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명기 5:16-18, 야고보서 2:14-17, 마가복음 10:17-22 -
가톨릭교회를 다니는 한 아가씨가 개신교회를 다니는 한 청년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이 아가씨의 어머니는 둘의 결혼을 결사반대했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 청년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결혼을 승낙하겠다고 했습니다. 아가씨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몇 달이 지났습니다. 어머니는 딸이 울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얘야, 왜 울고 있니? 얼마 전에는 그 청년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고 기뻐하지 않았어?" 그러자 딸이 답합니다. "엄마, 그게 문제예요. 그 사람의 신앙이 너무 깊어져서 이제는 신부가 되고 싶대요." 정말 큰일 났습니다. 가톨릭 사제가 되려면 독신으로 살아야 하는데, 이 아가씨는 어떡하라 말입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10장의 이야기는, 이 유머의 이야기와는 반대의 결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 '한 부자 청년 관원'의 이야기로 알려진 이 스토리는, 당신의 제자가 되라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초대를 결국 받아들이지 못하고 슬피 울며 돌아간 한 청년의 슬픈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본문을 보니 이 청년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것을 보고 먼저 그 앞에 "달려와서 꿇어앉아" 물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부릅니다: "선한 선생님!"(Good teacher!) 마가는 도입부부터 팽팽한 긴장을 예고합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우리 한국식 예법과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높여주면, 다른 사람도 그에 상응해서 그 사람을 높여주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Honor," 즉 명예, 체면 혹은 염치를 중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청년은 예수님 앞에 먼저 꿇어앉아 최상의 경어로 예수님을 불렀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자신의 언행에 상응하는 예수님의 예우를 요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 가운데는 오직 아브라함과 모세와 아론만이 선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으니 그가 지금 얼마나 최상의 경어로 예수님을 떠받드는 것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그렇게 부름으로써 자신도 그에 상응하는 예우를 받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신학적으로 아주 이상한 질문을 예수님께 드립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불행히도 이 질문은 번역이 잘못 되어 있습니다. 영어번역을 살펴보면 이 질문이 신학적으로 매우 이상한 질문이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됩니다. "What shall I do so that I inherit eternal life?," 즉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상속'받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물었던 것입니다. 영생은, 잘 아시지만, 상속받는 게 아닙니다. 세습되는 게 아닙니다. 부모나 조상의 덕으로 그냥 물려받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가진 재물이 많았던 이 부자 청년은 영생도 자신의 재물처럼 그렇게 상속받는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속셈과 질문의 의도를 곧바로 간파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짜고짜 공개적으로 무안부터 줍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자신이 표한 최고의 예우에 상응하는 대우를 기대하던 이 사람에게 이것은 망신도 이만저만한 망신이 아니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악수하자고 내민 손을 차갑게 무시하는 격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살면서 한 두 번은 이런 당황스런 경험들을 하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이 매정한 태도에 부자 관원 청년은 매우 놀랐을 것입니다.
그는 선택받은 백성인 이스라엘 공동체의 한 충직한 구성원이 되고 또 모세의 계명을 잘 지키면 영생을 상속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의 허를 찌르는 송곳 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네가 계명을 알지 않느냐?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그리고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지 않았느냐?" 읽어보면 읽어볼수록 예수님의 이 질문은 이 청년의 숨겨진 허점을 찌르는 질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계명들은 모두 어디서 나온 것들입니까? 예, 바로 모세가 준 십계명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지금 예수께서는 십계명 가운데 제5계명에서 10계명까지의 여섯 계명만 콕 집어서 선택적으로 언급하고 계십니다. 제1계명에서 제4계명까지는 하나도 언급하지 않으시고 오직 제5계명에서 제10계명만 언급하십니다. 제1계명에서 제4계명은 무엇입니까? 첫째,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둘째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셋째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그리고 넷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입니다. 이는 모두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수직적 관계에 대한 계명들입니다. 이와 달리 제5계명에서 10계명까지의 여섯 계명은 모두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수평적 관계에 대한 계명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그리고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아마도 이 청년은 하나님에 대한 계명은 잘 지켰을 것입니다. 아니 그 누구보다 경건하고 열심인 신앙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부자청년에게서 정작 궁금했던 것은 그의 사회적 관계였습니다. 그의 이웃과의 관계였습니다. 여기서 대단히 흥미로운 점은 예수님이 그의 이웃과의 관계를 되물으시는 십계명의 여섯 계명을 언급하시면서 본래 십계명에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do not covet your neighbor's house)라고 되어 있는 계명을 "[네 이웃의 것을] 속여 취하지 말라"(do not defraud)는 문구로 바꾸어 묻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더욱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이웃의 것을 '속여 취하지 말라,' 즉 이웃의 것을 '사취하지 말라,' 또는 '편취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아주 구체화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2천 년 전 유대 사회에서는 아무도 "남을 속여 취하지" 않고는 부자가 될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로마의 식민지 아래서 유대인들은 아무도 정당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부자들은 대부분 남의 땅을 속여 취한 대토지 소유주들이었습니다. 