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제대로 질문을 못하면 나라가 망해요."
독립언론 <뉴스타파> 앵커였다가 8일 MBC 사장으로 발탁된 최승호 사장이 PD시절 퇴임한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던진 돌직구다. 이명박·박근혜 보수 정권은 지난 9년 동안 언론을 철저히 홍보수단으로 전락시켰다. 이 결과 정작 세상에 알려져야 할 진실은 가려졌고, 국가 공동체는 뿌리째 흔들렸다. 최 PD의 말대로 나라가 망한 것이다.
다행히 KBS·MBC 등 공영방송을 다시 세우려는 몸부림이 일고 있고 특히 MBC는 정상화 수순을 밟고 있다. 한편 JTBC는 지난해 10월 최순실 태블릿PC 보도 이후 꾸준히 단독보도를 이어가며 언론의 '감시견'(watch dog) 역할을 해오는 중이다. 그러나 공영방송이 제 궤도를 찾고 JTBC가 지금의 기조를 이어나가면 언론은 개혁된 것일까?
해직기자, 언론개혁 화두 파고들어가다
2012년 파업으로 해고됐다 최 사장 취임과 함께 복직한 MBC 박성제 기자가 쓴 <권력과 언론> '기레기 저널리즘의 시대'는 위에 적은 언론개혁 화두를 파고들어간다.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한 줄 한 줄에 해직언론인으로서 언론을 바로 세우고자 하는 저자의 고민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내가 해직언론인으로서 보낸 지난 5년은, 기레기와 부역자로 전락한 우리 언론의 비참한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고민하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했다. 이 책은 그러한 고민의 산물이다." - 머리말 중에서.
저자는 자신의 고민을 풀어내고자 신문·방송·시민운동·디지털미디어 등 언론계 각 분야 대표주자들을 차례로 만난다. 먼저 손석희 JTBC 보도부문 사장의 강연, 민동기 <미디어오늘> 편집국장, 최승호 <뉴스타파> 앵커, 김언경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 강정수 <메디아티> 대표와 대담을 가졌다. 그리고 권태선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전 <한겨레> 편집국장), 김경래 <뉴스타파> 기자(전 KBS 기자), 이명선 '셜록' 기자(전 <채널A> 기자), 배정훈 SBS <그것이 알고 싶다> PD 등과는 인터뷰를 진행했다.
책 구성은 첫 머리에 손석희 사장이 2017년 4월에 한 한국방송학회 봄철 정기학술대회 발제가 배치됐고, 이후 대담 및 인터뷰, 저자의 결어로 이뤄졌다. 첫 머리와 결어만 빼고는 모두 대화 형식인 셈이다. 저자는 언론계 각 분야 대표 주자들과 대담을 통해 자신의 고민을 풀어 나간다.
독자에 따라선 이 같은 구성이 생소할 수 있겠다. 그러나 대화는 진실을 이끌어내는 강력한 방식 중 한 가지다. 고대 철학자 플라톤의 고전 <국가론>이 소크라테스와 제자들의 대화체로 쓰여졌음을 기억하자. 모순을 통해 진리를 찾는 철학의 방법론인 '변증법'(dialectics)의 어원이 '대화'를 뜻하는 영어 단어 'dialogue'와 같다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정론직필 언론인이 다수였던 적은 없었다
눈에 띄는 몇 가지 내용을 살펴보자.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소셜 미디어 상에선 한·경·오가 '가난한 조·중·동'이라는 비난 섞인 프레임이 형성됐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민동기 <미디어오늘> 편집국장은 두 가지 진단을 내놓는다.
"그분들(한·경·오 비판 독자 - 글쓴이)이 진보언론을 비난하는 요인은 지금 발생한 것이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 서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봅니다. 당시 박연차 게이트 수사를 했을 때 언론사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과하게 비난했거든요. 예를 들어 경향신문은 <굿바이 노무현>이라는 칼럼으로 노 전 대통령의 뇌물수수 혐의를 기정사실화 하면서 강하게 성토했죠. (중략) 상당수의 노무현·문재인 지지자들은 이런 칼럼들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이 절망과 배신감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해요.
노무현 대통령 서거 후 처음에는 분노가 이명박 정권으로 향하다가 지지자들 사이에서 한겨레, 경향신문에 대한 분노가 커졌죠. 또 하나는 정치 저널리즘에서 한겨레나 경향신문 등 진보언론이 양비론, 기계적 중립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있다고 봅니다. 지지자들이나 진보언론 수용자들이 봤을 때 이 문제는 '나쁜 것', '악'이라고 짚어야 하는데 똑같이 다루는 거예요. 예전의 반감과 이런 상황이 포개져 '한·경·오 너희도 똑같다'는 등의 과한 반응이 나오는 것이라고 봅니다." - 본문 61~62쪽.
