은 물론이고 바다와 육지까지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요나는 바로 그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자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그는 자기가 지금 주님의 낯을 피하여 달아나고 있다고 정직하게 고백합니다. 사람들은 겁에 질려 소리쳤습니다. "어쩌자고 당신은 이런 일을 하였소?" 이것은 뱃사람들의 책망이지만, 그들의 입을 통한 하나님의 책망이기도 합니다. 마치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네 동생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던 것과 같습니다. 한때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등지고 달아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무산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거대한 착각입니다. 그것을 이제야 비로소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파도가 더욱 거세지자 뱃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저 바다가 잔잔해지겠는지를 요나에게 묻습니다. 그 때 요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지시오. 그러면 당신들 앞의 저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오 바로 나 때문에 이 태풍이 당신들에게 닥쳤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욘1:12)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는 배와 거기 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키려고 합니다. 책임을 지겠다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잘못된 선택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성공회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인 김동춘 박사는 "'겁 많은 자의 용기'를 넘어서"라는 칼럼에서 불의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며 자기 회사 혹은 조직의 불의를 폭로한 이들을 가리켜 '양심의 호루라기'를 분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안일한 행복을 싫어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기 위해 자기를 내던졌습니다. 두렵지만 역사가 부여한 무게를 감당하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권정생 선생님은 그런 이들이 바로 혁명가라 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은 깊이 잠든 제자들을 깨우시며 "일어나서 가자. 보아라, 나를 넘겨줄 자가 가까이 왔다"(마26:46)고 하셨습니다. 죽음이 예기되는 길을 피하지 않으심으로 주님은 세상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오늘 우리 역사는 풍랑을 만난 배처럼 위태롭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믿는 이들은 역사를 생명과 평화의 방향으로 견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바칠 진정한 예배입니다. 두렵고 떨리지만 조금씩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우리를 바칠 때 주님은 우리와 더불어 더 나은 세상을 이루실 것입니다. 한 주간 동안도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온라인이슈팀 newspaper@verita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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