사두개파가 그들 아니었습니까. '땅 사두개~'에서 그들의 이름이 유래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건이 이웃과의 정의로운 관계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허식입니다. 기만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죄를 지었을 경우에는 하나님 뿐 아니라 피해를 입은 당사자에게 용서를 함께 구하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이고 원리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부자 청년에게 다음과 같이 영생에 이르는 해법을 주십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와서 나를 따라라." 여기서 먼저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이 청년을 보시고 그를 "사랑하사" 이 말씀을 하셨다는 마가복음의 기록입니다. 마가복음을 통틀어 '사랑'이라는 단어는 여기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복음서 중에서 유독 '정의'의 문제에 민감하다는 마가가 여기에서만 유일하게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예수께서는 이 사람의 허식과 허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불타고 있는 영생에의 갈망과 몸부림을 깊이 연민하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가혹했습니다. 그를 깊이 연민하셨지만, 사랑하셨지만, 그가 도망갈 샛길도, 혹은 그가 적당히 타협할 방법도 일러주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모든 것이 다 충족되어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한 가지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도 99도에서는 끓지 않지요. 단 1도가 부족해도 그것은 끓는 물이 아닙니다. 그 청년에서 '한 가지 부족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불행히도, 맨 처음에 자신의 소중한 여자 친구마저 버리고 사제가 되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결심한 그 청년과 달리, 오늘 마가 본문에 나오는 이 청년은 "가진 것이 많아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떠나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번역들은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불행히도, 오늘 우리의 이야기는 "unhappy ending"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경애하는 여러분, 이 사람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영생을 갈망하던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끊어버리는 것' 아닐까요? '끊어버리다'라는 말을 한자로 하면 '결단'(決斷)입니다. 결단이란 한자는 '끊을' 決에 '끊을' 斷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자문화권에서 결단이란 '끊고 또 끊는 것'입니다. 영어도 비슷합니다. 무엇을 결단하다 혹은 결심하다는 말은 영어에서 "to decide"인데 이 "decide"의 어원 역시 "cut away"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영어문화권에서도 결단은 무엇인가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결단은 포기하는 것입니다. 결단은 버리는 것입니다. 결단은 끊어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 좋은 것들의 적절한 혼합이나 타협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결단은 여러 좋은 것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에 온전히 헌신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오늘 성서 본문의 청년은 끊어버리지 못했습니다. 잘라내지 못했습니다.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많았고, 그는 그 위에 하나 더, 영생까지 얹고 싶었습니다. 자신이 상속받은 것 위에 영생까지 덤으로 상속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그것이 가능한 방법을 물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영생이란 궁극적인 결단, 최종적인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추가적인 '옵션'(option)과 같은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자동차를 구입할 때 추가비용을 내고 선택하는 옵션처럼 말입니다. 내가 이미 가진 것, 내가 이미 누리는 것, 그리고 내게 이미 확보된 것 위에 추가로 덧붙이고 싶은 어떤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학식과 교양 그리고 재물 위에 그것들을 더 빛나게 해 줄 '한 가지 더'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조금도 타협의 여지를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마태 6:24)고 말씀하신 예수께서는 어떤 적당한 중간지대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가혹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깊은 타협의 불가능성을 깨달았기에, 그 청년은 슬픈 얼굴로 근심하며, 울상이 되어 자기의 자리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렇게 이 이야기는 "unhappy ending"으로 끝나고 만 것입니다. 영화나 드라마나 이렇게 끝나면 참 싫으시지요. 하지만 성서는 그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이 본문은 오늘 바로 우리 자신을 비추어주는 '불편한 이야기'로 다시 읽히고 있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가 오늘 우리들에게만 불편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가 얼마나 불편했는가 하면 심지어 마태복음서의 기자도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약간의 변형을 가할 정도였습니다.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마가 10:21, 누가 18:22)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기록과는 달리 마태복음은 이 말씀 앞에 "만약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If you want to be perfect)"이라는 조건절을 추가하고 "다 팔아서"에서 "다"를 생략했습니다(마태 19:21). 그리하여 이 말씀은 마치 수도자나 성직자들과 같은 일부 특별한 사람들에 국한하여 주신 말씀처럼 변형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본문을 마가와 누가가 전하는 그대로 읽고 싶습니다.
