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사건은 한국전쟁의 전주곡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또한 근본주의 신앙에 기반을 둔 집단이 인명살상을 자행했던 무대이기도 했다.
제주 출신의 독립영화 감독 오멸은 2013년작 <지슬>(부제 : 끝나지 않은 세월2)에 당시의 참상을 옮겨 놓는다. 이 작품은 양민학살과 반대자에 대한 조직적 제거행위가 이 땅에서 횡행했음을 생생히 그린다.
제주 방언으로 감자를 뜻하는 '지슬'은 무엇보다 영상미가 돋보인다. 흑백으로 처리된 화면은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방불케 한다. 화면 곳곳에 드러나는 제주의 평화로운 풍광은 또 다른 볼거리다. 미술학도였던 오멸 감독의 예술적 감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등장 배우들이 말하는 제주 방언은 또 하나의 볼거리이자 들을거리다.
카메라는 폭도로 몰려 쫓기는 신세가 된 주민과 폭도를 토벌하기 위해 섬에 온 군인들을 번갈아 가며 비춘다. 주민들은 돼지를 치고 감자로 끼니를 이어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군인들을 피해 동굴에 은신한다.
반면 군인들은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한다. 특히 북한 말투를 쓰는 어느 군인은 살인을 즐기는 듯 보인다. 그는 '빨갱이'에 대한 적대감에 사로잡혀 있고, 이런 적대감은 살육으로 분출된다. 뭍에서 온 군인들의 무차별 살육은 흡사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이 자행했던 양민학살을 떠오르게 한다. 군인의 칼에 무참하게 살해당한 한 노파는 자신을 찌른 군인에게 마지막 한 마디 말을 남기는데, 그 말은 무척이나 의미심장하다.
"도대체 빨갱이가 뭐길래"
영화는 군인들의 잔혹행위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또 사건이 벌어진 정치척 배경을 설명하지도 않는다. 사건은 대부분 간접화법으로 드러난다. 연기 자욱한 동굴에서 군인들이 무차별적으로 총을 발사하는 장면에서는 몽환적인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이런 간접화법은 오히려 사건의 잔혹함을 강렬하게 부각시킨다. 영화를 보는 내내 동족에 의한 잔혹한 학살행위가 이 땅에서, 멀지 않은 과거에 벌어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지경이다.
전반적인 구성은 많이 아쉽다. 4.3사건을 드러내 줄만한 요소가 죄다 잘려 나간 느낌이 들어서다. 제주 출신의 연출자는 자라면서 고향의 비극을 직·간접적으로 겪었을지 모른다. 이에 4.3사건의 전후맥락을 알 수 있게 하는 장면을 배치했다면 더 큰 공감과 반향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라고 본다.
아마 영화의 진정한 의도는 희생자들에 대한 위로와 치유인 것 같다. 이야기의 흐름을 제사용어인 ‘신위(神位)', ‘신묘(神廟)', ‘음복(飮福)', ‘소지(燒紙)' 등 네 단락으로 나눈 점에서 특히 그렇다.
한국전쟁 축소판이었던 제주4.3
앞서 적었듯 제주 4.3사건은 한국전쟁의 전주곡이나 다름없었다. 제주도민들은 이승만 주도의 남한 단독정부 구성에 격렬히 저항했다. 제주도민들의 저항이 격했던 건 교육수준과 무관하지 않다. 4.3 당시 소학교 이상 졸업생 비율은 제주도가 가장 높았다. 이와 관련, 양조훈 4.3평화재단 이사장은 지난 달 14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제주 평화기행단의 방문을 받은 자리에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4.3을 탄압한 건 제주도민들이 깨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미군정 당국은 제주도민들의 저항을 군사전략적 관점에서 다뤘다. 무슨 말이냐면 당시는 미소 냉전구도가 본격화되던 시점이었고, 이 같은 정세는 미군정의 사고에 영향을 끼쳤다는 의미다. 미 군정 당국은 잠재적 적대세력이 제주도민들의 봉기를 선동한 것으로 보았다. 이승만 정권은 미군정의 속내를 간파하고 '시그널'을 보냈다. 1949년 1월21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미국의 냉전전략과 이승만 정권의 이해관계는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뭍에서 온 군인들, 그리고 서북지역(평안도와 황해도) 출신의 열혈 기독교 신봉자가 주축인 '서북청년회'(서청)는 거리낌 없이 잔혹행위를 일삼았다.
