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풍이 서야 나라가 산다.” 그러나 나는 늘 “쌍놈” 집안 태생이라고 말해 왔고, 자식 없는, 상팔자로 살아온 탓에, “가정”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고향”처럼 낯선 단어가 되었다. 그러나 가정의 달을 보내면서, 한번쯤 가정 주제로 생각해 보는 것은 나에게도 부적절치는 않을 것이다.
내가 기회 있을 때마다 “저는 쌍놈 태생입니다”라고 말해 온 것은 집안을 욕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족보를 묻는 어른들께 아무 할 말을 몰랐기 때문이다. 얼굴을 본 적도 없는 할아버지, 그분의 어머니가 핏덩이를 안고, 살아남기 위하여, 물가로, 물가로 간 곳이 양양과 강릉 중간, 해안 마을. 그러니 족보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뒤늦게 집안에 공부씩이나 하신 한 분이 생겨나시고, 그분이 온갖 고생 끝에 족보를 찾아, 만들긴 했지만, 우린 이미 장성한 후였고, 시대가 달라, 족보 따위엔 관심 없이 살게 되었다. 따라서 집안, 가문, 가풍, 그런 말들은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채 살아왔다.
그런데 청년부 회원들과 1년여 동안 성경공부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이.민.자. 자녀들의 서글픈 고백을 통하여, “가풍”을 자꾸 생각하게 되었다. 이야기는 이렇다:
“저는 우리 엄마, 아빠가 돈 때문에 밤잠 설치며, 죽도록 고생하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걸 빌미로, 너희들 .. 해야 한다.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저는 받아들일 수 없어요. 한인 가정치고, 어느 집 부모가 그런 고생 하지 않나요. 남들 부모님들도 그 정도는 다 하시지요. 그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짐승들도 그런 정도는 하지 않나요?”
그렇다. 그렇다면 이 대학생이 맘 깊은 곳에서부터 아쉬워하는 건, 무엇일까? 대화를 통하여, 엿볼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사시는지, 그들의 “혼”을 알고 싶은 거였다. 모든 생명들은 조상으로부터 유전자를 타고 난다고 한다. 이 땅에 태어난 생명치고 조상으로부터 빚지지 않고 태어나는 생명은 있을 수 없다. 이런 이치는 미생물, 식물, 동물 할 것 없이 동일하다. 문제는 우리가 무수한 형태의 생명체들 중 인간이며, 인간 중에서도 기독교들이라는 데 있다. 태어나고, 노동하고, 낳고, 노동하고 그러다가는 죽는다. 그게 전부일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의 자녀들은, 우리들에게서 유전자, 혈액형, 얼굴, 이름, 그 외의 또 무엇을 얻고 있는가?
내가 무엇 때문에 웃고, 무엇 때문에 분노하며, 무엇 때문에 슬퍼하고, 무엇 때문에 파티를 여는지 내 자식들은 과연 알고 있는가? 이.민.자.의 자녀들에게 그걸 가르치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열을 내고 설을 해대지만, “속물처럼 살아왔는 걸요”하는 씁씁할 대답밖에는 들은 게 없다.
한국에 계신 어른들, 기독교 가장들은 어떻게 살고 계신가? 당신들의 집안에 가풍이, 그것도 기독교적 가풍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나요?
몇 해 전, 어린이공원 부근의 한 교회에서 설교를 한 적 있다. “우리가 과연 기독교인들인가? 무슨 근거로?” 그들은 일시 당황했다. 내 질문은 이런 거였다. “당신들이 자녀를 키우고 계시는데, 그들이 언제, 어떤 모습일 때 자랑스러운가? 우등생이 되었을 때; 좋은 대학에 입학하였을 때; 취직이 되어 높은 봉급을 받게 되었을 때; 취직한 후로는 고속 승진을 하게 되었을 때; <그 외에> 어떤 기쁨, 자랑이 있나요? 그렇다면 당신들은 전혀 기독교인이 아지 안나요?”
[막 10:23]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산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 또 있다: [시 52:7]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오직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제 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하던 자라 하리로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딤전6:17] 그대는 이 세상의 부자들에게 명령하여 ... 덧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도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셔서 즐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하십시오.
이렇게 설교를 마치고 나오려는데, 어른들 몇 분이, 손을 꼭 잡고 하시는 말씀, “사실 우리가 다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분은 적어도 정직한 분이셨다. 당신들은 언제 가장 즐거워하며, 언제 가장 슬퍼하는가? 어떤 가치에 기준을 두고 살아가고, 자녀들을 돌보고 있는가? 나는 과연 내 생활로써도 기독교 신앙을 살아내고 있고, 가르치고 있는가? 특별히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리하고 있는가?
물론 성경 중에는 다른 말들도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신 8: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전 5:19]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러나 지금, 적어도, 지금, 무한경쟁과 무저갱같은 탐욕과 폭력 시대에는, 니이체의 말대로, “부자인 것을 부끄러워하라”고 가르칠 줄 아는 집안 문화(가풍)가 기독교인들의 가정, 가정마다심겨져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무슨 얼굴이 있어,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의 “도를 전”할 수 있는가? 적어도 우리 자녀들은 이미 우리들의 비밀을 훤히 알고 있는데! 성경은 성경이고, 나는 나다? 우리의 희로애락이 속인들의 그것과 조금도 다른 바 없기에, 우리를 “짐승처럼 생각”하는 우리 자녀들을 향하여, “고약한 놈들”하고 호통치며, 바로잡을 수 있는가 당신은? 그들은 우리들보다 훨씬 더 영리한데! 차라리 우리가 기독교인이 아니었다면, 우리 자녀들이 우리를 존경할지 모른다.
아니, 재물(돈) 문제는 종교 이전의 문제가 아닌가? 어느 날, 한 제자가 부처님께 물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으뜸가는 재산은 무엇입니까? 행복으로 이끄는 훌륭한 수행은 무엇입니까? 맛 중의 최상의 맛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훌륭하게 산다고 합니까? 가장 으뜸가는 가는 재산은 신용이며, 행복으로 이끄는 훌륭한 수행은 가르침의 실천이며, 맛 중 최상의 맛은 진리이며, 지혜롭게 사는 것이 가장 훌륭하게 사는 삶이다”(숫다니파다. 1편 10:181-182).
나는 비록 쌍놈의 집안 태생이지만, 좋은 가풍을 이어받았다. 위의 인용에 나오는 부처님의 말씀이 어머님의 평소 생활교육이었다. 으뜸 가는 재산은 “신용!” 정말 아무 것도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요즘처럼 “돈”에다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한다는 건 꿈에도 몰랐다. “신용”을 잃지만 않는다면, 돈은 이 세상 어딘가에 늘 있지 않은가?
(LA 한아름 교회 홍정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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