세계 신학계에 큰 영향일 끼친 칼 바르트(Karl Barth)라는 스위스의 신학자는 한 유명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성서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성서가 우리에게 열릴 때, 그 안에는 어떤 땅이 있는가?" 그는 성서 안에 '한 새로운 세계, 즉 하나님의 세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성서의 주된 내용은 인간의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때문에 성서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을 전개하고 확증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 하나님이 이해하는 사랑이 거기에 있고 또 거기서 흘러나온다고 말합니다. 성서의 내용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바른 생각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바른 생각입니다. 성서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 말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씀하시는가를 이야기합니다. 즉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을 발견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는 길을 추구하셨고 또 발견하셨느냐를 말합니다.
그래서 성서에는 사람이 자신을 온전히 맡겼을 때 그를 바다로 이끌어가는 강이 있다고 바르트는 말합니다. 인간은 성서에 있는 이 강을 감히 따라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르트는 이 모험이 바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인생이 어디로 이끌려 가는지도 확실히 모르는 불확실성을 향해 감히 나아가려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성서를 읽을 때 거짓된 겸손으로가 아니라 바로 이런 믿음으로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럴 자격도, 능력도 없지만 내가 나의 한계를 넘어서서 하늘의 것을 모험하고 또 그것을 붙잡으라는 초대는 성서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른바 '현대적' 신앙의 문제는 현실에의 안착과 영생에의 부르심 사이에 적당히 타협하는 것을 오히려 세련된 신앙이라고 여기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실로 우리의 믿음은 타협적입니다. 우리의 헌신은 부분적입니다. 신앙이 흑백 이원론일 필요는 없지만 여러 좋은 것들 중 하나로 전락한다면 그건 문제입니다. 영생에의 결단이, 복음과 생명에 대한 헌신이 최고의 가치와 목표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기독교는 더 이상 소수종교가 아니라 주류종교입니다. 한국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더 이상 '위험한'(risky) 일이 아닙니다. 초대교인들과 달리 요즘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신변에 아무런 위협도 느끼지 않고 서슴없이 예수는 '나의 주'라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더 이상 이 나라에서 '좁은 문'이 아니라 넓고 평탄한 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신앙은 서서히 '일상적인'(routine) 일이 되어갔습니다. 판에 박힌 일과가 되었습니다. 예수를 따라 살지 않아도, 일주일에 한 번 예배를 드리면 족한 종교적 행위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나라를 향한 결단도, 온전한 헌신도 찾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영생과 현실 사이에 적당한 타협을 세련된 신앙이라 여기며 그 부자 청년 관원처럼 우리가 이미 누리는 것 위에 영생도 더하여 상속받고 싶은 자들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는 이렇게 진정한 결단과 온전한 헌신이 따르지 않은 믿음을 가리켜 "값싼 은혜"(cheap grace)라 말했습니다. 값싼 은혜란 '싸구려 신앙'이라는 뜻입니다. '싸구려'라는 말은 물건을 팔고 사는 시장의 용어입니다. 모든 것이 상업화된 현대사회에서 신앙에도 기가 막히게 시장 원리가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이윤을 남기려는 원리가 종교생활에도 적용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 11:28)는 말씀을 잘 알고 있지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태 16:24)는 종종 외면하고, 잊고 있습니다.