요사이 언론, 그리고 언론 종사자들을 바라보는 여론의 시선은 싸늘하기 그지없다. 특히 '기자'와 '쓰레기'를 합친 '기레기'란 용어가 횡행한다. '기레기'란 낱말이 사용된 직접적인 계기는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였다.
그러나 사실 우리나라 언론의 역사를 따라 올라가다보면 기자가 '기레기'가 아닌 시절은 별로 없었다. <한겨레> 편집국장을 지낸 바 있는 권태선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는 자신이 현장에 있던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저널리스트, 즉 기자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이 두 가지로 양분되는 것 같습니다. 정론직필을 통해서 공공의 이익에 기여하는 기자상이 하나 있는가 하면, 다수의 사람들이 현실에서 접한 기자들 가운데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이들도 많죠. 이런 기자들은 역사적으로 계속 존재해왔고요.
국민들은 정론직필하는 기자를 기대하지만, 역사적으로 그런 기자들이 많지 않았다는 게 정확한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니 <한겨레신문>을 만들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기도 하고요. '자신이 누굴 위해서 일하는가'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갖춘 언론인이 역사적으로 다수였던 적은 없다고 봅니다." - 본문 83~84쪽.
'정론직필하는 기자가 역사적으로 다수였던 적은 없다'는 지적은 참으로 준엄하다. 무릇 현재 자신이 언론에 몸담고 있다면 이 같은 지적에 대해 겸허해야 할 것이다. 언론 종사자들이 정론직필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공공의 이익보다 권력자의 이익에 더 충실하게 복무했기 때문이다.
한때, 더 정확히 말하자면 김대중-노무현 민주정부 10년 동안 언론이, 특히 공영방송이 '공영적'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명박 전 정권이 들어서면서 공영방송이 기레기로 전락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에 대해 권 공동대표는 다시 한 번 뼈아픈 지적을 한다.
"...제대로 된 언론을 해보자고 했던 사람들이 민주정부 10년의 좋았던 언론환경에서도 왜 다수가 되지 못했는지, 왜 제대로 된 언론의 기풍을 만들어내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마음이 있습니다." - 본문 85쪽.
KBS·MBC 두 공영방송 노조는 방송 정상화를 위해 파업을 벌였고, 이 가운데 MBC는 최 사장이 취임하면서 신뢰회복에 나서겠다는 각오다. 최 사장은 13일자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언론으로서 정도를 가겠다"고 약속하기까지 했다. KBS 역시 이사들의 비리 사실이 드러나면서 노조는 이들에 대한 해임을 외치는 중이다. 이런 일련의 흐름은 무척 고무적이다. 그러나 방송장악 '공범자'들을 몰아내는 게 공영방송 정상화의 궁극적인 종착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보다 민주정부 10년, '좋았던 언론환경'에서 제대로 된 언론인이 다수를 차지하지 못했던 점을 자각해야 한다. 결국 방송정상화는 언론인의 자성으로 귀결되는 셈이다. 저자인 박성제 기자 역시 이 점을 강조했다.
"방송 시장의 공정한 경쟁을 위한 제도를 정부가 만들 수는 있겠지만 특정 방송사의 논조를 일일이 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방송개혁은 언론인 스스로의 자성과 의지가 없다면 불가능한 작업이라는 이야기다. 언론인들 스스로 싸워야 한다. 방송을 통제하려는 부패 권력과 낙하산 사장에 맞서서 기자, PD들이 저항해야 한다.
낙하산 사장을 몰아낸 다음, 공영방송 지배구조를 개혁하라고 당당하게 새 정부에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새롭게 구성된 이사회에서 중립적이고 공정한 절차를 거쳐 사장을 선임해야 한다. 이것이 KBS·MBC 개혁의 출발점이자 가장 중요한 단계다. 이 첫 단추를 잘 채운다면 공영방송 정상화 과정은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 - 에필로그 중에서
지난 9년 동안 보수정권을 거치면서 시민들은 언론이 바로서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수 있음을 피부로 느꼈다. 이런 와중에 각계 전문가들은 인터넷 커뮤니티나 소셜 미디어에 자신의 전문지식을 드러내면서 보도자료만 베낀 기사들을 에누리 없이 걸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환경 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언론 업계는 구태에서 벗어날 줄 모른다. 보수정권의 공영방송장악에 협력한 '공범자들'은 적반하장이고, 종편 패널들은 버젓이 아무 말이나 내뱉는다. 또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수많은 매체들은 클릭 장사에 열을 올린다. 이런 행태들은 자멸로 귀결될 것이 분명하다. 제발 모든 언론계 종사자들이 박성제 기자의 외침을 경청하기 바란다.
"자성과 소통을 거부하는 언론은 독자와 시청자에 의해 도태되고 결국 사라질 것이다. 언론을 둘러싼 모든 상황이, 세상이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