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커스 보그,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김태현 옮김 (비아, 2013)
한 신학자의 사망 소식에 깊은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마커스 보그의 경우는 달랐다. 지난 2015년 어느 날, 페이스북을 통해 접한 그의 사망 소식은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당시 나는 보그의 책을 접한 게 단 세 권 뿐이었었고, 당연히 그의 신학을 아주 잘 안다고 말하기엔 무척 미안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의 죽음에 몹시 놀라는 나를 보면서, 내가 마커스 보그라는 사람을 특별히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작년에 알게 된 책,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마커스 보그는 이 책을 통해 마치 부활한 예수처럼 나를 다시 찾아왔다. 보그가 여러 저서를 통해 누차 강조한 '하느님의 꿈,' 즉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이 땅에 실현해야 할 하느님 나라를 위한 삶으로의 강력한 초대장을 들고서 말이다. 한국교회의 일반적 현장에서 결코 쉽지 않겠지만, 끝내 그 정의와 평화의 세상을 이루기 위한 초대장을 용감하게 개봉해주길 그는 바라는 것 같았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이 책은 결국 '이 세상'을 위한 그리스도교에 대한 설명서다. 미국인 가수 조니 캐쉬의 어느 노랫말처럼 "천국 생각을 하느라 이 땅에서는 쓸모없는" 기독교는 사실상 기독교가 아니라는 선언인 것이다. "그리스도교인이 된다는 건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하느님의 열망에 동참하는 것이다"(336쪽). 보그는 이런 말들을 계속 강조한다.
그런데 정의와 평화를 위한 디딤돌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작동하지 못하는 이유를 그는 두 가지로 꼽았다. 하나는 '천국과 지옥 해석틀'로 성서와 그리스도교 언어를 이해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문자주의'의 시각으로 성서와 그리스도교를 바라본다는 것이다(23쪽). 천국과 지옥 해석틀은 성서 어디를 펼쳐도 결국 '내세'에 관한 이야기로 귀결시키니, 결국 본문이 왜곡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리스도교를 이 세상과 관련 없는 종교로 더욱 몰아간다. 문자주의의 시각은 '시대'와 소통하기 어려운 윤리적 관점을 갖게 만든다(43쪽). 자연히 문자주의 역시 그리스도교를 폐쇄적인 집단으로 몰아간다.
이에 마커스 보그는 오늘날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신자 대다수가 당연시하는 '천국과 지옥 그리스도교'가 성서와 초기 그리스도교와 연속성을 갖지 못하는 것을 지적함(29쪽)과 동시에, 문자주의의 대안으로서 '역사-은유적 접근'(historical-metaphorical approach)을 제안한다. 성서를 읽을 때 무작정 받아들이지 말고, '그때'는 이 말이 무슨 말이었는지 생각하며 읽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46쪽).
책의 나머지 부분은 결국 보그의 그런 두 가지 지적과 제안에 입각한 '용어 정리'다. 그동안 천국과 지옥 해석틀 및 문자주의에 의해 그 의미가 훼손된 '구원,' '성서,' '하느님,' '예수,' '부활,' '천국,' '주의 기도'와 같은 개념들을 다시 정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용어 정리의 저변에 흐르는 보그의 신학은 확고하다. 그리스도교는 저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천국과 지옥 해석틀을 제거하고 문자주의를 극복하면, 성서는 이 땅의 정의와 평화를 향한 하느님의 열망으로 가득 찬 책이라고 말이다. "그리스도교인은 다른 종류의 세상,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꿈, 하느님의 활동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았다"(335쪽).
그런데 이 대목에서 책 제목,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를 보고 느낀 것을 잠시 언급해야겠다. 물론 원제목은 "Speaking Christian"이긴 하지만, 원론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매한가지다. 언뜻 '새가족 양육교재'같은 느낌이 난다. 나는 자문해본다. 정녕 이런 게 그리스도교라면, 과연 누가 교회에 남아 있게 될까? 과연 누가 '새가족'이 되려고 할까? 많은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결국은 천국에 가려는 이유 때문에 교회 안에 남아 있으려는 사람들에게, 종교 행위로 인생의 고달픔을 달래보려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꿈'이 과연 매력이 있을 것인가?
나는 언젠가 한 교인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기독교가 그런 것이라면, 우리가 꼭 기독교인일 필요가 있습니까? 그것은 정치가들이나 사회운동가들도 하는 일들이 아닙니까?" 그분은 아마도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결정적 이유가, 결국 예수만이 천국행 티켓을 주기 때문 아니냐고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나는 그분이 특별히 이상한 질문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그분이 '천국과 지옥 그리스도교'를 그리스도교로 배워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분 뿐 아니라, 보통의 한국교회 교인들이 그런 배경 속에서 살아왔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정의와 평화'에 대한 부담감이다. 머리로야 부정할 이유가 없지만, 굳이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싫은 마음. 그 마음은 어쩌면 편안한 삶을 추구하는 보통 인간들의 본능일 터. 나를 비롯한 누구나 그런 본능이 있을 터이니 이상하게 볼 이유는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교는 애당초 천국과 지옥에 관한 담론이 아니라는 것이 첫째고, 정의와 평화를 향한 하느님의 꿈에 무관심한 채 그리스도교인이 될 이유가 없다는 것이 둘째다. "문제는 우리 자신과 세상의 변화를 바라는 하느님의 열망에 동참하지 않고서도 그리스도교인이 될 수 있는가이다. 긍휼과 정의, 평화가 넘치는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열망을 자신의 열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서도 그리스도교인이 될 수 있는가?"(338쪽)
나는 새신자 양육교재와 같은 제목을 달고 있는 마커스 보그의 책이, 기존 신자를 진정한 의미에서 '새신자'로 세우는 책이 되길 소망한다. 저 세상을 향한 사람들이, 이 세상을 향한 사람들로 전환되길 바란다. 그러나 이것이 너무 순진한 바람이라면, 차라리 신자로서의 삶을 멈추게 되는 일들이나마 많이 일어나길 바란다. "그런 기독교는 부담스럽다. 기독교가 그런 것인지 몰랐다"라며 교회를 떠나는 이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천국 생각을 하느라 이 땅의 지옥 같은 현실을 외면하는 그리스도교인들에 의해 정의와 평화를 향한 '교회 밖' 헌신들이 강력한 방해를 받는 것 같아 너무나 안타깝기 때문이다.
부활의 몸, 부활의 활자로 나를 다시 찾아준 마커스 보그. 그가 내세적 담론에 그다지 비중을 두지 않는 그리스도교(62쪽)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긴 했지만, 나는 그를 '내세에서' 꼭 만나고 싶다. 그때까지 그가 잘 지냈으면 좋겠다. 그게 어디든, 무엇이든.
"우리는 죽어 하느님에게로 간다. 나는 이 이상은 알지 못한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알아야 할 전부다."(291쪽)