어느 도시에 목회를 잘 하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개척해서 열심히 목회를 하니 교회가 크게 부흥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과로로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콩팥 두개를 다 떼어내고 다른 사람의 것을 이식받아야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평소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며 사랑의 실천을 강조했으니 수많은 교인들 가운데 누구 하나 콩팥을 떼어주지 않겠나 싶어, 주일 설교시간에 상황을 설명하고 콩팥을 떼어줄 사람 손을 들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맨 앞줄에 앉은 장로님들로부터 조심조심 손을 들더니 급기야 예배당을 꽉 채운 3천 명이 다 손을 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그렇지! 내가 목회를 잘못하진 않았어!' 목사님은 너무도 마음이 흡족해졌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3천 개의 콩팥은 다 필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자기 머리카락 하나를 뽑아서 날릴 것이니 전 교인이 '주여 삼창'을 하고 통성으로 기도하는 동안 그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사람이 콩팥을 기증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이 제안에 따라 모두가 '주여!'를 세 번 외친 다음에 눈을 감고 열심히 통성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몇 시간이 지나도 그 머리카락이 공중에 둥둥 떠다니기만 하고 아무에게도 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너무도 이상해서 자세히 보니 교인들 모두가 이렇게 기도하더랍니다. (바람을 불며) "주~여," "아~멘," "믿~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요한계시록 3:15-16).
경애하는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초대 앞에서 아직도 우리를 주저하게 만드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은 무엇입니까? 영생의 결단 앞에서 오늘도 "슬픈 기색으로 근심하며 떠나게" 만드는 나의 '가진 재물'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는 오늘도 당신 앞에 나아가 '내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습니까'라고 묻는 나를 보시며 "사랑하사" 이렇게 말씀해주십니다.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구나.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고 와서 나를 좇으라." 이 말씀은 그때도, 오늘도,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우리에게 영원히 '불가능의 신앙명제'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씀을 요리조리 능숙하게 해명하여 빠져나가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저 이렇게 할 수 없는 우리의 불가능성 앞에 부끄러운 마음으로 정직하게 서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을 보아야 합니다. 하늘을 보며 빈 손 들고 울고 서 있어야 합니다. 신앙이란 바로 그러한 정직한 대면입니다. 유한한 존재가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유한 그대로 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의 본문 바로 뒤를 보면(10:23-31), 제자들도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놀라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그 청년에게 일말의 여지도 제공하지 않으시고 가혹하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답을 듣고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러면 도대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고 술렁거렸던 것입니다. 이들을 향해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For mortals it is impossible, but not for God; for God all things are possible, 10:27). 교우 여러분, 이것이 바로 마가복음의 기자가 우리에게 전하는 믿음입니다. 사람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으로서는 다 가능하다! 마가가 전하는 믿음이란 바로 이처럼 '하나님의 가능성' 앞에 '우리의 불가능성'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능성 앞에 나의 불가능성을 끊어내는 것입니다. 그 결단이 곧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의 결단이 오늘 그리고 앞으로도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말씀과 의미가 통할 수 있는 김소월의 시 한 편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제목 <신앙>. 김소월
눈을 감고 잠잠히 생각하라.
무거운 짐에 우는 목숨에는
받아가질 안식을 더 하랴고
반드시 힘 있는 도움의 손이
그대들을 위하여 기다릴지니.
그러나 길은 다하고 날이 저무는가.
애처러운 인생이여,
종소리는 배바삐 흔들리고
애꿎은 조가는 비껴 울 때
머리 수그리며 그대 탄식하리.
그러나 꿇어앉아 고요히
빌라, 힘 있게 경건하게.
그대의 맘 가운데
그대를 지키고 있는 아름다운 신(神)을
높이 우러러 경배하라.
멍에는 괴롭고 짐이 무거워도
두드러던 문은 멀지 않아 열릴지니
가슴에 품고 있는 명멸의 그 등잔을
부드러운 예지의 기름으로
채우고 또 채우라.
그러하면 목숨의 봄두던의
살음을 감사하는 높은 가지,
잊었던 진리의 봉어리에 잎은 피며,
신앙의 불붙는 고운 잔디
그대의 헐벗은 영(靈)을 싸덮으리 (201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