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친구 경우의 수"
현지에서 러시아 월드컵을 중계 중인 SBS 배성재 아나운서가 24일 자신의 SNS에 올린 글이다. 배 아나운서는 "이 정도면 비벼볼 만하다"는 글도 덧붙였다.
배 아나운서의 지적대로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이 월드컵을 비롯해 각종 국제대회에 출전하면 늘 경우의 수를 따진다. 국제대회의 경우 참가국들이 일단 조별리그를 치르고, 성적순에 따라 토너먼트를 치러 최종 우승자를 가린다.
조별리그의 묘미는 출전 팀들끼리 물고 물리는 일이다. 축구라는 스포츠는 의외성이 강하다. 그래서 약체로 평가되던 팀이 강팀을 꺾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이 같은 승부의 의외성은 같은 조에 속한 다른 팀에게 어부지리를 가져다 줄 수도 있다.
이번 러시아월드컵에서도 이 같은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우리 대표팀이 속한 F조에서 FIFA 랭킹 1위이자 디펜딩 챔피언 독일이 시종 무기력한 경기를 펼친 끝에 멕시코에게 0-1로 패했다. 대회 개막 전까지만해도 F조 절대강자라는 평가를 받았음을 감안해 본다면, 독일의 패배는 의외였다. 이후 멕시코는 우리 대표팀마저 1-2로 꺾고 조1위로 떠올랐다.
그러나 독일의 저력은 만만치 않았다. 독일은 스웨덴과의 두 번째 경기에서 조별리그 탈락 위기를 겪었다. 더구나 후반 막판 수비의 핵심인 제롬 보아텡이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하면서 독일은 더욱 궁지에 몰렸다. 그럼에도 독일의 저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경기종료를 불과 몇 초 남기지 않고 토니 크루스가 프리킥 골을 성공시켜 경기를 뒤집은 것이다.
독일의 승리로 F조 상황은 무척 흥미로워졌다. 멕시코는 2승으로 조선두다. 스웨덴과 독일은 1승 1패, 골득실까지 같아 공동 2위, 우리 대표팀이 최하위다. 그러나 멕시코-스웨덴, 독일-대한민국 경기에 따라 의외의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 만약 우리 대표팀이 독일을 두 골차로 이기고 멕시코가 스웨덴을 꺾는다면 우리 대표팀은 16강 토너먼트에 진출한다. 또 두 경기에서 몇 골이 들어가느냐도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경우의 수는 어디까지나 경우의 수
그러나 경우의 수는 어디까지나 경우의 수다. 이미 대한민국 대표팀은 2패를 당한 상태다. 그리고 마지막 독일과의 경기를 앞두고 있다. 독일이 멕시코와의 첫 경기에서 패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진 건 맞다. 독일이 보여준 경기내용은 과연 전년도 우승국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박지성 SBS 해설위원은 멕시코와의 경기를 중계하면서 독일의 준비상태를 질타하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은 스웨덴과의 두 번째 경기, 특히 후반전 경기에서 예전의 예리함을 찾아가는 모습이다. 여담이지만, 독일은 조별리그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그보다 조별리그 이후 토너먼트에 맞춰 컨디션을 끌어 올린다. 독일뿐만 아니라 프랑스, 브라질, 잉글랜드, 스페인 등 매번 우승후보로 거론되는 강팀들도 비슷한 양상이다. 그런데 독일은 유난히 그 속도가 느리다. 그래서 월드컵, 그리고 유럽 국가들끼리의 국가 대항전인 유로 대회에서 종종 어이없는 경기를 펼치곤 한다.
지난 유로2008 대회 조별리그에서 독일은 크로아티아에게 1-2로 패했다. 이어 2010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첫 출전한 세르비아에게 0-1로 졌다. 특히 세르비아와의 경기에서 주득점원인 미로스라프 클로제는 퇴장 당했고, 루카스 포돌스키는 패널티킥을 실축했다. 경기를 지켜보던 요하임 뢰브 감독은 물병을 집어 던지며 고래고래 함성을 질러 보는 이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러나 유로2008 대회에서 독일은 준우승을 차지했고,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3위에 올랐다. 조별리그에서 졌다고 주춤할 독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멕시코는 발동(?)이 늦게 걸리는 독일의 허점을 제대로 공략했다. 멕시코는 초반부터 빠른 스피드로 독일을 당황케 했고, 끝내 승리를 따냈다. 한편 독일은 스웨덴과의 두 번째 경기에서까지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독일은 전반 32분 스웨덴 토이보넨에게 역습골을 내주며 끌려갔다. 그러나 독일은 후반 초반 마르코 로이스의 동점골이 터지면서 스웨덴을 거칠게 몰아붙였다. 스웨덴은 독일의 공세를 잘 버텨냈다. 특히 스웨덴 올센 골키퍼는 마리오 고메즈의 헤딩슛을 막아내며 기세를 올렸다. 그럼에도 독일은 끈질기게 공세를 이어나갔고, 결국 경기를 뒤집는데 성공했다.