특히 서청의 잔혹행위는 가공할 정도여서 국내는 물론 국외 연구자들마저 경악하게 만들었다. 김진호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은 서청의 잔혹행위가 이슬람국가(IS)에 버금가는 수준이라고 지적했었다. 또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브루스 커밍스 미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이란 책에서 서청의 만행을 자기혐오, 그리고 극단적 여성혐오 범죄라고 규정했다.
"미군정의 내부 기밀 보고서에서 이 집단은 흔히 남한 전역에서 테러를 자행한 파시스트 청년단으로 묘사되었다. 단원들은 주로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 출신이었고, '청년'은 10대부터 중년까지 고르게 분포한 악한들이었다. (중략)
예를 들면 하귀리 마을에서는 남편이 반란자로 추정되는 스물한 살 된 임신부 문씨는 집에서 우익 청년단에게 끌려가 창으로 열세 번 찔려 유산했다. 그리고 아이가 반쯤 나온 상태의 그녀를 죽도록 내버려두었다. 다른 여인들은 흔히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윤간한 뒤 질 안에 수류탄을 집어 넣어 폭발시켰다. 이 병리 현상은 아마도 이전에 일본에 복종했고 이제는 다른 외세(미국 - 글쓴이)를 위해 활동하는 자들의 자기혐오, 그리고 가부장적 한국 사회의 극단적인 여성 혐오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렇듯 제주4.3은 해방 이후 모순이 집약된 비극이었고, 이 같은 비극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이어진다. 제주4.3을 한국전쟁의 전주곡이라고 규정한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이제 시간이 많지 않다
제주4.3은 올해 70주년을 맞는다. 올해 제주4.3의 의미는 각별하다. 지난 이명박·박근혜 보수 정권에서 제주4.3은 폄하되기 일쑤였다. <지슬>을 연출한 오멸 감독은 박근혜 전 정권이 만든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다 새정부 들어서면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미 후보 시절 제주를 찾아 "정권교체가 되면 제3기 민주정부에선 4.3추념식에 대통령이 참석해서 국가적인 추념행사로 위상을 높이겠다"고 약속하기도 했었다.
개신교계 역시 의미 있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지난 달 14일과 15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정의평화위원회(아래 정평위)와 제주 NCC가 제주4.3 70주년에 발맞춰 '2018 부활절 맞이 제주4.3 평화기행'(아래 평화기행)을 진행했다. 이어 지난 달 30일 이홍정 총무 등 NCCK 지도부는 양조훈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과 양윤경 제주4.3희생자유족회장을 만나 4.3사건 해결과 평화 구축을 위해 협력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럼에도 아직 갈 길은 멀다. 제주4.3 사건에 대한 인식이 여전히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난 달 15일 평화기행 때 제주4.3 흔적을 돌아보았는데, 그때 뵈었던 양봉천 문화해설사(전 의귀마을 희생자 유족회 회장)는 이런 말을 건넸다.
"사람들이 광주5.18 하면 어느 정도 아는데 제주4.3 하면 잘 모르더라."
제주4.3은 광주5.18, 용산참사, 쌍용자동차 구조조정, 세월호 등 한국 현대사에서 횡행했던 국가폭력의 효시나 다름없는 사건이다. 그러나 제주4.3은 1987년 민주화 바람을 타고 재조명되기 시작하다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마련된 지난 2001년에야 비로소 공식 담론의 장으로 나왔다. 제주4.3의 아픔이 드러나는데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이전 독재정권들이 침묵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든 10주기를 맞이하면 의미는 남다른 법이다. 그래서 제주4.3 70주년을 맞는 올해는 더 특별해 보인다. 그러나 이번 70주년은 특별하다기 보다 시급하다. 이제 4.3 생존자들은 칠순을 훌쩍 넘겨 팔순을 바라본다. 그래서 이번 제주4.3은 생존자들이 맞이하는 마지막 10주기 기념식이 될 공산이 크다.
시간이 많지 않다. 생존자들의 기억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그들의 증언을 채록하고, 아직 발굴하지 못한 희생자들의 유해를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가해자들의 책임 소재를 보다 명확히 밝히고,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런 가운데 문화예술인들도 제주4.3의 기억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존하는데 노력을 기울여주기 바란다.
<지슬>이 여러모로 아쉽지만, 그럼에도 제주4.3의 아픔을 드러내고 치유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미는 남다르다. 문제의식을 더욱 심화시킨 작품이 나와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