독일의 이런 모습은 새삼스럽지 않다. 독일은 월드컵과 유로 대회 등에서 상대팀에게 끌려 다니다가도 단숨에 경기를 뒤집는 저력을 발휘했다. 이번 독일과 스웨덴의 경기는 1996년 잉글랜드에서 열렸던 유로대회 체코와의 결승전을 방불케했다. 당시 독일은 체코에게 패널티킥 선제골을 내주며 끌려갔다. 그러다 후반 막판 교체 투입된 현 독일 대표팀 단장 올리버 비어호프가 경기 막판 동점골을 넣었다. 이후 승부는 연장전에 돌입했고, 이후 터진 올리버 비어호프의 결승골로 우승을 차지했다.
역대 대회에서 보듯 독일은 잘 지지 않는다. 그래서 1990년 잉글랜드 대표로 이탈리아 월드컵에 출전했던 게리 리네커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축구는 90분 동안 22명의 선수가 열심히 공을 쫓고 결국 독일이 이기는 단순한 경기다."
이제 독일 축구 이야기를 자세히 풀어 놓는 이유를 적을 차례다. 독일이 스웨덴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대한민국 대표팀에게 하나의 경우의 수가 생겼다. 독일을 무조건 두 골차로 이기고 멕시코와 스웨덴 경기결과를 보자는 것이다.
여러 언론들은 관련 소식을 쏟아내다시피 했다. 검색기간을 6월 24일에서 25일로 설정하고 포털 '다음' 검색창에 '독일 경우의 수'란 키워드를 입력해 보았다. 이 결과 487건의 기사가 검색됐다. 같은 조건으로 포털 '네이버'에 검색을 시도한 결과 배에 가까운 결과가 나왔다. 결국 언론들이 경우의 수를 다룬 기사를 쏟아 낸 셈이다.
그러나 독일은 경우의 수로 따질 상대가 아니다. 역대 대회에서 보듯 독일은 무시할 수 없는 저력을 과시해왔다. 독일은 역대 월드컵에서 무조건 8강 이상의 성적을 거뒀다. 또 독일은 자칫 조2위로 토너먼트에 진출하면 브라질을 만날 수 있기에 대한민국과의 경기에서 다득점을 노릴 가능성이 높다. 반면 스웨덴, 멕시코전에서 드러난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의 경기력은 독일을 상대하기에 벅차 보인다. 물론 스웨덴, 멕시코와의 경기 내용은 나쁘지 않았다. 심판이 편파판정을 한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지점도 있다.
축구 전문가가 아니어서 대표팀에 대한 평가가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지난 두 경기를 되짚어 보면 수비는 불안해 보이고 손흥민에 대한 의존도는 지나치게 높아 보인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이런 대표팀을 두고 독일과 경우의 수를 따져 16강행을 점치는 건 무의미해 보인다.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경우의 수는 아무 의미 없다는 말이다. 이런 이유로 독일과 경우의 수를 따지는 보도를 쏟아내다시피 하는 언론의 태도는 무책임하다.
대한민국 축구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정점으로 뒷걸음질 치는 모양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수준이하의 경기력으로 팬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대한민국 대표팀은 이번 러시아월드컵에서 하메스 로드리게스가 버틴 콜롬비아를 2-1로 물리치고, 세네갈과 2-2 동점경기를 펼친 일본과도 대조를 이룬다.
언론에게 이런 바람을 전하고 싶다. 독일에게 두 골차로 이기면 대한민국 대표팀이 16강에 진출할 수 있다는 식의 허황된 시나리오는 이제 그만 다뤘으면 좋겠다. 그보다 대한민국 선수들의 선전을 기원하고, 동시에 왜 한국의 전반적인 축구 실력이 2010년 이후 뒷걸음질 치는지, 안정환·이영표·박지성 등 왜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핵심주역들이 현장에 있지 않고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거나 축구 해설 있는지에 초점을 맞춘 심층보도를 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